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화
윤이 지인 운운하니 뒤늦게 목걸이 생각이 났다.
무흔은 베개 옆에 떨어진 회룬석 목걸이를 그제야 발견하고, 그것을 냅다 낚아채어 자신의 목에 걸었다.
“흥, 어디서 얕은수를 쓰고 난리야?”
“안 만져 줄 거면 춤이라도 보여줘.”
“갑자기, 무슨….”
“나만 못 봤더군.”
윤은 이불을 둥글둥글하게 말아 다리 사이에 꼭 껴안은 채로 벌떡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보고 싶어.”
무흔은 춤출 무(舞)가 새겨진 목걸이의 걸쇠를 채우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보여주기엔 아무래도 민망하고, 안 보여준다 고집부리는 것도 어쩐지 어색하고.
그 와중에 윤의 새카만 머리카락이 넓디넓은 한쪽 어깨로 풍성하게 쏟아져 내린 것이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의복이 흐트러진 탓에 두툼하게 솟은 가슴과 단단하게 쩍쩍 갈라진 복부가 다 들여다보이는데, 거기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제 두 눈알이 참으로 한심했다.
무흔은 애써 몸을 옆으로 틀며 괜히 뭔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춤이야 뭐, 다음에 기회가 되거든 봐.”
“다음 언제?”
“효명성에 돌아가서….”
무흔은 일단 시기를 미뤘다. 윤이 제 춤을 본다는 생각만으로도 괜히 부끄러워 숨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효명성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오늘 출발할 테니 짐을 싸 둬.”
“뭐? 오늘?”
“조반을 들고, 이모님께 인사드리러 가자.“
윤은 냉큼 몸을 일으켰다. 무흔은 정신없이 그에게 이끌려 씻고 먹고 단장하고, 결국 부용군주 앞에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
고즈넉한 응접실에서 부용군주와 다과를 들던 윤은 바로 용건을 꺼냈다.
“이모님, 준비를 마치는 대로, 오늘 바로 효명성으로 출발하려 합니다.”
부용군주가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냐는 표정을 짓자, 윤은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괜히 중경에 더 머무르다 황제께서 변덕이라도 부리시면 곤란하니까요.“
“그래, 그렇기는 하다만… 아직 이곳에서 볼일이 남은 너희 일행들도 있지 않니?”
“그들은 따로 모여 후발대로 돌아가면 될 것입니다. 객잔을 잡아두겠습니다.”
“어머 무슨 소리니. 우리 집에 계속 머물면 될 것을. 그럼 우리 설하는 어찌한다?”
“제가 갈 때 데리고 가도록 하지요.”
부용군주는 아무래도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몇 달 만에 만난 막내딸과 이리 금세 헤어지기 싫은 것이 당연했다.
“윤아, 후발대의 장과 일행의 호위는 누가 맡느냐?”
“이환에게 장을 맡길 것입니다. 호위로 데려온 병사들은 반반 나눌까 하는데요.”
이모와 조카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무흔은 상 위에 과하게 차려진 중경의 새로운 과자들과 떡을 모조리 하나씩 맛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아직 구경하지 못한 병과들도 많을 텐데, 이유가 그것만은 아니지만서도, 오늘 당장 돌아가야 하는 것이 솔직히는 아쉬웠다.
“주 국공, 나도 후발대로 가면 안 되나? 위험하지 않도록 이환한테 꼭 붙어 있을게. 아직 구경 못 한 것도 많, 헉!”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무흔은 흠칫 놀랐다.
곱게 차를 마시려던 윤이 난데없이 성난 호랑이처럼 눈을 부릅뜨고 무흔을 돌아보는 것이었다.
그러다 마치 거짓말처럼 활짝 웃으며 무흔의 다리를 톡톡 두드렸다. 얼굴은 웃고 있었으나 목소리는 썩 곱지 않았다.
“다음에 설하가 여기 올 때 더불어 또 중경에 오면 되지 않겠나?”
“그럼 나는 이따 외출을 좀 해야겠어. 홍연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와야지.”
기껏 노기를 가라앉히고 찻잔을 막 내려놓던 윤은 그것이 영 마뜩하지 않은 듯 퉁명스레 중얼거렸다.
“나 간다 잘 있어라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보자, 그리 서신이나 곱게 남기면 되지 뭘 찾아가기까지.”
“사제의 연을 맺었으니 그에 합당한 예를 갖추는 게 당연하잖아? 주 국공은 가만 보면 옹졸한 구석이 있어. 은근히, 아니 대체로 속이 좁아.”
무흔은 투덜대며 말린 과일이 든 작고 예쁜 과자 하나를 냉큼 입에 쏙 넣어 버렸다.
부용군주가 오호호 웃으며 무흔의 빈 잔에 차를 채우라 시녀에게 손짓하였다.
“윤이가 저 나이 먹도록 정인 하나 품어본 적이 없어 서툴러 그러하니 은증왕게서 이해하십시오. 윤아, 우리 설하는 후발대로 보내도록 할 테니 그리 알거라.”
“저와 함께 가는 편이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그 반대이지. 만에 하나 일이 생긴다 치자. 윤이 네가 이능력을 과히 썼다 폭주의 위기라도 닥치면 어쩔 셈이냐?”
“이모님, 그리 극단적인 상황을 생각하시다니요.”
“일전에 은증왕 처소에서 일었다던 그 화재 사고를 생각해 봐라. 우리 설하가 네게 휩쓸려 덩달아 또 이능력을 제어하지 못하면 어째? 이번에 중경에 온 너희 일행 중에는 치유자도 없지 않니?”
그 말에 윤과 무흔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윤은 무흔의 복잡한 생각과 마음을 대번에 읽어냈다. 예전처럼 치유자임을 무작정 숨기겠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고민과 망설임에 가까운 눈빛이었다.
“후발대에 정예부대 전체를 배치해다오. 선발대 규모를 최소화하여 윤이 너는 너와 은증왕 둘만 잘 챙기거라.”
부용군주가 간단히 결론을 내려주었다.
“듣자 하니 효명성에서 온 젊은 의원도 약재상을 찾아다니느라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더구나. 도학 선생의 제자 중 그가 가장 빼어나다 들었다. 무예의 달인인 이환과 그 의원이 함께라면 오히려 그쪽이 설하에게 훨씬 더 안전할 것이야.”
무흔은 입을 꾹 다물고 병과만 오물오물 씹어 삼켰다.
윤 또한 선발대로 가게 될 대단한 능력의 치유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부용군주와의 다과를 마치자마자 무흔은 부리나케 채비를 하고 홍연에게 인사를 하러 나섰다.
무흔이 이곳에 온 이후로 밀착 호위는 줄곧 이환의 몫이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윤이 무흔의 호위를 자처하고 나섰다.
사람이 많은 곳에 그를 내보내는 것도 걱정되고, 자화당에 가면 혹시라도 무흔의 춤을 볼 수 있을까 하는 꾀도 들었으며, 무엇보다 단둘이 중경에서 마지막으로 달콤한 추억의 시간을 쌓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간지러운 바람이 마음을 꽉 채웠기 때문이었다.
윤은 무흔을 자신의 애마, 가랑에 태웠다.
윤의 다리 사이에 폭 들어와 안긴 채, 무흔은 고삐를 꽉 붙들었다. 손가락에 피가 통할까 싶을 정도로 있는 힘껏 가죽 줄을 쥐고 있었다.
“전에 말에서 떨어진 기억 때문에 무서운 거야? 마차로 갈까?”
윤이 걱정스레 묻자 무흔은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난 늘 말을 타고 싶었어.”
“그래, 극복해야지. 좋은 자세야. 헌데 몸의 자세는 이러하면 안 돼.”
윤의 손이 무흔의 등허리를 위쪽으로 쓸어 만졌다.
헉, 하고 무흔은 숨을 들이켰다. 척추뼈를 타고 찌릿한 떨림이 일었다. 말이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라 믿고 싶었지만, 이는 확실히 윤의 손길 탓이었다.
“긴장은 풀되, 상체는 바로 세워야 해.”
“응.”
“말의 움직임을 느껴 봐. 허리와 엉덩이는 유연하고 탄력 있게, 말과 하나로 움직인다고 생각하고.”
무흔은 제 허리와 엉덩이를 둥글게 쓸어 만지는 윤의 손등을 철썩 소리 나게 때려 갈겼다.
“설명만 해. 굳이 만지지는 건 또 뭐야?”
맞은 것 따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윤이 유쾌하게 웃으며 속도를 올렸다.
묵직한 소리로 여유 있게 걷던 말이 다그닥다그닥 경쾌한 걸음을 시작했다.
“오래간만에 가랑에 올라타니 어때?”
무흔의 귓가에 바짝 가까이 윤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 말이라는 것이 참 묘했다.
무흔은 벽제성 냉궁을 지키던 병사들이 돌려보던 붉은 표지의 은밀한 서책 하나를 떠올렸다.
벗고 드러누운 사내의 가랑이 위에 꼭 말을 탄 것처럼 다리를 벌리고 올라탄 몸. 우연히 보았던 그 서적의 삽화가 머리를 스쳤다.
“어… 뭐가 어, 어떻긴 어때. 말이… 힘이 좋네.”
힘이 좋다고, 그리 제 입에서 나온 말에 무흔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병사들이 낄낄대며 말하기를, 이 자세에서는 드러누운 사내의 올려치는 힘이 좋아야 한다 했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헉!’
집중력이 흐트러진 순간, 몸이 기우뚱 옆으로 흔들렸다. 동시에 가랑도 방향을 틀었다.
“어이쿠, 조심해야지.”
윤이 능글맞은 감탄사를 붙이며 냉큼 무흔의 몸을 자신에게로 바짝 끌어당기고는 애마를 다독였다.
“은증왕, 양쪽 허벅지에 힘을 똑같이 주는 것은 매우 중요해. 그래야 말이 똑바로 나가거든. 그렇지 않으면 기승자의 힘이 약한 쪽으로 말이 방향을 틀게 돼. 지금처럼.”
“아….”
“기승자의 허벅지 힘이 기승자의 중심을 지탱해주는 거야.”
윤이 기승자, 기승자, 그리 반복해서 말하는 통에 무흔은 다시금 문제의 그 삽화를 떠올렸다.
이상하게도 그런 그림은 고작 한 번 보았을 뿐인데도 선명하게 뇌리에 새겨지는 법이라. 삽화 바로 아래에 기승위라 이름 붙은 자세가 설명되어 있던 것을 무흔은 분명히 기억했다.
“한 발 한 발 나갈 때마다 가랑이 위아래로 들썩들썩 하잖아. 그 움직임에 맞춰서 허리와 엉덩이를 아까 말한 대로 유연하게, 탄력을 줘 봐.”
무흔은 윤이 제 등 뒤에 앉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겼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새빨갛게 익어 버린 제 얼굴을 들켰을 테니.
가랑이 들썩대는 움직임에 맞춰 허리랑 엉덩이를 움직이라? 승마에 대한 순수한 지도였으니 망정이지, 다른 상황이었더라면 제정신으로 들을 수 있는 말이 절대 아니었다.
“저기, 주 국공. 오늘은 내가 좀 피곤한데 말이야. 말타기를 배우는 것은 효명성에 가서 이어 하는 것이 어떨까?”
“그래, 내 그대를 위해 순하고 좋은 말을 찾아줄게. 처음이라 힘세고 거친 말은 다루기 어려울 거야. 매달려 버티는 것만으로도 숨을 헐떡댈 거라고.”
무흔은 이제 자신의 마음가짐을 의심했다.
매달려 버티는 것만으로도 숨을 헐떡댄다니! 어찌 그것이 야릇하게만 해석되는지. 한숨이 다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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