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화
그 짧은 시간 동안 무흔의 보라색 눈동자가 변화무쌍하게 빛나고 있었다. 홀린 듯이 이를 감상하던 윤은 다시금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뭘 그렇게 망설여? 배운 거 보여달라고 안 할게. 들어와. 그냥 안고만 있자.”
“다… 다 벗고 안는다고?”
“연홍이랑은 다 벗지 않았어?”
“홍연이야! 그리고 하나도 안 벗었어!”
벗고 젖은 몸으로 서로 들러붙고, 그 뒤에 이어질 행위가 자연스레 스치는 순간 무흔의 마음엔 공포가 밀어닥쳤다.
과거의 기억에 숨이 막힌 무흔은 나무로 된 통의 턱을 꾹 붙들었다.
윤의 큼직한 손이 무흔의 손등을 살포시 감쌌다.
“나도 보고 싶었어.”
저를 올려다보며 선하게 웃는 윤의 얼굴에, 또 그 다정한 목소리에, 무흔은 그제야 편히 숨을 내뱉었다.
‘나도’ 보고 싶었다고 그가 제멋대로 말한 것을 평소라면 한 마디 걸고 넘어가겠지만, 틀린 말도 아니니 그냥 덮어두기로 했다.
“은증왕, 그 무희와는 새벽까지 무엇을 했는데?”
“무희에게… 어… 배웠어.”
“뭘?”
“뭐, 기예의 일종이지.”
“그렇게까지 아니해도 되는데….”
“응?”
윤이 눈이 장난스레 빛났다.
“내 몸을 기쁘게 하려 방중술을 따로 익힐 필요는 없다는 말이야. 난 그저 은증왕 그대만 있으면 되거….”
“아니거든!”
무흔은 바닥에 놓인 바가지를 집어 윤을 향해 냅다 던졌다. 머리로 정확히 날아오는 것을 윤이 가뿐하게 피했다.
“아니 그럼 대체 뭘 배운 건데?”
답을 주저하던 무흔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딱히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니. 그저 민망할 뿐이었다.
무흔은 고개를 홱 돌려 윤의 눈을 피하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춤.”
“응? 안 들려.”
속삭이는 수준이었으니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결국 무흔은 주춤주춤 뒷걸음질하며 목소리를 조금 더 높였다.
“춤!”
외마디 그리 뱉어놓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던 무흔은 그대로 욕실을 뛰쳐나가 버렸다.
윤은 제 귀를 의심하였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춤, 이라고?”
문득 무흔이 효명성에서 도망을 치던 날의 밤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검을 쓰는 모양새도 검술이라기보다는 검무에 가까웠지. 그러니까, 검을 춤으로 배웠다?”
윤은 욕조를 붙들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이 저리 도망칠 정도로 부끄러울 일인지 원.
소리 내어 웃다 말고 무흔이 나간 쪽을 바라보았다.
회룬석 목걸이에 새겨준 이름이 이렇게나 딱 들어맞을 줄이야.
춤출 무(舞)에 기쁠 흔(欣), 무흔.
유폐된 황자의 아름답고도 서글픈 춤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하얗고 긴 팔에서 그대로 뻗어 나온 것 같은 차가운 검신이 허공을 찌르고 달빛을 갈라 윤의 마음에 그 조각을 깊이 박아넣었다.
뱅그르르 도는 몸의 선은 또 어찌나 황홀할지. 우아하게 뻗은 목, 곧은 등과 가느다란 허리를 지나 둥글게 빚어진 엉덩이. 그 아래 길고 탄탄하게 자리한 허벅다리가 힘차게 공중을 박차고 날아올라 회전하며 감겨드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 희미하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제 허리 아래로 솔직한 신호가 왔다.
주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대의 춤을 내 눈으로 봐야겠다.”
*
윤은 최대한 빨리 효명성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모두가 당황할 정도로, 다급함이 뿜어져 나왔다.
무흔을 데려가 숨겨 버리고 싶은 생각이 앞선 탓이었다.
황제로부터, 그리고 애써 믿으려 노력했던 숙부로부터.
석고대죄를 마치고 돌아온 날과 그다음 날, 윤은 숙부를 제외한 중경의 지인들을 모조리 찾아가 인사를 나눴다.
본디 사나흘은 염두에 두었던 일정이건만, 윤은 빨리 해치우고 돌아갈 생각에 이환조차 호위로 거느리지 않고 쉴 새 없이 사람들을 만났다.
그는 천지가 고요한 시각까지 술대접을 3회나 거듭하여 받고 이모의 집으로 돌아왔다.
비틀거리며 처소로 들어오는 주군의 모습에 이환은 깜짝 놀라 달려왔다.
“아니, 주군! 어찌 이리 취하셨습니까?”
“…환아. 은증왕은 어디 있느냐?”
“오늘 몸을 많이 움직이시어 피로하셨는지 일찍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윤은 오늘 아침, 무흔이 설하와 시장 구경을 갈 거라며 들뜬 얼굴로 말했던 것을 기억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신기해하며 연신 두리번거렸을 그의 얼굴을 떠올리니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네가 호위는 잘했지?”
“물론입니다. 철썩같이 붙어 다녔지요. 오늘도 자화당에 가셔서 홍연에게 새로운 춤을 배워오셨습니다.”
“뭐라! 오늘도?”
“하하, 주군께 솔직하게 말씀드리기가 아무래도 부끄러우셨다 합니다.”
윤은 멈춰서더니 이환의 팔을 붙들었다. 스르릉, 하는 소리와 동시에 이환의 허리에 찬 검이 허공으로 떠올라 그의 목을 노렸다.
“아하하하하, 주, 주군. 왜… 이러십니까. 제가 곁에서 술을 덜 드시게 말려드렸어야 했는데….”
“은증왕이 춤을 추는 것을 보았느냐?”
“예? 아, 예. 헌데 저만 본 것은 아닙니다.”
이환은 허공에 뜬 검자루를 눈치껏 슬그머니 붙들어 다시 제 검집에 밀어 넣었다.
“은증왕께선 홍연을 만나고 돌아오시자마자 복습을 하신다면서 악기를 다룰 줄 아는 노비들에게 연주를 시키시고 정자에서 춤을 추셨거든요. 이 집안에서 아마 못 본 이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말을 가만 듣고 서 있던 윤이 중얼거렸다.
“나만 못 봤군.”
순식간에 침울해진 얼굴로 그가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주군, 침소는 그쪽이 아닙니다!”
“내 은증왕에게 볼일이 있다.”
“너무 많이 취하셨습니다. 괜히 깨우지 마시고, 내일 맑은 정신으로 뵙도록 하시지요.”
“취했으니 볼일이 있는 것이야. 넌 그만 들어가거라.”
“하오나….”
“가 봐.”
윤은 이환이 만류도 뿌리치고 비틀거리며 무흔의 처소로 들어갔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지, 방안은 어두컴컴했다.
어둠을 밝힐 불을 찾을 정신은 없고, 대충 침대 옆 바닥에 주저앉아서는 더듬더듬 무흔의 손등에 제 손을 댔다.
부푼 기대와는 달리, 정화가 일지 않았다.
“하아… 빼고 자라니까.”
잘 때는 회룬석 목걸이를 빼고 자야 몸이 가뿐할 거다 그리 일렀거늘. 윤은 손을 대충 휘저어 무흔의 목걸이를 풀어냈다.
다시 무흔의 손을 살포시 잡자, 이번에는 그토록 바라던 맑은 기운이 일렁대며 넘어왔다.
윤은 바닥에 앉아 머리를 침대에 기울여 기댄 채로 하염없이 얌전히 무흔의 손을 잡고 있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을 즈음, 지인의 부차적인 효과 덕에 드디어 술이 완전히 깼다.
윤은 희미하게 드러나는 무흔의 잠든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잡고 있던 손을 아주 조심스레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살살 그의 뺨을 만져보았다.
“으응.”
아기처럼 작고 가느다란 소리를 내며 무흔이 몸을 뒤척이자, 윤은 놀라서 얼른 손을 떼었다.
술을 깨기 위한 목적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무흔이 그저 보고 싶어서. 술기운을 빌어 일단 와 본 것이었다.
무흔이 깨지 않도록, 윤은 자신의 입술을 아주 살짝만 무흔의 볼에 대었다 뗐다. 보드랍고 말캉하게 눌리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한 번 더 살포시 입을 맞췄다.
더 붙어 있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고 이불을 다시 잘 덮어주려는데, 그러고 보니 이불이 상당히 큼직했다.
윤은 기척을 죽이고 슬그머니 침대에 올라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
아침이 밝았다. 옆으로 웅크려 누운 무흔은 잠에서 깨자마자 어쩐지 평소보다 몸이 개운하다 느꼈다.
또한 어제보다 등이 확실히 따뜻하고 포근했다.
이불은 위에 덮여 있는데 왜 등이 더? 그리 의문을 갖는 순간 엉덩이에 뭔가 뜨끈하고 딱딱한 게 닿는 것이 느껴졌다.
건원에서는 추위를 나기 위해 달군 돌을 천으로 감싸 이불에 넣는다는 풍습을 책에서 본 적이 있었다. 아직 그리 춥지는 않지만, 그래도 손님을 위한 배려인가 하는 생각이 잠결에 희미하게 스쳤다.
“침대에 누가 굵직한 돌덩이를 넣었길래 이리 따뜻해… 응?”
이어 묵직하고 뜨끈한 것이 허리에 둘려있음을 깨닫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제 몸통에 감긴 사내의 팔뚝과 손이었다. 깜짝 놀라 몸을 요란하게 휙 확 뒤집은 무흔은 기겁을 했다.
“주 국공!”
“…으음.”
“왜 여기서 자는데! 윽!”
돌아눕는 순간, 윤이 눈도 제대로 뜨지 않고 무흔을 덥석 끌어안아서는 뺨을 부벼댔다.
“이런 돌은 자를 보았나!”
무흔은 이불 속에 묻힌 돌덩이라고 생각했던 것의 정체를 비로소 깨닫고 경악에 찼다. 아침을 맞이하는 특유의 건강하고 빳빳한 그것이 제 복부에 짓눌릴 정도로 꽉 부딪쳤다.
“놔! 놓으라고 이 변태야!”
“변태라니?”
막 잠에서 깬 윤의 목은 꽉 잠겨 있었다. 그 색기 그득한 목소리가 어찌나 음심(淫心)을 동하게 하는지, 무흔은 가슴 한쪽이 간질간질한 것을 꾹 억눌렀다.
“거기가… 그거 치워!”
“건강한 사내라면 아침에 눈뜰 때 이리되는 것이 당연하지. 그대도 아까 이랬어.”
“뭐?”
“보기보다 제법 튼실하던데.”
“허, 헛, 허… 무슨 소리야? 주 국공은 자고 있었잖아.”
“자고 있었지. 잠결에 더듬었는데 만져졌어.”
“뭐라! 이런 파렴치한 자를 보았나!”
무흔은 윤의 품에 갇힌 채로 몸을 좌우로 흔들어댔지만, 실실 웃고 있는 상대는 저를 풀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매일 이리 같이 눈을 뜨는 게 어떻겠어. 효명성에 돌아가면 내 침소에서 함께… 윽!”
이를 악다물고 주먹을 꽉 쥔 무흔은 팔뚝을 밑으로 뻗어 있는 힘껏 휘둘렀다. 뜨끈한 돌덩이로 착각한 것에 새하얀 주먹이 정확히 들어가 박혔다.
“읏… 너무하잖아….”
윤은 무흔을 끌어안고 있던 팔을 대번에 풀고 가격당한 곳을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 무흔은 침대 밖으로 잽싸게 내려와서는 주섬주섬 겉옷을 챙겨입었다.
“어딜 감히, 남의 몸에 허락도 없이 손을 대?”
“아니… 우리는 그래도 되는 사이 아니야? 그보다 더한 것도 하였는데….”
엎드려 웅크린 윤은 신음을 삼키는 듯했지만, 고통을 참느라 얼굴을 한껏 찡그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무흔은 조금 미안해졌다.
“우리가 그… 뭐… 무슨 사이기에?”
“그대가 입맞춤을 허락해주고, 몸도 부대끼지 않았는가.”
“아침부터 이리 사람을 놀라게 하는 건 다른 문제잖아. 게다가, 그걸 허락했다 하여 동침까지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지.”
“아파….”
“많이 아파? 내가 너무 세게 쳤나 봐. 어떡하지. 의원을 불러와?”
무흔이 안절부절못하자, 그 모습을 힐끗 본 주윤은 더 인상을 찡그리며 한껏 아픈 척했다.
“그대가 낫게 해 줘.”
“내가 어떻게? 시간 지나면 저절로 가라앉는 통증 아닌가?”
“지인으로…”
무흔은 그제야 윤의 상태에 엄살이 듬뿍 섞였음을 눈치챘다.
윤이 제게 은근한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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