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4화
“보자 보자 하니, 네가 눈에 뵈는 게 없구나. 고작 백자 몸뚱이 하나에 눈이 돌아가서는.”
이것이 진짜 숙부구나. 윤은 깨달았다. 그동안 아슬아슬하게 붙들고 있던 신뢰와 세월로 쌓인 혈육의 정이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정치적 중립이라? 과연 언제까지 그리 포장하고 세상만사 모르는 척 네 인생이나 즐기고 살 셈이냐?”
“저는 태자의 편에 설 생각이 없습니다.”
“그럼, 5황자의 편에 설 생각이냐?”
“저는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만, 중경에 올 때마다 매번 이러시면 어딘가에 자리를 둘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빈정거리는 기색이 완연한 조카의 말투에 숙부의 눈썹이 꿈틀했다.
“뭐라?”
“태자께서 황위에 오르시는 날이 오게 된다면, 충성은 그때 세금으로 드리지요.”
“주윤!”
“더는 세력 놀음에 절 끌어들일 생각 마십시오.”
“은증왕이 망가져도 상관 없겠느냐?”
“예?”
“북부에서 태자를 지지해준다 하면, 은증왕을 돌려보내주마.”
윤은 그제야 깨달았다. 숙부가 황제에게 속삭여 은증왕을 중경으로 송환하라 한 이유는 결국 이것이었다.
“그따위 거래는 필요 없습니다. 숙부가 탐내는 내 힘으로, 내가 데려가면 그만이니.”
“어디, 지켜보자꾸나.”
윤은 주한모의 집을 나섰다.
다른 누가 무어라 해도 끝까지 숙부를 믿었었는데. 내 그럴 줄 알았다 할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마음이 화염에 데인 듯 쓰린 와중에, 신기하게도 머리는 더욱 차갑게 식었다.
숙부와의 관계가 틀어진 이상 고려해야 할 상황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제일 급한 것은 역시 무흔의 일이었다.
*
황궁의 연회가 시작되었다.
어제 무흔을 궁에 들여보낸 후, 윤은 백방으로 무흔의 소식을 알아보려 하였지만 큰 소득은 없었다.
무탈하게 매 끼니를 잘 챙겨 먹고 있다는 소식이 궁에서 온 전부였다.
간밤에 월영이 가지고 온 꾸깃꾸깃한 서신만이 무흔이 처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제 서신과 피리가 전달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윤은 연회가 끝나기 전, 황제와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어제 돈을 듬뿍 받아먹은 정 내관으로부터 귀띔받은 내용이 있기에 이를 이용하기로 했다. 미리 부친의 벗인 호부상서와 입을 맞춰두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고 황제의 술기운이 거나하게 올랐을 즈음이었다. 윤이 멀찍이 앉은 호부상서에게 눈짓을 건넸다.
“폐….”
그가 옷깃을 젖히고 막 운을 띄우며 일어나려던 차였다.
“폐하, 제 술 한 잔 받으시지요.”
주한모의 목소리가 호부상서를 밀어냈다.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아주 뻔뻔하게도, 취한 척 휘청이며 술병을 들고서는 색기 그득한 미소를 지으며 황제의 앞에 가 섰다.
“어허허, 내 오늘 상당히 취하는구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폐하의 주량을 아는데. 쭈욱 드시지요.”
“그래, 그러자꾸나.”
한모는 황제의 황금 술잔에 맑고 독한 술을 곱게 따랐다.
“안주가, 어디 보자… 슬슬 배가 부르실 때도 되었지요? 다른 요깃거리가 필요합니다.”
“어떤 게 있겠느냐?”
“눈 요깃거리 말입니다.”
“응? 무희들을 다시 나오라 할까?”
“폐하, 제가 얼마 전 고향에 다녀왔을 때 연회 자리에 은증왕을 불러내었었는데, 그자가 연회에 흥을 더하는 역할에 아주 그만이었습니다.”
한모는 슬쩍 윤에게로 눈짓을 하고서는 가증스러울 정도로 여유로운 미소를 보였다.
“글쎄다. 내 혼자 보려 아껴 놓고 아직 운우정엔 발길도 하지 아니하였거늘.”
“좋은 것일수록 모두에게 보이고 그 아름다움을 응당 자랑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랑질을 좋아하는 황제의 마음을 그가 단번에 콕 들쑤셨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그래. 마침 준비도 해 놨다 하니, 들라 하라.”
윤은 아무렇지 않은 척, 눈을 살짝 내리깐 채로 술잔을 입술에 대었다. 그런 식으로 표정을 가렸다.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이다. 호부상서가 난감한 눈빛으로 윤을 향해 고개를 짧게 가로저었다.
막 떨어진 저 황명에 대해 아니된다 외칠 만한 타당한 이유가 필요했다. 그리고 황제 앞에 끼어들 정확한 한 순간을 찾아낼 수 있어야만 했다.
“희로국의 은증왕 들었습니다!”
연회장의 문 쪽에서 우렁차게 호명되는 이름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헉 들이켜는 숨소리에 이어지는 적막, 거기까지는 효명성의 연회장에서와 다를 바가 없었다. 차이가 있는 쪽은 무흔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형체는 바들바들 떨며 질질 끌려 나오고 있었다.
무흔의 양팔을 각각 붙든 이들은 내금위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황제 앞에 무흔을 내려놓고, 격한 저항으로 지쳐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무흔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무흔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목욕을 마치고 입술을 붉게 칠하고 머리를 곱게 단장할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견딜 수 있다 그리 버텼다.
윤이 간밤에 보내준 서신을 떠올리며 희망을 품고 참고 또 참기는 하였으나, 잠시 후 갈아입으실 의복이라며 가지고 온 옷을 보고는 결국 폭발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안 입겠다 저항을 하였건만, 결국엔 밀렸다. 아주 얇게 비치는 하늘하늘한 천으로 된 한 겹의 옷. 무흔이 난리를 피우는 통에 그나마 두 겹을 겹쳐 입게 된 것이었다.
옷 아래로 살이 비쳐 보였다. 아무리 두 겹이라 하여도 몸의 선이 드러나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
‘다 벗고 질질 끌려나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병사들이 거칠게 붙들고 있던 양 팔뚝에는 새빨갛게 손자국이 났다. 그들이 놓고 난 후에야 통증이 후끈 밀려들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본 순간, 무흔은 이를 바득 갈았다. 황제 앞에 서서 야비한 웃음을 흘리고 있는 이는 예부상서 주한모였다.
“폐하, 제가 올린 옷이 저자에게 잘 어울릴 거라 말씀드렸었지요?”
“정말 그러하군. 헌데 자네 말에도 틀린 것이 있어.”
“예?”
“내게 분명 독특한 미색이라 하지 않았느냐. 은증왕은 그 이상이구나. 한 바퀴 돌아보거라.”
무흔은 명에 따르지 않았다.
제게 꽂히는 수백의 눈동자 중, 유일하게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 자리에 윤이 있었다.
무흔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애써 힘주어 다물고 얼핏 눈에 들어온 그 얼굴을 외면했다. 계속 보고 있다가는 꼴사납게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대신 주한모를 쏘아보고, 이어 희로국의 황제라는 작자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앙칼진 맛이 있는 자입니다. 오늘 밤이 아주 즐거우실 겁니다.”
주한모가 윤을 힐끗 바라보았다. 치기 어린 눈동자가 이글대는 꼴을 비웃고는 시선을 돌렸다.
무흔에게서 세 걸음 뒤로 물러선 병사들에게 눈짓을 하며 명했다.
“폐하께서 은증왕이 도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신다.”
병사들은 냉큼 다시 무흔의 팔을 붙들어 황제에게 무흔의 뒤태를 보였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오던 순간이었다.
더는 참지 못하고 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칠 것 없이 앞으로 나와 자신의 옷을 벗어 무흔에게 둘러주었다.
황제의 흥을 대놓고 깨는 행동 앞에, 일순간 좌중이 얼어붙었다.
윤의 돌발 행동에 놀란 형부상서가 얼른 두 손을 모으고 일어나 황제에게 허리를 숙였다.
“폐하, 벽제성 함락의 유일무이 일등공신인 주 국공에게 아주 큰 상을 내리실 거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이리 그가 앞에 나온 김에 상을 주심이 어떨지요? 다들 상이 무엇일지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형부상서는 인맥 부자였다. 여기저기서 그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유쾌하게 흘러나왔다. 황제는 껄껄 웃으며 총애하는 대신에게 화답했다.
“그래, 내 주 국공에게 상을 주어야지. 그런데 효명성주는 없는 게 없단 말이야. 재물과 땅은 이미 넘치도록 있고. 심지어 어제는 막내 공주를 짝지어주려 했는데 퇴짜를 맞았지 뭔가, 어허허허허.”
모두가 황제를 따라 똑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윤은 눈으로 무흔의 표정을 살폈다. 본래 살결이 희어서인지 공포로 창백하게 질린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것이 이럴 때는 너무도 답답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절망에 푹 젖어 저를 바라보는 그 사랑스러운 보랏빛 눈동자에 푹 빠져 버렸다.
“그래서 특별히 이번엔 우리 주 국공이 원하는 것을 주기로 하였어. 모두들 궁금하지?”
“예, 폐하.”
“주 국공이 탐낼 물건이 무엇이 있을까, 창고로 데려가 고르라 할까 하다, 번거로움을 피하고자 특등품의 목록을 적어오라 하였네.”
황제가 손짓을 하자 황실의 창고를 담당하는 내관이 앞으로 나왔다. 그가 긴 두루마리를 펼쳐 목록을 읽기 시작하려던 찰나였다.
윤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와 황제 앞에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였다.
“국공 주윤, 하해와 같으신 폐하의 마음에 깊이 감복하였습니다. 소원을 하나 말씀드리고자 하니, 선물로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 뭔가 찍어 놓은 게 있는 모양이야? 내 괜한 고민을 하였어. 얼른 말해보게.”
“은증왕 무흔, 그를 제게 주십시오.”
그 순간 감도는 침묵의 어색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앞에 앉은 황제는 표정이 굳었고 그 아래에 선 예부상서는 애매한 미소를 품고 있었다.
무흔은 등 뒤로, 신료들의 불안 섞인 그 찌르르한 긴장감을 온몸으로 느끼는 중이었다. 반대로 제 눈앞의 윤은 깊게 뿌리내린 나무와도 같이 곧게 서 있었다.
“주마. 얼마든지.”
황제의 입에서 너무 흔쾌히 나온 대답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다.
윤이 무어라 반응을 하기도 전에, 황제는 예부상서가 따라 두었던 황금잔의 술을 한입에 털어 넣고는 말을 덧붙였다.
“내일 아침에 운우정으로 와 네가 데려가거라.”
오늘 밤에는 본인이 은증왕을 취하겠다는 의미였다. 윤은 받아들이지 않고 맞섰다.
“폐하, 지금 이 자리에서 받기를 청하나이다.”
“아니, 내일 아침. 내 말을 알아듣겠는가?”
모두가 알아들었다. 무흔은 사색이 되었고 주한모는 그럴 줄 전혀 몰랐다는 듯 거짓으로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입꼬리를 올렸다.
윤은 무릎을 꿇었다.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 번 더 청할 결심을 했다. 동시에 황제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폐하, 부디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공을 치하하기 위해 선물을 주신다 하셨으니 벽제성 함락에 상응하는….”
“이런 건방진!”
분노한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금으로 된 술잔을 윤에게 집어던졌다.
그것을 그냥 맞았어야 했는데. 반사적으로, 윤은 저도 모르게 이능력을 발동시켜 제 얼굴 앞에 바짝 다가온 황금잔을 멈춰 세웠다.
황제의 면전에서 이능력을 멋대로 사용하는 것은 금기였다.
툭.
술잔이 한 발 늦게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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