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화
이른 아침부터 저택이 들썩였다.
지난밤, 무희 홍연이 은증왕의 방에 들었다는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그녀를 맞는 무흔의 얼굴에 웃음이 그득했더라는 가짜 일화까지 덧붙여졌다.
비복들은 오가며 눈만 마주치면 그 이야기로 화제를 삼았다.
“아니, 그럼 간밤에 그 콧대 높은 홍연이를, 절대로 몸을 내주지 않는 그 홍연이를 은증왕께서 취하셨다는 겐가?”
“군부인 마님께서 자리를 마련하셨다니, 그럴 리가! 마님께선 효명성주님을 끔찍하게 아끼시는데?”
“은증왕께서는 내내 우울해하시지 않았는가? 다른 사정이 있는 거 아니야?”
“은밀한 시각에 단둘이 침소에서, 다른 사정이랄 게 뭐 있겠나. 은증왕께서는 어찌 자신을 위해 고생하시는 국공 어른을 두고 여인과 밤을 보내실 수 있지?”
그리들 쑥덕대는 것이 이환의 귀에 쏙쏙 들어갔다. 간밤에 무흔이 홍연을 눈여겨보는 것을 그 또한 눈치채고 있기는 했다. 일단은 고개를 갸웃하며 황궁으로 출발했다.
*
꼬박 하루 하고도 다섯 시진 만에 황제는 윤을 안으로 들였다. 둘이 무흔을 두고 밀담을 나눈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무도 그 내용은 알지 못했다.
병사들의 부축을 받아 윤이 밖으로 나오자, 이환이 얼른 그를 맞았다.
마차가 목적지에 당도할 즈음, 이환은 나올 때 들었던 소문을 조심스레 윤에게 전했다.
“아뢰옵기 좀… 어렵습니다만… 은증왕께서 그새 여인에 눈을 뜨셨으니 주군께서 정신을 바짝 차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
윤으로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다. 그러나 이환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중경 최고의 무희로 이름난 홍연이 간밤에 은증왕의 처소에 들었다 하더군요. 부용군주께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시는 바람에 어느 정도로 잠자리가 소란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답니다.”
“자네가 봤나?”
“그런 것은 아니고, 새벽부터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허, 은증왕이 과연 그럴 인물이던가?”
“분명 연회 전까지 은증왕께선 내내 주군을 걱정하며 약을 먹은 병아리처럼 맥없이 문간에 나와 앉아 계셨거든요. 보다 못한 부용군주께서 환영 연회를 열어주셨습니다.”
“그가 날 걱정했어?”
윤의 반색에도 불구하고 이환은 고개를 절레 저었다.
“그게 중요합니까? 무희들 중 홍연의 미색과 자태는 군계일학이라, 은증왕께서는 홍연을 보시고 여기 와 처음으로 기운을 차리셨어요.”
“반하기라도 했다는 건가?”
“내막은 모르겠습니다.”
효명성에 있는 동안 무흔은 단 한 번도 여인에게 눈길을 준 적이 없었다.
게다가 서로 마음이 통한 것이 고작 이틀 전인데 난데없이 여인이라? 그럴 리가.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터였다.
마차가 당도하자, 집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얼른 윤을 안으로 모셨다.
“오라버니!”
“주 국공….”
설하의 손을 꼭 잡고 있던 무흔이 막 한 발 앞으로 나서려던 찰나였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선 무흔을 윤이 매섭게 노려보고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당황한 무흔은 그 곁의 이환을 바라봤다. 이환은 난처해하며 부용군주의 심복이 안내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한테 화가 났나? 왜?”
모두의 시선이 제게로 집중되었지만, 무흔은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어쩌면 황제에게 고문을 당하고 몸이 저리 상하는 와중에 그가 저를 택한 것을 후회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고 보니 주변 분위기가 이상했다. 내내 방에만 틀어박혀 있던 터라 몰랐는데, 오가는 이들이 썩 좋지 못한 느낌으로 저를 흘끗흘끗 살피는 눈치였다.
‘어제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백자를 처음 보았으니 그러려니 했지만… 조금도 유난 떨지 않던 자들이 오늘은 왜 저리 못 볼 걸 본 듯한 표정이지?’
무흔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부용군주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얼른 오라며 무흔에게 반갑게 손짓을 했고, 그제야 무흔은 겨울바람처럼 차갑게 사라져 간 윤의 뒤를 따랐다.
결과는 문전박대.
윤의 처소 앞까지 따라갔건만, 무흔이 따라 들어가려는 순간 눈앞에서 문이 쾅 닫혔다.
무흔은 이유도 모르고 당하는 것에 화가 치밀었다. 문을 쾅쾅 두들기며 소리를 질렀다.
“왜 이러는데! 주 국공!”
답이 없었다. 힘이 빠지고 점점 생각이 산으로 갔다.
“맘이 바뀌어서 날 버리고 싶어졌으면 그렇다고 말이라도 하든가.”
문을 연달아 쿵쿵 두 번 두드리다 말고 무흔은 쪼그려 앉아 왼손으로 빨개진 오른 주먹을 감쌌다.
“으….”
빗맞은 통에 새끼손가락이 욱신거렸다. 손을 꼭 부여잡고 한숨을 푹 내쉬는데 그제야 문이 열리고 이환이 나왔다. 무흔은 벌떡 일어났다.
“주군께선 목욕을 하러 가셨습니다.”
“여기로 들어가지 않았어?”
“네, 여기로 들어가셔서 다른 쪽 문으로 하여 목욕을 하러 가셨습니다.”
아무래도 좀 미심쩍었다. 저를 따돌리려 하는 소리인가 싶어 무흔은 이환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주 국공은 왜 나한테 화가 난 건지 혹 알아? 오는 길에 뭐라 얘기한 거 없었어?”
“그것이….”
이환은 고민했다. 사실대로 말해줘서 지금 이리 속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은증왕을 구해줄 것인지, 아니면 주군의 속내 모를 뜻에 따를 것인지. 이환이 목소리를 줄여 속삭였다.
“간밤에 말입니다, 은증왕께서 처소에 무희를 들이셨다지요.”
“그걸 어떻게 알았어?”
“모두가 다 압니다.”
“윽….”
무흔은 부끄러움에 순간 어깨를 움츠렸다. 춤을 배웠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어버리다니. 헌데 그것과 지금 윤의 차가운 태도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데라니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순진무구 해맑은 눈동자가 이환 앞에 둥둥 떠 있었다.
“주군께서도 은증왕께서 무희와 정을 통한 것을 알게 되셨단 말입니다.”
“저… 정을 통하다니, 허, 누가 그래?”
“다들 그리 말하던데요.”
무흔은 아까 저를 서늘하게 노려보던 윤의 눈을 떠올렸다. 예전의 그 입맞춤 건도 그렇고, 윤에게 나불나불 입을 놀린 이환이 새삼 미워졌다.
“종사관, 내 그대를 다시 봐야겠어. 어찌 그리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올리는가!”
씩씩대며 버럭 화를 내질렀다.
“해명을 할 것이니 당장 주 국공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춤을 배운 것을 비밀로 해 달라고 부용군주에게 신신당부를 했었는데, 그로 인해 이런 식으로 일이 꼬여 버릴 줄은 몰랐다.
무흔은 이환을 졸졸 따라가면서도 윤에게 뭐라고 얘길 해야 할지 머리를 쥐어짰다.
저로 인해 치욕을 참아가며 황제 앞에서 석고대죄로 고생을 하였는데, 정작 당사자는 뒤에서 무희와 희희낙락 즐겼다니 화가 난 걸까?
땅이 꺼질 듯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저곳입니다.”
이환이 멀찍이 보이는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죄송합니다, 하며 그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무흔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 일단 마음을 가라앉혔다.
조용히 문을 열고 발을 들였다.
양쪽으로 난 창에서 뽀얀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그 자리에 놓인 둥글고 커다란 나무통에 윤이 들어앉아 있었다.
“주 국공, 많이 아파 보이던데, 좀 괜찮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굳은 티가 확연히 드러나는 윤의 옆모습만 슬쩍 보일 뿐이었다.
“나한테 왜 화가 났어?”
무흔은 시치미를 뚝 떼고 물으며 목욕통 가까이 다가갔다. 회룬석 목걸이를 풀어 품에다 소중히 넣어둔 후, 손가락을 들어 윤의 뒷덜미에 콕 찍었다.
무흔은 살살 정화의 기운을 흘려 넣었다. 윤이 움찔하는 것 같더니만 손을 뒤로 뻗어 무흔의 손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당황한 무흔은 지인의 흐름을 차단했다. 그제야 윤이 무서운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뭐야, 진짜 화난 것 같은데? 허, 종사관의 그 말을 믿었다는 거야?’
무흔은 저를 믿어주지 않는 윤이 야속했다. 어쩐지 부아가 치밀어 그의 손을 매섭게 뿌리쳤다.
“지인의 제어는 제법 연습을 했나 보군.”
“왜 화가 났는지 얘길 해줘야 알지.”
“지난밤에 여인을 방에 들였다던데.”
“응. 들였어.”
무흔의 대답은 윤의 예상과는 다를뿐더러, 분위기 또한 무척이나 심드렁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투였다.
윤은 오만상을 과하게 찌푸리며 벌떡 등을 세워 돌아앉았다. 거세게 밀어붙여 보기로 했다.
“어찌 그리 뻔뻔한가!”
“뭐가?”
“허, 무희한테 눈이 그리 돌아가?”
“춤을 참으로 잘 추기에 유심히 보았던 것뿐인데….”
“보았던 것뿐인데? 방에 들여서 새벽녘까지 함께였다지?”
“응. 팔다리와 골반의 움직임이 어찌 그리 유연한지, 그런 와중에도 힘이 넘쳐서 정말 놀랍더군.”
윤의 머릿속에는 무흔의 표현에 걸맞은 격정적인 정사가 펼쳐지고 있었다.
이환이 소문을 전해주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일말의 의심도 없었건만, 괜히 신경질이 났다.
“좋았나?”
“말이라고. 내 살면서 지난 밤처럼 짧은 시간 안에 몸으로 많은 것을 익힌 건 처음이었어.”
“몸으로… 익혀?”
“그럼, 몸으로 익히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어찌 만족할 수 있는데? 땀을 그득 흘리며 몸을 과하게 움직였더니 진이 다 빠져 죽겠네.”
윤은 분명 무흔이 숨겨진 내막을 털어놓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의 답은 오히려 이환이 놓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청산유수로 흘러나오는 무흔의 대답에 기가 찼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질투가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다. 깊이 생각을 거듭하던 윤은 무흔을 끝까지 몰아보기로 했다.
“들어와.”
“뭐?”
까딱거리는 윤의 손짓에 무흔은 놀라 되물었다.
“몸으로 익혔다면서. 보여줘.”
“…어?”
무흔은 당황했다. 눈앞의 목욕통은 효명성이나 운우정의 욕실과는 달리 많이 작았다. 이미 윤의 몸만으로도 꽉 찬 상태였다.
“두, 둘이 들어가긴 좁아.”
“더 잘된 것 아닌가? 들어와서 그 청연이한테 배운 걸 보여주라 이 말이야.”
“청연이가 아니고 홍연이야.”
“청이든 홍이든. 몸으로 익혔다는 그 대단한 기술을 보여줘 봐야 간밤에 그대가 여인과 정을 통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말에 우물쭈물하던 무흔이 입술을 달싹였다.
“나한테 그, 그럼 뒤를 내 줄 거야?”
“뭐? 아하하하하!”
윤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웃느라 몸을 떨었다.
무흔은 그제야 그가 저를 골리려고 일부러 화난 척했음을 깨달았다. 그것이 억울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안도의 마음이 들었다.
한참을 큭큭 웃던 윤이 웃음을 멈췄다. 어느새 짙고 깊은 눈빛으로 무흔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무흔은 그 얼굴에 넋을 놓았다.
촉촉하게 젖은 새카만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저를 감고 삼킬 듯이 아름다웠다. 어서 들어오라며 능글맞게 웃는 입매가 그리는 호선에선 눈을 떼기 힘들었다.
정신을 차리려 간신히 시선을 깔자, 이번엔 숨 막힐 듯한 목덜미와 넓은 어깨, 그리고 그 아래 단단하게 자리한 가슴팍이 무흔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하필 그의 온몸엔 땀을 연상케 하는 물방울이 그득 맺힌 터였다. 핏줄이 불거진 팔뚝은 다른 부위의 더 적나라한 형태를 떠올리게 했다.
무흔은 물속에 잠긴 윤의 허리 아래로 눈이 더 내려가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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