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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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흔은 기동성 좋은 자그마한 마차에 몸을 실었다.
창밖으로 모습이 보이면 안 된다는 이환의 당부에, 무흔은 금덩이가 그득한 나무함을 꼭 끌어안은 채 몸을 웅크리고 바깥 상황에 대한 궁금증을 참았다.
게다가 지금, 제 호기심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윤을 저 대신 궐에 두고 온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내가 궐에 남아 있으면 주 국공은 더 신경이 쓰이는 거겠지. 그래도 황제가 말한 아침까지는 버티다 나올 걸. 괜한 트집이 잡히면 어떡해.’
무흔이 도착한 곳은 어두컴컴한 골목이었다. 공씨 가문의 거대한 저택의 뒤쪽, 일하는 이들이 드나드는 쪽문 앞에 설하의 모친이 보낸 자가 나와 있었다.
“이쪽이오.”
무흔은 마차 안에 마련되어 있던 시커먼 두봉을 뒤집어쓰고 안으로 들었다.
“종사관, 마차의 뒤를 쫓는 자는 없었습니까?”
공씨 집안사람이 이환에게 소리를 낮추어 물었고, 이환 또한 슬쩍 무흔의 눈치를 보고는 속삭여 답했다.
“궐에서 나온 자 중에는 없었고, 다른 자들이 뒤를 밟았습니다. 그쪽은 군부인 마님께서 보내주신 사병들이 처리하였습니다.”
“예부상서 쪽 사람인 모양이군. 이쪽으로 드시지요.”
무흔은 윤이 혹 저로 인해 잘못되는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하는 중이었다. 거적을 깔고 석고대죄를 한다는 얘길 이환에게 듣긴 하였으나, 과연 그것으로 괜찮을지 아무래도 불안했다.
따뜻한 방으로 안내된 무흔은 침대에 걸터앉아 윤이 준 은장도를 허리에서 풀어 꽉 쥐었다.
열쇠가 숨겨져 있는 그 칼집을 빼었다 꽂았다 또 빼었다 꽂았다 하며 한숨을 푹 쉬는데, 문이 열리고 위엄이 넘치는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헉! 자결은 아니 되오!”
다급한 그녀의 목소리에 무흔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제야 자신이 은장도의 검집을 결연하리만치 꽉 쥐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아닙니다. 주 국공이 준 물건이라 그저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어머, 정표(情表)인 것도 모르고 내 그만 요란을 떨었네. 오호호.”
설하의 얼굴을 그대로 가져다 복제를 하여 붙여넣은 것 같은 귀하디 귀한 상(相)의 40대 여인이 무흔에게 의자를 권했다.
“나는 이 집의 안주인이자 공설하의 어미입니다. 은증왕을 이리 모시게 되어 무척이나 영광입니다.”
“오갈 곳 없는 이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은증왕 무흔이라 합니다.”
그녀는 태황태후의 친정인 공씨 집안의 맏며느리로, 장군이던 남편과 전쟁으로 사별한 후 개국공신 공씨 가문을 호령하는 여장부였다.
정1품 군부인이자 황제의 사촌인 부용군주. 그녀가 바로 설하의 모친이었다.
소개를 하고 인사를 나누는 것뿐인데 호랑이 같은 그녀의 인상 앞에 어찌나 긴장이 되는지, 무흔은 팔다리가 다 뻣뻣해지는 기분이었다.
“설하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내일 아침에 은증왕을 뵈면 설하가 놀라고 기뻐하겠어요.”
“효명성에 있는 동안 제가 설하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무슨 말씀을. 이능력을 제어하지 못할 때에 은증왕께서 기지를 발휘하여 도움을 주셨다지요. 생명의 은인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녀가 무흔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는 통에, 무흔은 당황하여 맞절을 했다.
“설하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제 방으로 뛰어들어서는 자수정 귀걸이를 꺼내어 들고 은증왕의 눈동자를 이야기하더군요.”
“아….”
“참으로 아름다우십니다. 성정도 맑고 밝다 들었어요. 과연, 우리 조카님의 넋을 쏙 뺄 만하네요.”
어제만 하더라도 이런 얘길 들었다면 아니라고 펄쩍 뛰었을 텐데. 무흔은 도저히 거짓을 말할 수가 없어 우물쭈물 고개를 숙여 버렸다.
그 모습에 설하의 어머니는 아까처럼 호호호 웃음을 터뜨렸다.
“윤의 사람은 곧 우리 가족이니, 부디 여기서 편히 지내줘요.”
그녀가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가자마자 무흔은 방금의 말을 곱씹었다.
“윤의 사람?”
그 뜻을 곱씹자마자 아까의 입맞춤이 떠올랐다. 괜히 부끄러워져서 무흔은 방에 혼자 있으면서도 손을 들어 두 뺨을 감싸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가 내 사람이어야지. 아악!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난데없이 발을 콩콩 구르고, 무흔은 침대 위에 몸을 날려 엎드렸다.
시간을 되짚어보니, 연회장에서 윤이 황제에게 올렸던 청 또한 그러한 의미였다.
“그가 포상으로 나를 달라고 하였어.”
물건처럼 넘겨지는 모양새이긴 했으나 굳이 형식을 따질 필요는 없었다.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에 이리 안심이 될 줄이야.
그 안심과는 별개로, 무흔은 밤새도록 잠을 설쳤다. 이환이 말하기를 석고대죄 정도로 무리가 갈 몸은 아니니 걱정 말라 하였지만 혹시라도 황제가 노하여 윤에게 과하게 벌을 내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다음 날 아침, 무흔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설하가 신이 나서 찾아왔다.
“우리 같이 시장에 가요!”
“오는 길에 보았던?”
“네. 중경의 시장은 재밌는 것도 넘쳐나고, 맛있는 것도 진짜 많이 팔아요. 네?”
“미안하다. 다음에 가자꾸나. 오늘은 피로가 아직 풀리질 않아서 말이야.”
마침 윤의 소식을 전하러 들렀던 이환이 눈치 빠르게 설하의 곁으로 다가섰다.
“아가씨, 어제 은증왕께서 황궁에 머무시는 동안 무척 피곤하셨다 합니다. 며칠 쉬고 기력을 회복하시면 그런 후에 동행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아파요?”
설하가 다가와 무흔의 손을 따스하게 잡았다. 무흔은 움찔하진 않았지만, 저도 모르게 다른 손으로 회룬석 목걸이를 매만졌다.
“많이 아프진 않아. 걷기엔 몸이 좀 힘들구나.”
“하온이 같이 왔잖아요. 약을 지어달라고 하세요.”
“그래, 그러면 금방 낫겠다.”
설하가 나가자마자 이환이 난처한 표정으로 무흔과 마주 앉았다.
“하온은 며칠 후에나 돌아옵니다. 중경 일대의 약재상을 쭉 돌고 희귀 의서를 구하러 다닌다고 했거든요.”
“정말로 아픈 건 아니니까 괜찮아. 주 국공은 어찌 되었대?”
“주군께서는 지난밤 모습 그대로, 여전히 황제의 침전 앞에서 석고대죄 중이시랍니다.”
“아직도? 황제는?”
“화가 나셔서 일부러 안 나오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황제가 대전에 나가 오늘 정무를 봐야 하잖아. 그 길에 주 국공을 자연스레 보지 않겠어?”
“대신들을 싹 다 침전으로 불러들이셔서 일을 보시는 모양입니다.”
무흔은 가뜩이나 우울하던 기분이 바닥으로 더 가라앉았다.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바. 오며 가며 대신들이 그리하고 있는 윤을 볼 것이 너무나도 싫었다.
혹시라도 소식이 올까 싶어 무흔은 대문에서 가장 가까운 정원의 의자에 책 한 권을 끼고 앉아 사람이 들 때마다 강아지처럼 고개를 들었다.
매 끼니 산해진미가 그 앞에 대령되었으나, 윤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 무흔은 식사를 먹는 둥 마는 둥 하였다. 억지로 한술 뜬 것은 얹혀서 고생까지 했다.
설하의 모친이 의원을 불러주어 침을 맞았다. 약재와 의서를 사러 나갔다는 하온이 지금 곁에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해졌다.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이가 없으니 가뜩이나 무거운 마음이 더욱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런 무흔을 보다 못한 부용군주는 무흔을 환영하는 저녁 식사를 화려하게 준비하고 중경 최고의 악단과 무희들을 불러 공연을 보여주었다.
그 춤이 무흔의 눈을 사로잡았다. 희로국의 모든 춤을 섭렵한 그에게 난생 처음 보는 건원국의 춤은 완전히 새로운 충격이었다.
섬세함과 기교를 요하는 희로국의 춤과는 달리, 건원국의 춤은 동작이 유려하면서도 과감하고 힘이 넘쳤다.
윤에 대한 염려로 인해 죽은 듯이 얼어붙었던 마음에 번개가 내리친 듯,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눈에 비치는 저 춤과 자신, 그것만이 무흔에게 난데없이 뚝 떨어진 세상이 되어 버렸다.
특히나, 그 무희들 중 하나에게 무흔의 시선이 제대로 꽂힌 것을 모두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저 아이가 마음에 드십니까?”
부용군주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윤이 연회장에서 그리 일을 치고 지금도 석고대죄 중인 것이 무흔으로 인한 것임을 모르는 이가 아무도 없는 터였다.
“다들 훌륭합니다만, 유독 저 무희의 춤선이 남다르군요.”
“은증왕께서 옳게 보셨습니다. 저 아이는 중경 최고의 무희인 홍연이라고 합니다.”
“힘이 넘치면서도 유연함을 잃지 않는 아름다운 춤사위입니다. 새로워요. 희로국과는 전혀 다른 춤이라 꼭 배워보고 싶군요.”
“예?”
홀린 듯이 춤에 집중하던 무흔의 입에서 본심이 튀어나와 버렸다. 부용군주가 놀라 되묻자, 무흔은 그제야 자신이 한 말을 깨닫고는 얼른 두 손을 내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부용군주는 호호 웃으며 무흔에게로 몸을 숙여 속삭여 물었다.
“춤 추기를 좋아하시는군요?”
“그러합니다.”
무흔은 차마 아니라 할 수 없었다. 춤을 본 이후로 내내 눈을 반짝거리며 집중하는 걸 모두가 봤을 테니.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일단 대답했다.
“몸을 쓰는 것은 좋은 취미이니 부끄러워 마십시오. 황제는 지금 화풀이나 하시는 거랍니다. 내가 폐하를 평생 곁에서 봐 왔는걸? 윤이는 너무 걱정 마시고, 은증왕께서는 기운을 내셔요.”
부용군주는 눈을 찡긋해 보였다.
연회가 다 끝날 때까지 무흔은 꾹 참고 자리를 지켰다. 저를 위해 열린 연회임을 아는 마당에, 마음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먼저 자리를 뜰 수는 없었으니.
부용군주는 연회가 파하자마자 어깨가 축 처진 채 정원으로 천근만근 되는 걸음을 딛는 무흔을 빤히 바라보았다.
황제를 깊이 안다면, 윤의 상황 정도는 조금도 염려할 바가 되지 못했다. 그녀는 은증왕의 기운을 끌어올리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은증왕, 계십니까.”
부용군주는 무희 홍연을 데리고 무흔의 처소 앞에 섰다. 군주의 시녀가 문을 똑똑 두드리며 묻자, 무흔이 얼른 방에서 나왔다.
“찾으셨습니까.”
“내 은증왕을 위해 아까의 그 무희를 데려왔어요.”
“아….”
“안으로 같이 드십시다.”
“아니요,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춤을 배우고 싶다면서요. 그것도 꼭, 배우고 싶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기는 하나, 제가 지금 춤을 추며 시간을 즐거이 보낼 때가 아닙니다.”
“은증왕께서 이리 기운 없이 계신 것을 효명성주가 추후에 알았다가는 이 이모에게 크게 화를 낼 텐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하오나… 아니 됩니다. 마음만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흠, 언제까지 이리 밖에 세워 둘 요량입니까? 홍연을 안으로 들게 해 주시지요.”
무흔이 한사코 거절하자, 부용군주는 대뜸 무흔의 처소로 한 발을 크게 내디뎠다. 그 기세에 밀린 무흔이 움찔하여 뒤로 물러서는 순간, 그녀는 홍연을 무흔의 처소로 들였다.
다음 날 아침, 소문이 이상하게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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