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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77화 (77/85)

#077화

윤의 엄지가 무흔의 아랫입술과 윗입술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무흔은 그 간지러운 찌릿함을 못 배기고 눈을 감았다. 분명 상대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았는데, 기대하는 일이 이어지지 않고 있었다.

무흔은 슬그머니 눈을 떠서 윤을 확인했다.

그가 웃음을 그득 머금은 채 저를 닳도록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날 놀리는 건가?”

“지금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눈에 담아두지 않으면 휘발되어 버릴 것 같아 잠시 감상하였어.”

“놀리는 거잖아!”

무흔은 버럭 성질을 내며 뒤로 물러서려 하였지만, 윤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둘의 몸이 더 바짝 들러붙어 버렸다.

“섣불리 들이댔다 또 미움을 살 수는 없지. 그대가 금한 행위에 대해 허락을 우선 구하고자 하오.”

“입술로 행하는 지인을 금한다 하였지, 내 언제 그… 그걸… 하지 말라 했는가.”

“허면 지금 우리가 하려는 것은, 순수한 의미의 입맞춤이라?”

입맞춤이란 소리에 무흔의 뺨이 화르륵 붉게 달아올랐다. 눈동자에 지진이라도 인 듯 당황하여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 순간 버럭 화를 내며 윤의 멱살을 잡았다.

“방금 고초를 겪은 사람을, 계속 놀려먹어?!”

“어찌 화를 내는 모습이 이렇게까지 귀여울 수 있나?”

“보자 보자 하니!”

양 뺨이 다 터질 듯이 미소를 짓던 윤이 무흔의 등과 허리를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허락을 받았으니, 내 전부를 드리지.”

윤이 고개를 틀어 무흔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살포시 포개었다.

“흡….”

당황한 무흔은 윤의 멱살을 꽉 붙든 채 굳어 버렸다. 윤의 입술이 거칠게 밀려들 줄로만 알고 몸에 있는 대로 힘을 주었는데, 간지러울 정도로 부드럽게 입술이 맞닿았다.

그러다 말캉하게 눌리는 것 같더니만, 이내 질척한 집요함이 넋을 흔들어놓기 시작했다.

윤의 멱살을 쥔 무흔의 손이 녹아내리듯 풀어졌다.

그 손이 갈 방향을 찾지 못하고 대충 윤의 가슴 위에 얹히자, 윤은 입술을 떼지도 않은 채 무흔의 한 손을 붙들어 냉큼 자신의 뒷목을 끌어안게 만들어 버렸다.

그 와중에, 무흔의 문제는 입술만이 아니었다.

윤의 손이 끌어안은 무흔의 허리와 등은 맨살이었으니, 그의 손바닥이 어루만지고 지나간 모든 자리가 다 끓어오르는 듯했다.

한 손은 윤의 가슴팍을, 다른 한 손은 윤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있던 무흔의 손가락이 쉴 새 없이 움찔대고 바르작거렸다.

무흔은 윤의 팔에 갇힌 채로 온몸이 밀착되어 있었다. 허리 아래 또한 그런 상황이었으니, 서로의 반응을 동시에 똑같이 느낄 수 있었다.

무흔은 윤에게 몸을 폭 맡기고 눈을 감은 채 입술 안쪽에서 빚어지는 감각에 심취한 중이었다.

헌데 아래에서 변화가 일었다. 인간의 살이란 본디 물컹한 법이라 할 것이나, 흥분할 때면 얘기가 달라지는 부위가 한 군데 있었다. 서로의 것이 맞닿아 꾹 눌리는 순간, 무흔은 눈을 번쩍 떴다.

‘어떡해!’

다시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저번에는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을 때 당황하여 윤을 밀어냈지만, 이번엔 달랐다. 제 안에서 은밀한 욕정이 눈을 떴다.

‘비벼대고 싶다.’

허리 아래 맞닿은 곳이 재차 부딪치자 무흔은 묘한 쾌감을 느끼면서도 선을 넘지 말라는 머릿속의 냉철한 목소리에 흔들렸다.

‘내가 진짜 이들과 동화되어 가는 건가. 이래서는 안 돼!’

무흔은 이 아쉬움을 칼같이 잘라내기로 했다.

냉큼 윤의 가슴을 밀어내 보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윤의 팔이 더 몸에 단단하게 감겨들고, 심지어 허리를 안고 있던 쪽의 손바닥이 엉덩이를 더 바짝 끌어당기는 것이 아닌가!

완전히 당황한 무흔은 입술을 떼려 하였으나, 그럴수록 윤은 더 간절하게 입술을 탐하고 혀끝으로 기교를 부려대기 시작했다.

무흔은 윤을 떼어내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큰 결심을 했다. 좋은 생각인 것 같긴 한데, 어쩐지 미안하여 쉽사리 실행에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했다가 주 국공이 아파하면 어떡하지? 안 되겠다. 이대로라면 아래가 터지겠어!’

무흔은 제 입술에 딱 들러붙어 있는 윤의 아랫입술을 냅다 깨물었다.

“하아아아아….”

윤은 거친 숨결과 동시에 흥분감이 듬뿍 배어나는 신음을 내뱉고는 무흔의 등 뒤로 쏟아진 긴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이게 아닌데! 입술이 아프다고 화를 내면서 나를 밀어내야 하는데!’

무흔은 입술이 떨어진 찰나를 놓치지 않고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며 외쳤다.

“이제 하아… 하아… 이건 그만하자.”

“아… 혹 참은 것인가?”

“응.”

“그럼 이리로….”

“어디?”

윤이 무흔을 데려간 곳은 아까 무흔이 황제의 창기와 원치 않는 술래잡기를 하던 방이었다. 사용하지 않아 깨끗한 침대 위에, 윤이 무흔을 가뿐하게 들어 내려놓았다.

“황제의 별실에서 이랬다간 죄를 청해도 안 받아 줄 가능성이 있긴 하겠지만 뭐….”

“이런 돌은 자를 보았나!”

무흔은 몸을 일으켜 부리나케 침대에서 내려가서는 아까처럼 침대 뒤쪽으로 피했다.

“참았다면서?”

“아니, 대체 뭘 참았다고 생각한 건데?”

윤의 얼굴에 순식간에 실망이 감돌았다.

“그럼, 싫었나?”

“아니, 뭐, 싫었다는 게 아니라….”

이미 한참 전부터 뺨에서 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무흔은 말끝을 얼버무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확 감싸 버렸다.

그 모습에 윤은 웃음을 터뜨리며 방을 나섰다. 잠시 후 돌아온 그의 손엔 무흔이 이곳에 올 때 입고 있던 옷과 윤의 겉옷, 그리고 무흔의 소중한 물건들이 들려 있었다.

“팔.”

무흔 앞에 성큼 다가온 윤이 무흔의 팔을 요구했다.

조금이라도 더 만지고 더 들러붙고 싶은 심정이라. 그런 연유로 굳이, 그가 무흔의 손을 붙들고는 상의의 소매를 팔에 끼워주었다.

“혼자 할 수 있는데.”

무흔이 투덜거렸지만 윤은 미소만 살짝 머금고는 끝까지 옷을 입히고 여미고 매듭까지 단단히 지어주었다.

“주 국공, 미안해.”

“뭐가?”

“사람들 많은데 황제 앞에서 무릎 꿇고 빌었잖아.”

“아….”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그렇게….”

무흔은 울컥 억울함이 치밀어 목이 메었다.

“신료들이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는 건 자주 있는 일이야. 심지어 황자들은 더한데 뭘.”

“하지만 아까 연회장에서 분위기가 너무 얼어붙었는데. 자주 있는 일이라면 다들 그렇게까지 놀랐겠어?”

윤은 무흔의 허리에 띠를 둘러주며 자연스레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게 답을 회피하며 노리개와 은장도를 달아주는 것에 집중하는 척했다.

“처음이었어?”

“뭐가?”

“뭘 모르는 척이야. 다른 신하들이야 그렇다 치고, 주 국공은 혹시 그렇게 무릎을 꿇는 게 처음이었냐고.”

처음이었다. 황제에게 무릎을 꿇을 정도로 잘못을 한 적도 없었고 또 무릎을 꿇을 정도로 간곡히 무언가를 청해본 적도 없었으니.

윤의 얼굴에 소년 같은 미소가 맑게 배어났다. 생각해보면 무흔을 알게 되면서부터 예전의 자신이라면 하지 않았을 일을 참 많이도 하게 되어 버렸다. 그게 싫지 않았다.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미안해.”

윤은 두 개의 묵직한 주머니를 무흔의 손에 꼭 쥐여주고는 손을 톡톡 두드리고 자신의 두 손으로 포근하게 감쌌다.

“이 기회에 황제께 숙이고 들어가는 모습을 확실히 보여줬어. 게다가 황제께서도 화를 버럭 내셨으니, 이제 날 견제하는 세력들도 전처럼 날을 세우고 득달같이 달려들진 않을 거야. 오히려 잘된 일이지.”

“물어뜯을 빌미를 준 건 아니고?”

“술자리에서 안줏거리 삼아 씹을 정도는 되겠지만, 물어뜯을 정도는 아니야. 염려 마.”

그때 바깥에서 정원을 가로지르는 발소리가 울렸다. 윤은 얼른 그리로 향했다. 운우정의 문을 지키는 병사였다.

“주 국공, 바깥에 부관이 도착하여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래, 곧 나가지.”

무흔은 제 손 위에 포개진 윤의 손가락을 꽉 붙들었다. 저를 이대로 두고 그가 가 버리는 것인가 하여 덜컥 겁이 났다.

“갈 거야?”

“그대도 같이.”

“여길 지금 나가? 가도 되는 게 맞아? 황제가 아까 그러고 나갔는데….”

“황제께서 허락하셨잖나. 가자.”

엄밀히 말하면 허락한 것은 아니었다. 내일 아침에 데려가, 였는데.

무흔은 그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윤의 태도가 확신에 차 있었기에 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잠시만.”

뺨에 봄날 장미꽃 같은 화색이 돌더니만, 무흔은 방 한쪽 구석의 탁자에 놓인 나무함을 얼른 챙겨 들고 돌아왔다.

“가자!”

윤이 팔을 길게 뻗어 무흔의 어깨를 제 쪽으로 끌어당겨서는 몸을 밀착시켜 걸었다.

“떨어지지 마.”

앞서 걷는 운우정 문지기 병사를 윤이 힐끗 바라보고서는 무흔에게 속삭였다. 무흔은 다시 불안해져서, 나무함을 더 꼭 끌어안은 채로 윤의 체온에 의지했다.

아니나 다를까, 운우정의 병사들이 둘을 가로막았다.

“나가실 수 없습니다.”

“출입을 금한다는 명이 따로 있었느냐.”

“아닙니다. 하지만 나가도 된다 하는 명이 없었으니, 지금 가서 여쭤보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폐하께서 주무시거나, 혹은 밤의 시간을 즐기실지도 모르는데 그리할 수는 없지. 어차피 은증왕은 황명에 따라 나의 소유다. 동 트는 즉시 성을 나가도 뭐라 할 자가 아무도 없으며, 황제께서는 이리로 다시 돌아오지 않으실 테니 그만 문을 여시게.”

“기다리십시오.”

문지기들의 태도가 완강했다.

윤은 무흔의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주며 앞으로 한 발을 디뎠다. 문지기들이 이번에는 창을 뻗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창 따위 저리 치우라는 듯이 윤은 우아하게 손을 옆으로 저었다. 순간 병사들이 쥔 창이 창의 촉에 휘둘려 양옆으로 벌어져 길을 냈다.

병사들은 저들의 팔을 움직이게 한 창과 윤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크게 당황했다.

“주… 주 국공, 이러, 헉… 이러시면 안 됩니다.”

눈에 뵈는 것이 없는 자처럼, 윤은 무흔을 데리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병사들 사이를 여유롭게 걸어 나갔다.

“이래도 되는 거야?”

“걱정 마.”

무흔은 아무래도 불안했다. 윤이 자신만만해 보이는 것은 그저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둘이 궐 밖으로 나갈 때까지, 그들을 가로막는 병사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그 이능력을 직접 체험하게 되어 버렸다.

“주군, 이쪽입니다.”

윤의 명에 따라 마차를 대기시킨 이환이 신속하게 나타났다. 그 뒤로, 효명성에서부터 호위로 동행하였던 정예부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설하의 집에 가 있어. 그곳은 태황태후마마의 친정이라 감히 아무도 발을 들이지 못할 것이니 안전할 것이야.”

“주 국공은 같이 안 가고?”

“나는 뒷정리를 하고 가야지. 그저 황제 폐하를 달래 드릴 뿐이니 걱정 마. 얼른, 마차에 올라.”

발이 떨어지지 않는 무흔을 마차에 억지로 태웠다. 무흔이 창으로 얼굴을 내밀자 윤은 얼른 그 앞으로 다가섰다.

“정말로 괜찮은 게 맞아?”

“나는 손 하나 까딱하면….”

윤은 창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고는 무흔의 귓가에 장난스레 속삭였다.

“황제를 죽일 수도 있잖아.”

태어나서 해 본 농담 중 가장 위험하고 무시무시한 말이었지만, 무흔을 안심시키기 위해 윤은 활짝 웃음까지 지어 보였다.

“아무 걱정 하지 마. 은증왕을 데리고 그만 가 봐라, 하는 소리를 확실히 듣고 오려는 것뿐이야.”

윤의 입술이 무흔의 이마에 닿았다. 그 따스함을 되돌려주고 싶어, 무흔은 창을 막 빠져나가려는 그를 붙잡아 뺨에 입을 맞췄다. 윤은 다시 무흔의 그 손목을 붙들고는 새하얀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끝나지 않을 듯한 입맞춤의 고리를 애써 끊어내고 윤은 다시 황궁으로 들어섰다.

그가 택한 방법은 석고대죄. 윤은 요란할 정도로 음란한 소리가 나는 황제의 침전 앞에 거적을 깔고 무릎을 꿇어앉아 황명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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