#082화
콩닥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자화당 앞에 도착하자마자, 무흔은 윤이 챙겨준 금덩이 세 알을 꺼냈다.
“이걸로 내 모습을 조그맣게 만들어 줘.”
“왜?”
“홍연에게 작별 선물로 주게.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싶어.”
윤의 눈썹이 불쾌하게 꿈틀댔다.
“흠… 몇 번 만나지도 않고 그대가 그리 마음을 뺏길 정도의 인물인가?”
“그래서가 아니야.”
무흔은 희로국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모두들 제게 손이 닿는 것을 꺼렸기에 춤은 늘 눈으로만 배웠었다. 동작이 잘못될 때면 그들은 멀찍이 서서 시범을 보이고 말로만 고쳐주었었건만.
홍연은 저주 따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에서 열과 성을 다해 지도해주었다. 심지어 몸을 붙들어 자세를 교정해주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비단 홍연만은 아니었다. 지금껏 만난 상당수의 건원국 사람들은 저를 그리 대해주었다. 윤도 처음부터 그러했고.
“유폐된 황자에게 남는 것은 시간이라. 그것을 때우는 많은 방법 중 내가 가장 좋아한 건 춤이었어. 홍연 덕분에 정말 오래간만에 격의 없이 순수한 즐거움을 느꼈지. 꼭 보답하고 싶어.”
무흔은 윤의 손바닥 위에 자그마한 금덩이들을 올려놓았다.
“주 국공, 부탁해.”
꼭 해줄 거지? 라는 식으로 무흔이 간절함을 담아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윤을 올려다보았다. 윤은 순식간에 무장해제가 되어 버렸다.
“그 부탁을 들어주면, 배운 춤을 보여줄 거야?”
“그럼. 물론이지. 효명성에 돌아가서 꼭 보여줄게. 꼭!”
지킬 생각 없이 일단 지르고 보는 약조인 것이 윤의 눈에 뻔히 보였다.
“효명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가 쏟은 정성만큼 지인을 받아낼 거야.”
“주 국공… 좀, 대범해질 수는 없겠나?”
윤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 왼손바닥에 금을 올려놓았다. 그 위에서 오른손 검지를 나선 모양으로 둥글게 휘저었다. 회전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윤의 손에서 빚어져 가는 황금의 형체를 무흔은 넋 나간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우와….”
금덩이들이 뭉쳐지다 나뉘어 사람의 형태를 이루는 것 같더니만, 이내 긴 머리카락을 아름답게 휘날리며 한 팔을 우아하게 든 채 춤을 추는 무흔의 모습이 환상적으로 빚어졌다.
“이런 게 가능하다니! 내 눈으로 보고도 아직도 잘 안 믿겨.”
생동감 넘치는 자그마한 황금상에 무흔의 감탄이 터져 나왔다. 보라색의 눈동자가 더 초롱초롱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보상을 받은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아까 약조한 실질적인 보상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자화당 안쪽의 널따란 연습실을 찾은 무흔은 홍연에게 노랗게 빛나는 선물을 건네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윤은 멀찍이 떨어져서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무흔의 피부가 하얗고 투명하게 고운 것은 눈으로 보기에 참으로 황홀하였다. 허나 독특하게도 그로 인한 색다른 특징 하나가 존재했다.
부끄럽거나 민망하거나 혹은 두근거리는 흥분이 일 때, 무흔의 뺨과 귀는 남들의 몇 배로 붉게 물들곤 했다.
지금 홍연을 바라보는 무흔의 얼굴은 비록 서운함이 그득 차 있기는 하였으나 여느 때와 똑같이 뽀얗고 하얀 달님 같았다.
지극한 평정의 상태. 윤의 마음에 박혀 있던 작은 질투가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
공씨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아쉬움과 서운함에 푹 젖은 무흔은 가랑에 올라 윤의 품에 몸을 기댔다.
“주 국공, 효명성에도 나에게 춤을 가르쳐 줄 수 있는 무희가 있을까?”
“물론. 홍뭐시기보다 더 훌륭한 무희를 붙여주지. 춤과 말, 그리고 또 뭘 하고 싶어?”
“검을 배우고 싶지. 호신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 전에 자객이 들었을 때, 종사관에게 배우려 했는데 허락해주지 않았잖아.”
무흔은 고개를 들어 살짝 뒤를 돌아보고서는 가볍게 눈을 흘겼다. 그 귀여움이란, 윤의 눈에 흡족함의 범주를 넘어설 정도였다.
“검은 이환 대신 내가 가르쳐줄게. 또 다른 건?”
“음… 결국 나란히 있다는 그 온천과 폭포는 보지 못했잖아? 거기부터 갈 거야.”
“그대가 치유자인 건 언제까지 비밀로 할 건가?”
무흔은 윤의 품에 머리를 기대며 글쎄, 하고 중얼거렸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선택일지 아직 갈피가 잡히질 않았다.
그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확실히 해둘 부분이 있었다.
“내가 두 번 다시, 절대로 희로국에 돌아갈 일이 없는 게 확실하다면 내가 치유자임을 밝혀도 괜찮아. 사실 흑성부대와 함께 실전에 나가게 될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두근거리거든.”
무흔은 벽제성에서 효명성으로 호송되던 중 나타났던 마물과 흑성부대를 떠올렸다. 치유자가 천홍의 상처를 순식간에 아물게 하던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했다.
“하지만… 혹시라도 내가 돌아갈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남아 있다면, 난 끝까지 비밀을 지키고 싶어.”
윤의 마음이 대번에 무거워졌다. 석고대죄를 거둔 후, 황제와 대면하여 나눈 이야기를 이제 할 때가 되었다.
명령 불복종에 대한 윤의 죄를 사하고 무흔을 가뿐히 내어주는 대신 황제가 내건 조건이 하나 있었다.
딱히 말 못 할 내용은 아니었다. 무흔의 기분이 너무 좋아 보였기에 윤은 그저 말을 꺼내지 않고 있었을 뿐. 언제 해도 해야 할 이야기였다.
다만 그 내용이 무흔이 말하는 그 ‘일말의 가능성’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이라. 윤은 한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황제께서는 석고대죄를 거두게 하신 후에, 나를 그냥 가라 하신 것은 아니고… 약조 하나를 받아내셨어.”
“나와 관련된 거야?”
“응. 그대의 거취에 대해.”
윤은 고삐를 쥔 무흔의 두 손을 꼭 감싼 후에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황제께서는 포로 교환에 대한 희망을 여전히 버리지 않으셨어.”
“…….”
“염록왕께서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돌아오기를 원하시니 희로국의 수도로 쳐들어가는 것을 주저하시는 거야.”
“대단히 각별한 우애네.”
“황제께 동복형제는 염록왕뿐이니.”
“동복형제라 하여 다 그리 절절한 건 아니야.”
무흔의 말투에는 가시가 있었다.
윤은 그것을 눈치챘으나 이유를 캐묻지는 않았다. 무흔의 동복형제는 단 한 명, 희로국의 현 태자이다.
첩자로 잠입한 하경의 밀서에 따르면 그는 잔악무도한 성정에 안하무인, 또한 폭군의 자질을 갖춘 자라 했다.
“희로국의 현 상황을 고려해볼 때, 병력을 총집결하여 전쟁을 마무리하면 좋겠지만… 황제는 백성들을 중요시하기에 당장은 전쟁을 치르지 않을 거야.”
“그것이 무슨 관계인데?”
“요즘 농가에서는 한창 곡식과 열매를 수확하는 중이거든. 바쁜 그들을 전쟁에 동원할 수는 없으니까. 겨울을 넘긴 후에야 출정을 명하실 모양이야.”
“그럼 그때까지는 내 상태가 불안불안해?”
윤은 무흔의 머리를 쓰다듬고 작고 동그란 뒤통수에 입을 맞췄다.
“그대가 나의 사람으로 효명성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은 다음 포로 교환이 성사될 때까지, 라고 황제께선 못 박으셨어.”
“다시 사신단을 보내려는 건가.”
“만에 하나 그런 사태가 닥친다 해도 반드시 방법을 찾아낼 테니까 걱정하지 마. 지금부터 대비하면 되지. 같이 생각해 보자.”
“고마워.”
둘 사이에는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말이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밀착하여 붙어 앉은 둘은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그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
무흔과 윤의 일행이 효명성에 도착하였다.
무흔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평과 도학 선생을 필두로 실로 엄청난 인원이 무흔을 마중 나와 반겼다. 출발 전에 윤이 미리 띄워 보낸 월영이 소식을 알려다 준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환대에 크게 감복한 무흔은 그만 눈물을 터뜨려 버렸다.
아직 그 눈물의 의미를 모르는 재랑과 강문은 은증왕께서 우신다며, 마중을 나온 게 싫으신 거 아니냐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모습에 간신히 무흔의 웃음이 터졌다.
“은증왕께서 이리 눈물이 많은 사람인 줄은 몰랐소만?”
저를 놀리며 웃는 윤을 팔꿈치로 쿡 눌러 찍고, 무흔은 저를 이끄는 숙영부인을 따랐다.
예전의 처소로 향하는 길, 마치 집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무흔의 마음을 붕 뜨게 만들었다.
숙영부인에게 중경의 시장에 대한 이야기를 신나게 늘어놓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성주의 처소 문 앞까지 이르렀다.
그곳을 가로질러 별당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숙영부인이 멈춰 섰다.
“오늘부터는 여기서 머무시면 됩니다.”
“여기는 주 국공의 침소인데?”
“예, 황제께서 친히 윤허하신 성주님의 사람이시니, 응당 한 침대를 쓰는 것이 옳지요. 침구는 모두 새것으로 제작하였습니다.”
“저기, 그… 어… 마음을 써 준 건 고맙지만, 나는 그리로… 원래 쓰던 저쪽으로 가, 가겠네.”
무흔은 말까지 더듬어가며 부리나케 별당으로 향했다. 시종 아휘가 냉큼 그의 뒤를 쫓았다.
“아니! 이게 대체….”
침소부터 들어선 무흔은 기가 막히고 또 어안이 벙벙하였다. 눈을 크게 뜨고 좌우를 두리번거리다 말고, 제 뒤를 따라온 아휘에게 다급히 물었다.
“내가 쓰던 침대를 아예 치웠어?”
“예, 사평 장사께서 이리하라 명하셨습니다.”
이 자들이 아주 그냥 작정을 했구나.
무흔은 입을 삐죽이고 눈을 가늘게 뜨고서는 텅 빈 방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 감동으로 흘렸던 눈물이 아까워졌다.
“흥, 됐다. 내 짐은 여기다 풀거라. 여기서 지낼 것이야.”
“하오나 여긴 이불은커녕 요 하나, 깔개 한 장 없사옵니다. 북부는 벌써 아침저녁으로 찬 기운이 꽉 찼으니, 새벽에 바닥에 누웠다간 입이 돌아가실 게 뻔합니다.”
무흔은 하는 수 없이 윤의 방으로 터덜터덜 되돌아왔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가 다시 나타나자마자 숙영부인의 뒤에 줄줄이 서 있던 여종들이 다가와서는 종알종알 그의 넋을 빼놓았다.
“씻으실 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어요.”
“갈아입을 옷은 둘 중 어느 쪽이 마음에 드시나요?”
“시장하지는 않으십니까? 드시고 싶으신 것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얼른 준비하겠습니다.”
숙영부인이 흐뭇하게 웃으며 무흔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중경에서의 일을 전해 들었습니다. 많이 힘드셨을 텐데, 이리 무탈히 다시 모시게 되어 이 늙은이가 어찌나 기쁜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어요.”
무흔을 둘러싼 모두가 참 잘됐다며 고운 미소를 보내주고 있었다. 저를 반겨주는 그 진실된 다정함에 무흔은 결국 손을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윤과 방을 같이, 심지어 한 침대를 쓰라니. 어색한 건 어색한 거였다.
오래간만에 만난 이들과 회포를 푼다는 핑계를 대고 무흔은 효명성에 도착한 이후 내내 윤을 피해 다녔다.
강문과 재랑을 만나 그 사이 그득 쌓인 구경거리를 죄다 섭렵했다. 그런 후에는 천홍과 맹욱을 발견하고 그들을 따라 예전에는 허락받지 못했던 흑성부대의 훈련장에도 한참이나 머물고, 그렇게 바쁜 척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움직였다.
하지만 이제는 밤이 깊을 대로 깊었다.
아휘에게 등 떠밀린 무흔은 윤의 침소에 발을 들였다.
“헉.”
방에 들어서자마자 무흔은 기겁했다.
옷을 막 벗어 손에 든 채로 상반신을 훤히 드러낸 윤이 있었다. 단단하게 뻗은 어깨와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가슴부터 눈에 들어왔다.
‘왜 꼭 처소에서 맞닥뜨릴 때마다 맨살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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