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화
가뜩이나 술에 취해 있던 황제가 격렬하게 치솟은 분노를 내뱉었다.
“감히 네 놈이….”
무릎을 꿇어앉아 있던 윤은 이마가 땅에 닿도록 엎드렸다.
“제가 벌을 받겠습니다. 폐하, 부디 굽어살피시어 은증….”
“시끄럽다! 이런 오만불손한 놈을 보았나.”
황제는 무흔을 가리켰다.
“저것을 운우정으로 데려다 놓거라. 내 지금 그리로 갈 것이니.”
병사들이 무흔의 양팔을 붙들었다. 그들을 저지하려 윤이 벌떡 일어나려던 찰나, 무흔은 윤의 어깨를 짚어 눌렀다. 윤이 준 겉옷의 깃을 여미고 몸을 굽혀 그에게 속삭였다.
“그만하면 됐어. 내가 오겠다 했으니 책임도 나에게 있는 것이지.”
기운이 쪽 빠진 목소리만 남기고, 무흔은 제 발로 연회장을 걸어 나갔다.
그때 예부상서의 눈짓을 받은 대신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에게 허리를 깊이 숙이고 입을 열었다.
“폐하, 국공 주윤은 감히 황제 폐하의 앞에서 이능력을 사용하였으니, 마땅히 그 벌을 받아야….”
“시끄럽다! 아주 그냥, 이때다 싶나?”
황제가 아직 술이 머리끝까지 취하지 않은 것을 윤은 천만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힘의 균형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황제에게 북부의 굳건함은 반드시 유지되어야만 했다.
“주윤, 내일 아침에 운우정로 와. 청한 것을 받아가거라.”
효명성주와의 힘겨루기에서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이 정도로 충분했다. 황제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서는 연회장을 떴다.
황제가 연회장을 뜨자마자 윤은 터뜨리지 못한 분노로 인해 주먹을 꽉 쥐었다. 그와 동시에, 반경 10보 내에 존재하는 모든 쇠붙이에 부르르 서늘한 떨림이 일었다.
*
무흔이 운우정에 돌아왔을 때, 차를 마시던 자리에는 얼굴을 모르는 사내가 앉아 있었다.
“이분이 바로 그 소문의 주인공, 은증왕이시군요.”
무흔은 살면서 이렇게까지 화려한 남자는 본 적이 없었다. 예부상서와는 결이 다른 종류의 화려함이었다. 사내인지 여인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눈화장 하며, 손끝의 움직임에까지 보통 사람과는 사뭇 다른 요염함이 흘러넘쳤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오늘 밤 은증왕을 모시게 될 채양이라고 합니다.”
“어딜 가기에?”
“예?”
“날 모신다 하지 않았는가?”
“아….”
채양이라는 사내는 무흔의 근처에 둘러선 궁녀들과 내관을 눈으로 한 번 주욱 훑었다. 그러는 동안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다시 뜨는데, 그것만으로도 야릇한 분위기가 풍겼다.
“은증왕께선 아무것도 모르시는 겁니까?”
채양의 질문에 궁녀 셋이 오호호 웃으며 자리를 떠 버렸다. 술과 음식을 가져오겠다며.
이어 내관 둘이 마주 보더니만, 향유를 가져다 두는 걸 깜빡했다며 급히 자리를 피했다.
그중 제일 연륜이 있는 궁녀가 나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드시기 전에 채양 공자께서 은증왕께 설명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지금 그대들이 해야 할 일을 내게 넘기는 겁니까?”
“저희는 지쳤습니다. 은증왕께서는 곱게 단장하시는 것에서부터 거부감이 심하신 터라… 저희는 이제 그다음 단계에까지 쓸 기운이 없습니다. 부탁해요, 채양 공자.”
궁녀는 냉큼 침실의 문을 열었다.
“은증왕께선 이쪽으로 드시지요. 걸치신 겉옷은 벗으십시오.”
“이건 주 국공의 옷이거늘, 너희들이 벗으라 마라 할 권리는 없다.”
“저희가 주 국공께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자… 잠깐!”
남은 궁녀 둘, 내관 둘. 그들이 동시에 달려들어 결국엔 무흔이 걸친 겉옷을 벗겨냈다.
문간에 기대어 선 채양은 그 길고 요란한 실랑이를 실실 웃으며 눈에 담았다.
“어찌 건원국에서는 포로를 이렇게 대하는가! 내 아무리 포로라고는 하나 엄연히 황족이거늘!”
아까에 이어 무흔은 분통을 터뜨렸다. 다시 가리는 것 따위 소용없는 얇은 천만이 그의 살 위에 덮인 채였다.
“황족이니 노비니, 혹은 저와 같은 창기니, 포로라는 이름하에 구분이 있겠습니까?”
채양의 목소리가 낭창하게 울렸다. 창기 소리에 흠칫 놀란 무흔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쪽으로 드시지요. 제가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당연히 궁금했다. 그런데도 불안하리만치 알고 싶지 않았다. 무흔은 양가감정에 붙들린 채 경계를 세우고 그를 가만 노려보고만 있었다.
채양이 침대 위에 한 겹 덮인 새카만 비단 이불보를 두 팔 벌려 크게 펼쳐 들고는 마구 흔들어댔다.
“의복이 너무 적나라하네. 귀하신 분께 걸맞지 않게 대체 누가 그런 걸 입힌 겁니까? 이걸 뒤집어쓰고 계시면 어때요?”
닳고 닳은, 약아빠진 채양의 미소가 거슬리기는 하였으나 무흔은 당장 몸을 가릴 수 있는 저 이불보가 너무도 필요했다. 대번에 그것을 낚아채어 몸을 가리고 방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채양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멀쩡한 침대를 두고 왜….”
“얘기나 해 보거라. 왜 네가 날 모신다고 한 것인데?”
“저희 황제께서는 행위를 지켜보시는 걸 좋아하십니다.”
“설마… 관음을 말하는 것인가?”
“과연, 영명하십니다. 은증왕께서 누군가에게, 오늘은 제가 되겠지요? 지금껏 본 적 없는 그 하얀 몸이 범해지는 걸 보시며 폐하께서 흥분하실 거란 말입니다.”
무흔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방금 들은 말이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통에 한기가 돌 정도라, 몸에 두른 천을 더 바짝 여몄다.
“그러다 동하시면 가끔은 침대로 뛰어드시기도 하시지만, 대체로 관전하시고 또 취향껏 말로 조종하는 것을 선호하십니다.”
“건원의 황제는 성군이며 백성들을 잘 돌본다 들었는데… 어찌….”
“그게 성군과 무슨 상관이랍니까? 아… 그러고 보니 관계가 있는 것 같네. 깔리는 이가 고통받는 모습을 싫어하시거든요. 백성의 기쁨을 원하는 성군이라… 통하는 면이 있지 않습니까?”
채양이 걱정해주는 척 눈을 크게 뜨며 무흔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무릎을 접어 쪼그려 앉아서는 속삭였다.
“하지만 아까… 저들이 겉옷을 벗길 때처럼 격렬히 저항하시면 관전자가 늘어납니다.”
“뭐라?”
“내관들이 동원되어 팔다리를 붙들라 하거든요. 헌데 은증왕께서는 팔딱팔딱 힘이 좋으시니 아마 내관으로는 어림도 없을 테고, 바깥의 거친 병사들이 들어오게 될 겁니다.”
상상만으로 흥분된다는 듯, 채양이 몸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 무흔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가끔 말입니다, 폐하께서 거나하게 취하셨을 때는 침대 위에 여럿을 올리십니다. 저는 보통 뒤를 담당하지요.”
“그것이 무슨… 뜻인가?”
“병사들 아래를 전부 벗게 하시고 줄을 세우신단 말입니다. 그럼 뒤엔 제가 있고, 은증왕께서는 엎드리신 채로 그것들을….”
채양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입에 넣고 쭈욱 빠는 시늉을 해 보였다. 경악에 물든 무흔의 표정을 보며 실컷 놀려먹고 있는 중이었다.
“줄을 선 놈들 걸 다 받아 드신 후에야 끝이 나게 될 겁니다. 앞뒤로 동시에 그리하는 것이야말로 저희 폐하께서 가장 좋아하시….”
“그만! 장난이 심하잖나! 지금 내게 겁을 주는 건가?”
“제가 놀리기라도 한다 생각하시는 겁니까?”
“허면… 저, 정말 그리하… 한다는 겐가?”
“저들에게 물어보십시오.”
무흔은 채양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나란히 줄을 맞추어 서 있는 궁녀들과 내관들이 난처한 표정으로 무흔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공자의 말이 사실입니다.”
“아무래도 은증왕께서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폐하께서 시키시면 저희가 옆에서 가르쳐드릴 터이니 너무 염려 마십시오.”
“지금 미리 연습을 해 보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내 그러게 혀를 쓰는 것 정도는 어제 진작 단련을 해 두었어야 한다 하지 않았습니까?”
이게 대체 다 무슨 소리인지.
무흔은 황망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에 두른 이불보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고,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어딜 가십니까?”
들리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었다. 무흔은 반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운우정의 출입문으로 다가갔다.
발을 들어 문턱을 막 넘으려는 순간, 문 앞을 지키는 병사들이 긴 창으로 무흔의 앞을 가로막았다.
“들어가십시오.”
“비켜라. 나가야겠다.”
“이러시면 저희가 억지로 안으로 모셔야 합니다. 돌아가십시오.”
“주 국공을 불러줘. 효명성주 말이다. 연회 중이니, 아직 궐 안에 있을 것이야. 그를 불러와. 내 할 말이 있….”
매달리듯 절절하게 청하던 무흔은 순간 말을 멈추었다. 문 너머로, 막 운우정에 도착한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뭐 이리 소란스러운가.”
“폐하, 포로가 주 국공을 만나겠다 청하고 있습니다.”
“둘이 참으로 애틋하구나. 귀엽기도 해라.”
황제는 무흔의 뺨을 톡톡 두들기고는 술이 올라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웃었다.
“들어가자꾸나. 내 말로만 듣던 백자의 몸을 다 구경해보겠어.”
무흔은 이번에도 병사들에게 양팔을 붙들린 채 침실로 질질 끌려 들어왔다. 저항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공포로 다리에 힘이 풀린 탓이었다.
침대 앞에 놓인 화려한 의자에 황제가 앉고, 그 옆에는 달콤한 술이 놓였다. 내관은 황제의 잔을 채웠고 궁녀는 황제의 신발을 벗겼다.
“채양, 시작해 보거라.”
“예, 폐하.”
무흔은 몸을 뒤덮고 있던 시커먼 이불보를 빼앗긴 상태였다. 침대에 내동댕이쳐진 채로 벌벌 떨던 그는, 채양이 다가오자마자 화들짝 놀라서는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나한테 손대지 마!”
출구가 굳게 닫힌 방 안에서, 무흔은 얇디 얇은 옷자락을 나풀거리며 침대를 사이에 두고 채양으로부터 도망 다니기 시작했다.
황제는 무흔의 그 필사적인 몸놀림이 마치 전희라도 되는 양 껄껄 웃고 구경하며 연신 술을 들이켰다.
“도와들 주거라. 채양이 저것이 은증왕을 살살 놀리느라 일부러 안 잡는 게야.”
내관 둘이 나와 무흔 앞에 양팔을 들고 서서 도망칠 길을 차단하였다.
“하하, 역시 폐하의 눈은 못 속입니다. 보십시오. 은증왕의 이마에 땀이 솟고 뺨이 붉게 상기된 것이 마치 막 씻어놓은 복숭아 같지 않습니까?”
“낯짝이 복숭아면, 엉덩짝은 무엇이라 할 셈이냐?”
“그것은 열어 봐야, 알겠지요?”
채양은 내관들 덕에 냉큼 무흔을 붙들어서는 바지의 뒤쪽을 끌어내렸다.
“하지 말라고!”
“아하하하하.”
방 안에 웃음이 그득해졌다. 무흔은 바지를 끌어올리자마자 채양의 뺨을 후려쳤다.
“내 몸에 손대지 말라 했거늘!”
“예예, 천년 황조의 대단하신 황자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이 비천한 놈이 어찌해야 할지….”
채양은 맞은 뺨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무흔의 등 뒤로 휙 돌아 무흔의 양 팔뚝을 움켜쥐어 당겼다. 무흔의 등이 휘고 가슴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싫다고!”
무흔은 있는 힘껏 뒷발길질을 했다. 채양의 정강이뼈에 무흔의 발차기가 정확히 먹혀들었다.
“윽!”
무흔은 풀려나자마자 잽싸게 침대 뒤로 숨었다.
황제가 그만하라 손을 들었다. 싫다는 자를 강제로 하게 하는 것은 영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좋아 죽는 꼴로 열락에 이르는 것을 보고 싶었다.
“저리 버둥거려서야 원.”
황제는 술기운에 또 홧김에,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자를 부르기로 했다. 어차피 그가 제 앞에서 이능력을 쓴 죄도 있고 하니.
“채양, 넌 오늘 내 시중을 들어라. 장 내관은 가서 주윤 그놈을 불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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