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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73화 (73/85)

#073화

무흔은 눈에 눈물이 고일 정도로 괴성을 지르며 온 힘을 다해 요란하게 버둥댔다.

‘효명성에 남을걸. 내가 어리석었어. 주 국공한테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으면서 그냥 살 것을. 사내한테 발정 좀 했다고 세상 무너지는 거 아닌데.’

후회가 치솟았으나 그렇다 하여 넋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변태적인 짓거리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무흔은 이를 악물고 팔다리에 힘을 주어 격렬히 저항하였다.

“으아악! 싫다고! 놔! 이 더러운 놈들아!”

무흔의 발광은 효과가 있었다.

혹시라도 무흔의 흰 살결 위로 손목 발목을 꽉 붙들어 누른 붉은 흔적이 날까 두려움이 든 내관들이 결국 먼저 물러났다.

“아아아아악! 당장 나가!”

무흔은 씩씩대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홀딱 벗고 이리 분통을 터뜨리는 제 꼴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젠장, 으악! 망할! 미친 것들!”

부리나케 옷부터 챙겨 입고 두 개의 작은 주머니를 품에 넣고, 허리띠를 둘러 노리개와 은장도를 제대로 챙기고 나서야 무흔은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주 국공이 필요해. 당장!’

연락을 할 방도가 없었다. 혹 추후 방도가 생길 경우를 대비하여 무흔은 지필묵이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했다.

욕실에서 나오기 무섭게 다섯 궁녀가 그를 맞이했다.

“이리로 오셔서 쉬시지요.”

“내관들이 거칠게 나온 모양이에요. 아마 질투겠지요?”

“맞아요, 은증왕께서는 너무 아름다우시니까.”

“저희가 해 드렸으면 그리 싫지 않으셨을 텐데.”

“많이 놀라셨죠? 마음을 진정시키는 차를 한 잔 올릴까요?”

무흔은 제게 말을 쏟아놓는 궁녀들에게 일단 뜨거운 차는 되었다 사양을 했다. 머릿속엔 지필묵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주변을 샅샅이 눈으로 훑었으나 어찌 된 게 책 한 권, 책상 하나가 보이질 않았다.

묘안을 떠올린 무흔은 이들이 미끼를 덥석 물어주길 바라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꺼냈다.

“저 난초는 이름이 무엇이냐? 참으로 곱구나.”

“꽃이 하얀 뱀의 꼬리 같다 하여 백사미난이라 하옵니다.”

“내 난을 치고 싶구나. 그림을 그리려 하니 지필묵을 가져다 주겠느냐.”

“예, 그리하겠나이다.”

됐다! 무흔은 간단히 지필묵을 확보했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편지를 전해줄 사람이었다.

아까의 내관들은 전부 상종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 궁녀들은 예부상서의 사람인 것 같고. 윤한테서 재물을 받아먹은 장 내관이란 자는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그자에게 부탁하면 그래도 받아먹은 게 있으니 서신을 전해주려나? 아니, 그자가 펴보기라도 하면 낭패야.’

그나저나 궁녀들이고 내관들이고 열 명이나 되는 이들이 어찌나 끈덕지게 착 들러붙어 쫓아다니는지. 감시를 피해 서신을 쓸 짬이 한순간도 나질 않았다.

깊은 밤, 모두가 잠들기를 기다려 무흔은 몰래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책상은 따로 없는 곳이니만큼, 식사를 했던 탁자 아래에 숨어 불을 밝혔다.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최대한 빠르게 또 짧게 윤에게 글을 썼다.

서신을 접어 품에 잘 넣고 지필묵을 원래대로 해 놓은 후, 무흔은 촛대를 들고 후원으로 나왔다.

가슴이 답답하여 어차피 잠도 오질 않으니. 아까는 뜬금없다 생각했던 그 야외의 침대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봤다. 한숨만 나왔다.

“하아….”

별이 비처럼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별들이 여기저기에서 지워졌다 나타났다 하는 것이 아닌가. 어둠이 뚝뚝 하늘의 일부분을 지워냈다 드러냈다 하는 것만 같았다.

“이게 무슨 조화야?”

좌우로 왔다 갔다, 점점 그 자그마한 어둠이 가까이 내려오며 크기를 키우고 있었다.

슈웅. 펄럭. 펄럭.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동시에 무흔이 누운 침대 옆 나무의 가장 낮은 가지에 거대한 것이 날아와 앉았다.

“헉!”

무흔이 벌떡 일어나 앉아 도망가려고 한 순간, 그것은 푸드득 날아올라 침대 위에 안착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안광이 무시무시하였다.

“어… 혹시, 월영인가?”

무흔은 눈앞의 거대한 새가 윤의 매인 것을 그제야 알아보았다. 월영의 목에는 가죽으로 된 작은 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무시무시한 맹금류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 아무래도 섬뜩했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것만이 동아줄이었다.

무흔이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매듭을 끌러 꺼낸 것은 서신과 새끼손가락만 한 작은 나무 피리 목걸이였다.

“이것은 월영을 부를 때 쓰는 피리가 아닌가?”

얼른 서신을 펼친 후, 침대 아래에 조심히 내려둔 촛대를 들어 글을 읽어내렸다.

「황제가 그대를 취하려 하니, 늘 주변을 경계하시오.

경비가 삼엄하니 몸을 낮추고 기다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그대를 효명성으로 다시 데려갈 것이니, 감사의 인사는 그때 받으리다.

만약 도망칠 기회를 얻었다면 어떻게든 밖으로 나오시오. 그대와 안면이 있는 병사들을 골라 성문 앞에 배치해뒀으니, 그들이 당신을 도울 거야.

혹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대가 어디에 있든 동봉한 피리를 불면 월영을 따라 내가 그대를 찾아가겠소.

답신을 쓸 수 있는 상황이거든 월영에게 보내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이것을 잘 받아보았다는 표식을 보내줘.

이 서신은 다 읽은 후 반드시 불태워 버리시오.」

눈물이 왈칵 날 정도로 반가운 글씨였다.

무흔은 깨알같이 적힌 내용을 빠르게 한 번 눈으로 훑고, 다시 한 번 정독하였다.

“알고 있었구나….”

이러한 기분을 뭐라 해야 할지. 윤과 마음이 통한 것인가 싶어 가슴에서 두근두근 간질간질한 설렘이 퍼져나갔다.

낮에 가마를 타고 들어오는 동안 길을 제대로 봐 두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아니, 애초에 윤에게서 도망친답시고 이리로 오겠다 한 제 어리석은 선택에 재차 후회가 들었다.

서신을 고쳐 새로 쓸 생각으로 막 발을 떼려는데, 후원의 반대편 진입로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거기 누가 있소?”

놀란 무흔은 품에 넣어두었던 서신을 다급히 꺼내 월영의 목에 걸린 주머니에 마구 쑤셔 넣었다.

“누구냐!”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발소리를 들어보니 두 명인 듯했다.

가방에 확실하게 매듭을 지었다. 월영에 대한 두려움이 사그라들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윤 덕분에 마음이 따뜻해져서인지, 아까와는 달리 손이 떨리지 않았다.

“가!”

어둠속에서 커다란 눈이 무섭게 번뜩이더니만, 월영은 순식간에 날아올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무흔은 소리가 나는 쪽에 등을 진 채, 윤이 보낸 나무피리를 목에 걸고 보이지 않게 옷 속으로 잘 숨겼다. 그런 후에 냉큼 편지에 불을 붙였다.

“은증왕이십니까?”

횃불을 들고 등 뒤로 바짝 다가온 이는 욕실에 들어왔던 내관 하나, 그리고 무장한 병사였다.

“아하하, 잠이 오질 않아 산책을 나왔는데….”

“그 뒤에 감추신 것은 무엇입니까?”

아슬아슬하게, 까맣게 타들어 간 종이는 재가 되어 하늘로 날아올랐다.

“무슨 종이를 태우셨습니까?”

“아하하… 하하…. 내 아까 그린 난초가 너무 못났기에, 어쩐지 부끄러워서 한 장 정도 태워보았네, 하하.”

“화재가 날 수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하하, 미안하네.”

무흔은 대충 둘러대며 머리를 긁적이고서는 얼른 안으로 향했다.

바깥에 제 편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리 든든할 수가. 그 안도감에 그만 무흔은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

윤은 중경에 올 때면 매번 설하와 함께였기에 이모의 집에서 거하곤 했다. 또한 도착한 그 이튿날은 숙부의 집을 찾아 인사를 올리고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순서였다.

이번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윤은 정오에 맞추어 예부상서의 집에 도착했다.

“윤이 왔구나. 들어오거라.”

어쩐 일로? 숙부가 문 앞까지 나와 그를 맞이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여독이 채 풀리지도 않았을 텐데, 오늘 밤 바로 축하연이라니. 우리 윤이가 한창 힘이 넘칠 나이니 망정이지, 원. 황제께선 무엇이 그리 급하신지.”

“염록왕 전하를 모셔오지 못하게 된 것과 관련이 있을까요?”

“물론이지, 폐하의 속내는 모르겠다만. 사신단의 매가 소식을 가져오자마자 결정하셨다. 벽제성 함락 때의 네 공을 치하하지 못하고 지나간 것이 많이 걸리셨나 보다.”

축하연을 빌미로 윤을 불러들여 희로국에 심은 첩자로부터의 정보를 듣고, 또 은증왕도 데리고 오고자 하는 것이 황제의 뜻일 게 분명했다. 윤은 모르는 척 적당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윤아, 오늘 식사 자리에는 손님이 한 분 계시다.”

뻔뻔하게 웃으며, 주한모는 저보다 키가 큰 윤의 어깨를 감싸며 안으로 들어섰다.

“오, 드디어 오셨는가.”

벌떡 일어나 굽신굽신 윤을 맞은 이의 정체는 뻔했다. 태자는 비굴할 정도로 방긋방긋 웃으며 윤의 손을 꼭 붙들어 잡아 자리로 인도하여 앉혔다.

“숙질 간의 식사에 눈치 없이 끼어든 것은 아닌지 모르겠소, 허허허.”

“하하.”

“내 주 국공과 꼭 한 번 이리 같이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실례를 무릅쓰고 이리 예부상서에게 청을 넣었소.”

“아, 예.”

윤은 일단 웃는 낯으로 답을 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 두 사람의 속이야 뻔했다. 예전부터 이들은 중립의 효명성주를 어떻게든 태자의 사람으로 만들려 기를 써 왔으니.

식사를 하는 동안 태자는 윤을 포섭해 보려 쉴 새 없이 온갖 말을 늘어놓았다. 옆에서 숙부가 열심히 장단을 맞추는 꼴이 가상하여, 윤은 태자의 말을 네네 하며 들어주려 노력했다.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실 때까지도 태자의 자기 자랑은 끊이질 않았다.

숙부의 얼굴을 봐서 줄곧 참았던 윤은 슬슬 자리를 뜨기 위해 빈 잔에 차를 더는 받지 않고 있었다.

“아, 주 국공. 이번에 부황께서 은증왕을 불러들이셨잖소. 그 또한 나의 머리에서 나온… 묘책이오.”

순간 당황한 예부상서가 태자의 허벅지를 꽉 붙들어 말을 멈추게 하였으나, 태자는 영문도 모른 채 굳이 묘책임을 강조하며 말을 마무리했다.

“태자께서 저를 보고자 하신 이유를 제 어찌 모르겠습니까.”

윤은 더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숙부의 면을 보아 제가 긴 시간 머물러 드렸으나, 이제 그만 가 봐야겠습니다.”

“주 국공, 그러지 말고….”

“정치적 중립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지 아니하실 터이니, 앞으로는 저를 보고자 따로 시간을 할애하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예조차 갖추지 아니한 인사를 대뜸 뱉어 놓고, 윤은 자리를 떴다. 주한모가 다급히 그의 뒤를 쫓았다.

“윤아! 이리 가면 어찌하느냐.”

“숙부께선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은증왕을 황제께 그리 들이밀어 무슨 이득을 취하실 수 있다고.”

“오해 말거라. 내 생각이 아니었다.”

태자의 머리는 곧 숙부의 생각이요, 태자의 손발은 곧 숙부의 손끝에 걸려 있음을 모르는 자도 있습니까.

윤은 그리 막말을 내뱉으려다 참았다. 혈육으로서 예의, 그 한계에 이르렀다.

“들어가자. 네가 이대로 떠나면 내 마음이 너무 불편하지 않겠느냐.”

“불편하십시오.”

“뭐라?”

“제 마음이 불편한 만큼, 이제 숙부도 실컷 불편하시면 되겠습니다.”

살살 웃으면서 조카를 달래던 주한모의 얼굴이 일순간 싸늘하게 식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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