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화
황제의 뒤에 얌전히 서 있던 장 내관은 조심스레 되물었다.
“내밀한 곳에 주 국공을 들여도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안 될 것은 무엇이냐?”
“하오나 이런… 일을, 주 국공에게 시키실 수는 없사옵니다. 두고두고 뒷말이 나올 것입니다.”
“데려와!”
“…예, 폐하.”
연회장으로 급히 달리는 장 내관의 속이 이만저만 타는 것이 아니었다.
창기들에게 시키는 짓을 어찌! 그걸 효명성주가 받아들일 리도 없거니와 그에게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고역일 게 뻔히 그려졌다.
연회장 쪽으로 몇 걸음 채 가지도 않았는데, 장 내관은 맞은 편에서 무시무시한 기세로 다가오는 윤을 발견했다. 그가 초조한 모습으로 부관에게 지시를 내리는 중이었다.
“주 국공, 운우정으로 가시는지요. 마침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혹 자신의 바람이 닿은 것인가 하여, 윤의 눈에는 일순간 희망이 차올랐다.
그것을 본 장 내관의 표정이 난처하게 굳었다.
“뭐라 하며 나를 찾으시던가?”
자초지종을 들은 그의 표정이 말도 못 하게 험악해졌다. 그 즉시 윤은 이환에게 구체적으로 몇 가지를 더 지시하고는 장 내관을 따랐다.
운우정의 출입문을 지나 다급히 정원을 가로지르는데, 장 내관이 윤을 말렸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지요. 그 사이 폐하께서 마음이 바뀌셨을 수도 있으니 제가 가서 한 번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그때였다.
“꺄악!”
무흔의 비명이 운우정에 울렸다. 윤은 당장 쳐들어가고 싶은 것을 이를 악물어 꾹 참고, 장 내관의 등을 떠밀었다.
“빨리, 내가 왔다 고하시게.”
장 내관이 다급히 걸음을 옮기려는 차에 궁녀 하나가 빈 술병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윤과 장 내관을 발견한 그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에 무슨 일인가?”
“은증왕께서 옷을 벗지 않겠다 도망 다니시며 고집을 부리시는 데다 폐하께서는 만취하시고… 결국 화가 나셔서 옷을 찢으라 명하셨습니다.”
윤은 전각의 문 앞으로 다급히 뛰어올랐다.
“폐하, 국공 주윤 들었사옵니다.”
무흔은 장 내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버티고 버티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으니.
찢긴 상의가 하나는 바닥에, 다른 하나는 제 몸에 꼴사납게 걸쳐 있었다. 이런 상태로 윤을 보게 된 것이 지독하게 싫은데, 그런 와중에도 문이 열리고 그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주윤, 네 이놈. 포로를 어찌 관리하였기에 저리 기가 드센 것이냐?”
혀가 꼬부라진 황제의 목소리가 방을 채웠다.
장 내관의 눈짓을 받은 궁인들과 채양이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구경꾼들을 이리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송구하옵니다.”
“네 손으로 저놈을 마저 벗겨라.”
“폐하!”
“오늘 밤이 지나면 네 소유가 될 터인데, 미리 손 좀 대 봐. 아니지, 혹 효명성에서 이미 배를 맞춘 사이더냐?”
“그렇지 않사옵니다.”
윤은 고개를 돌려 무흔을 바라보았다. 하의는 걸친 채였고, 새하얀 상반신에는 자신이 걸어주었던 회룬석 목걸이만이 빛나고 있었다.
연회장에서 그렇게 헤어진 후로 아직 반 시진도 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무흔의 눈 밑이 퀭하게 꺼져 있었다.
지쳐서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듯, 무흔이 멍하니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당장, 무흔이 의지할 곳은 저뿐이었다.
“왜, 내 명이 네 성에 차질 않느냐? 그럼 이렇게 하자. 네 손으로 저 백자의 몸을 흥분시켜 봐라.”
윤은 제 귀를 의심했다.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설마, 정말 그리하라는 것은 아닐 터였다.
“어서! 올라가. 은증왕을 마저 벗겨 네 품에 가둬. 내가 잘 볼 수 있게, 네 손으로 저걸 쥐어서 키워 봐라.”
“폐하, 취하셨습니다.”
“내가 지금 취해서 망발을 한다, 그 말인가?”
“아닙니다, 폐하.”
“주윤, 네 오늘 눈에 뵈는 게 없는 것이냐? 어디, 그 잘난 힘 한 번 더 써 보지 그래?”
황제는 술병이 놓였던 빈 은쟁반을 윤에게로 집어 던졌다. 쨍그랑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서 구른 쟁반은 윤에게 채 닿지도 못했다.
“황명이다. 당장 백자를 벗겨 내 앞에 보여라.”
“그리할 수 없습니다,”
“네놈이 이능력을 믿고 기고만장하다며 다른 이들이 그렇게 고해바칠 때도 나는 늘 네 편을 들었거늘, 지금 보니… 내가 눈에 뭐가 씌었었구나.”
윤은 이마가 땅에 닿도록 황제 앞에 엎드려 절을 하고 빌었다. 황제의 신망을 잃을 것을 알았으나, 그보다 중요한 것이 무흔이었다.
“제 충심은 폐하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십니다. 제발 황명을 거두어주시옵소서,”
그 모습을 무흔은 고스란히 눈에 담고 있었다.
제 어리석은 선택으로 인해, 무엇 하나 거칠 것 없는 이가 두 번이나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였다.
‘그리 값싼 무릎이 아닐 텐데. 태어나서 몇 번이나 무릎을 꿇어보았을까. 그에게 이토록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 또 있기는 할까.’
무흔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내려와 섰다. 황제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
저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윤을 위해서라면, 이 한 번의 수치 정도는 감내할 각오가 섰다.
“황제께서 궁금해하시는 것을 내 스스로, 내 손으로 세워 보여줄 것이니, 주 국공은 그만 보내 주시오.”
윤이 황제의 발치에 끌리는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다급하고 간절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닙니다, 폐하. 그럴 수는 없습니다.”
무흔과 윤을 번갈아 바라본 황제가 기가 차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어 바닥에 엎드린 윤의 어깨를 걷어찼다.
윤의 몸뚱이가 꿈쩍도 하지 않자, 그것이 황제의 심기를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네놈들 때문에 흥이 다 깨졌다.”
흥이 깬 것인지 술이 깬 것인지, 황제의 목소리가 무서울 정도로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죽여 버리기라도 할 듯한 기세로 윤을 한참 쏘아 내려다보던 황제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어젖히고 자신의 침전으로 돌아가 버렸다.
덩그러니 남겨진 윤과 무흔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동시에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고마….”
“고맙….”
같은 말이 동시에 나왔다. 둘은 다시 서로 눈을 맞추고 멋쩍게 웃었다.
서로가 서로를 어찌 생각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것 같아서, 그것이 이상하게도 낯설고 간지러웠다.
“옷을….”
“일어나….”
또 둘의 말이 입술 사이로 동시에 흘러나와 부딪쳤다.
일어나, 하는 무흔의 말에 윤은 그제야 일어났다.
옷을, 하는 윤의 말에 무흔은 그제야 자신이 맨살을 훤히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체는 완전히 헐벗은 채였으며, 아랫도리에는 입는 것이 의미 없는 얇디얇은 긴 바지 하나만을 걸친 상태였다.
“아악!”
무흔은 침대에 올라가 냅다 다리를 한쪽으로 모으고 주저앉아 버렸다. 어떻게든 몸을 보이지 않으려는 시도였는데, 생각해보니 윤과는 이미 피차 벗은 몸을 본 상태였다.
“옷을 가져다줄 테니 잠시만 기다려.”
“아니, 내가 어디 있는지 아니까.”
무흔이 침대에서 내려와 서자 이번엔 윤이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고 어정쩡하게 무흔에게 등을 보이고 섰다.
“입고 와.”
“갑자기 왜 이래? 사내들끼리 온천에서 다 벗고 논다고 본인 입으로 얘기해 놓고선.”
무흔의 말에 윤은 뜨끔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로 허세 부리는 무흔의 속도 떨리기는 매한가지였다.
무흔은 복도 바깥으로 고개를 빼고 좌우를 돌아보았다. 궁인들이 모조리 황제를 따라간 것을 확인하고는 제 옷이 있는 방으로 단숨에 뛰어 들어갔다.
옷도 옷이지만 노리개와 은장도로 위장한 열쇠가 잘 있는지, 사탕 주머니의 금으로 된 작은 친구들이 사라지지는 않았는지, 그것부터 확인했다.
“다행이다.”
윤은 무흔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의도한 것은 절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문 너머에서 훔쳐보게 되어 버렸다.
숨을 죽여 기척을 지웠다.
처음 보는 나신이 아닌데, 게다가 제 쪽에 등을 돌리고 있는데, 왜 이리 떨리는 것인지.
입으나 마나 한 바지를 벗는 그 몸짓이 대체 뭐라고 이렇게 흥분이 일고 눈을 뗄 수가 없는지.
허리 아래 둥글게 빚어진 엉덩이에서부터 발목뼈가 톡 튀어나온 지점에 이르기까지 곧고 길며 하얗게 뻗은 두 다리가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눈부셨다.
간신히 고개를 들자 이번에는 길고 하얗게 빛나는 머리카락 사이로 가느다란 허리가 눈에 들어왔다.
움켜쥐고 싶은 욕망을 동하게 하는 몸.
그런 생각을 하고 천천히 시선을 끌어올린 순간, 윤은 뒤를 돌아본 무흔과 눈이 마주쳤다.
완전한 나신이 된 무흔은 당황한 것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척, 바지를 가지러 윤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으로 냉큼 이동했다.
‘지금… 설마, 주 국공이 시선으로 나를 범한 것인가?’
그것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싫었을 텐데. 그가 욕망하는 상대가 어쩌면 자신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묘한 흥분감이 솟았다.
몸에 가벼운 전율이 휩싸고 도는 순간, 다리 사이가 뻐근하니 피가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제풀에 놀란 무흔은 얼른 하의부터 갖춰 입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은경을 보며 허리의 끈을 매듭짓는 와중에도 손목의 맥은 요란하게 날뛰고 있었다.
“은증왕.”
불쑥 뒤에서 그가 나타났다. 무흔은 거울 면에 비친 윤과 눈을 마주쳤다.
“나는 이만 황제께 가 보겠소.”
“왜?”
“방금의 일에 대해 죄를 청하여야지.”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그래야 그대가 나와 돌아가는 것에 뒤탈이 없어. 또한 술에 취한 자가 하는 말에는 숨겨왔던 본심이 묻어나는 법이라… 신뢰를 회복하지 않고 가 버린다면 훗날 그것이 흉사로 돌아올 수도 있고.”
윤이 손을 들어 무흔의 어깨를 꾹 감쌌다. 거울 너머로 비치는 무흔의 얼굴에는 불안과 두려움, 죄책감이 뒤엉켜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였다.
무흔은 돌아섰다. 제 어깨에 닿는 온기가 싫지 않았으나 지금 꼭 물어볼 말이 있었다. 거울을 등지고 윤을 향해 서서, 주저하다 말을 꺼냈다.
“나한테… 당신이 그리할 만한 가치가 있어?”
“그럼.”
“그대에게 유일무이한 치유자라서?”
윤에게서 한참 만에 답이 나왔다.
“…잊고 있었어.”
“뭘?”
무흔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제야 고개를 들어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윤의 오른손이 무흔의 뺨과 턱을 감쌌다. 길고 굵게 뻗은 손가락이 얼굴의 윤곽을 훑고, 엄지는 무흔의 입술을 살포시 눌렀다.
갑작스런 접촉에 놀란 무흔은 움찔하지도 못한 채 눈만 크게 뜨고 윤을 바라보았다. 몸은 얼었는데 심장만 혼자 전력으로 질주 중이었다.
“힘이 넘어오지 않아.”
“당연하지. 목걸이가 막고 있잖아.”
무슨 실없는 소리를 하느냐는 듯, 무흔이 회룬석 목걸이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런데도 난 여전히 그대를 만지고 싶어.”
윤은 무흔을 황제의 손에서 빼내야겠다는 생각을 한 이래로 줄곧 무흔이 치유자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지인? 폭주? 그런 것들이 더는 윤에게 중요한 문제가 되질 못했다. 그저 이 사람을 곁에 두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으니.
무흔의 뺨에 머물러 있던 윤의 손이 천천히 무흔의 목덜미를 감쌌다. 맑게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에서 붉은 입술로, 윤의 시선이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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