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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71화 (71/85)

#071화

윤이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고서는 고개를 돌리다, 황금을 담아놓은 나무함을 덥석 움켜쥐었다.

“이걸 이리 그냥 둘 수는 없지. 승냥이 같은 궁인들이 하나씩 몰래 빼 가면 은증왕 그대는 순식간에 빈털터리가 될 거야.”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마땅한 재료를 찾지 못한 윤은 결국 자신의 은장도를 꺼내 들었다. 그러더니만 칼집을 열어 날을 뚝 잘라냈다.

“뭘 하려고?”

“자물쇠를 달자.”

무흔은 점점 윤의 이능력이 부러워졌다.

그가 강철로 만든 단단한 잠금쇠를 나무함에 달아놓고, 함께 만든 열쇠는 은장도의 칼날이 달려있던 자리에 다시 붙여 버렸다.

“금속계 이능력자는 마물의 퇴치고 뭐고, 금속 공예 장인에 더 특화된 거 아니야? 전투보다 이런 짓 하는데 능력을 더 쓰겠어.”

“선조님 중에는 이런 데 유독 힘을 쓰신 분들도 계시지. 연회장에 매달린 등과 다실의 장식들을 생각해 봐. 자, 다 됐다. 지니고 다녀.”

윤이 무흔에게 겉으로 보기에는 은장도이나 뽑으면 열쇠가 나오는 물건을 건네주었다.

무흔은 그것을 노리개 옆에 예쁘게 잘 달아두었다.

“이제 그대의 재물은 안전해. 잘 자고. 내일 봅시다.”

진짜 마지막 인사를 한다며 들어와 놓고선, 너무도 일상이나 다를 바 없는 인사를 툭 던져놓고 윤이 마차에서 나가 버렸다.

“주 국공은 종잡을 수 없는 면이 있어.”

무흔은 품에서 연한 분홍빛의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는 효명성의 감옥에서까지 먹지 않고 아껴두었던 사탕 한 알이 들어 있었다.

황금의 작디 작은 친구들을 집게손가락과 엄지로 하나씩 조심스레 집어 고운 주머니 안에 챙겨 넣었다.

품에 묵직한 주머니가 두 개라니 어쩐지 든든했다. 무흔은 열쇠를 꺼내 번쩍거리는 황금이 그득한 나무함을 열어보고는 가만히 미소지었다.

“황궁에서 무사히 버티려면 사람을 꼭 포섭해야 하는 건가? 그래… 어머니께서도 냉궁에 나를 보러 내려오실 때마다 궁인들에게 늘 무언가를 주셨었지.”

출발 전, 도학 선생이 어깨를 두드리며 해 준 말이 떠올랐다. 머지 않아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 거창한 작별인사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재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포근해졌다.

무흔은 왼쪽 품에 넣어둔 연분홍빛 주머니를 꾹 눌렀다. 그리움을 듬뿍 머금은 미소가 번졌다.

*

효명성에서 출발한 긴 행렬이 중경에 도착했다.

창 너머로 고개를 뺀 무흔은 성문이 보이기 시작하자, 심장이 쿵쾅거렸다. 설렘 반 두려움 반.

그러다 문득, 그 두려움이 예전만큼 무시무시하게 저를 집어삼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효명성에서 따뜻한 사람들을 만난 것이 치유로 작용한 모양이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하는 염려가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창 너머의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는 게 두렵지 않은 것을 보면 나름의 성장을 한 게 분명했다. 어쩐지 뿌듯해졌다.

“중경의 시장은 달라요. 효명성 시장보다 훨씬 재밌어요!”

아침부터 마차를 옮겨 동행한 설하가 무흔과 나란히 창에 머리를 두고 바깥을 향해 초롱초롱한 눈빛을 쏘아댔다.

둘이서 시장만큼이나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감탄하고 또 호기심에 푹 빠져 들어가는 동안, 어느덧 마차가 황궁 앞에 다다랐다.

“다 왔어요! 저 먼저 내릴게요!”

신이 나서 마차 밖으로 뛰쳐나가는 설하와는 달리, 무흔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오는 동안이야 설하가 옆에서 정신을 쏙 빼놓았으니 괜찮았는데, 막상 내리려 하니 긴장되었다.

“왜 안 나와?”

마차의 출입문에 걸린 천을 젖히고 얼굴을 들이민 이는 윤이었다. 신기하게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무흔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작은 나무함을 꼭 끌어안고 마차 밖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주변이 술렁였다.

무흔이 멈칫하자, 마차 아래에서 기다리던 윤은 손을 뻗었다.

“내려와. 앞만 보고 걸어.”

무흔은 윤이 내민 손을 꽉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군중 앞에 서는 것은 떨리는 모양이었다.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주 국공을 뵙습니다.”

목 장군에게서 무흔의 마차를 확인한 내관이 신속히 나타났다. 그가 윤에게 먼저 인사를 올리고 이어 무흔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침전 소속의 장 내관이라 하옵니다. 제가 은증왕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은증왕께서는 저를 따라오십시오.”

그가 가리키는 쪽에는 가마가 하나, 그리고 내금위의 군사들이 나와 있었다.

윤이 무흔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가 봐.”

“효명성으로 언제 돌아가?”

“연회 마치고, 사나흘 더 머물다 갈 생각이야.”

무흔은 그 전에 다시 볼 수 있느냐 윤에게 물으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옆에 선 장 내관이라는 자가 관찰이라도 하듯 너무 빤히 저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수고하시게.”

윤이 무흔의 등을 떠밀며 장 내관에게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은증왕을 잘 돌봐주라는 의미였다.

장 내관은 윤에게 냉큼 머리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윤은 가마에 오른 무흔이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위태로워 보였으나 걱정만으로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오라버니! 여기! 어머니가 오셨어!”

설하의 목소리가 뒤에서 낭랑하게 울렸다.

윤은 흠칫했다. 저만 보면 혼사 타령을 하는 이모님이 나타난 것이었다.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기도 전에 그녀는 설하와 꼭 닮은 눈을 빛내며 마차를 바라보았다.

“은증왕이 같이 왔다지? 여기 있느냐?”

“이미 궁으로 들었습니다.”

“벌써? 이런… 내 한발 늦었구나. 아쉬워라. 그나저나 윤이 너는 괜찮은 것이냐?”

“예?”

설하의 모친은 주변을 살피고는 윤의 귀에 손을 대고 속삭여 물었다.

“듣자 하니 네가 은증왕과 각별한 사이라던데….”

“소문입니다.”

“설하의 유모는 내 소녀 시절부터 시중을 들던 이다. 풍문인지 사실인지 정확하게 짚어주는 성정을 지녔지.”

윤은 그저 웃는 얼굴로 답을 때워 버리고는 얼른 황궁 쪽으로 팔을 뻗어 보였다.

“저는 이제 황제 폐하께 인사를 올리려 하는데, 설하도 지금 같이 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말을 돌리긴. 우리 설하는 곱게 단장을 하여 내일 인사를 드릴 것이야. 예쁜 옷을 지어두었단다.”

“지금도 예쁩니다. 이모님을 닮아 언제 어디서든 얼굴에서 빛이 나지요.”

“날이 갈수록 능글맞은 게 느는 걸 보니 혼기가 꽉 차다 못해 넘쳤어. 쯧쯧. 네 짐과 사람들은 먼저 우리가 데리고 갈 테니 이따 집에서 보자꾸나.”

“예, 이모님. 감사합니다.”

윤은 족자를 챙겨 황제의 집무실로 바로 향하였다. 황제가 무흔을 어찌할 것인지를 최대한 빨리 알고 싶었다.

효명성주 국공 주윤, 이름이 불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황제가 푸근히 웃으며 그를 반가이 맞았다.

황제는 길을 가다 마주치면 돌아볼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보통의 몸집과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와 눈빛은 대륙의 통일을 앞둔 자의 면모 그 자체였다.

“먼 길 오느라 힘들지는 아니하였느냐.”

“염려해주신 덕분에 잘 도착하였습니다.”

“벽제성 함락 후에 바로 축하연을 해 주려 하였거늘, 태고산맥에 정찰을 나갔다 하더군. 하여 네가 다녀오기만을 기다렸다.”

“송구하옵니다.”

윤은 가지고 온 족자를 챙겨 황제에게 올렸다.

“일전에 폐하께서 어여삐 봐 주신 화공이 좋은 그림을 진상하였기에 이리 올려드립니다.”

“아… 종종 그림을 보내주는 그 화공 말이지. 내 그리 좋은 것을 여기서 볼 수 있나. 주 국공, 따라오게. 내실에서 함께 감상하도록 하지.”

황제는 윤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고는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없는 곳으로 향하였다. 내관이 하경으로부터 온 그림을 벽에 걸고 밖으로 나선 후에야 윤은 차분히 그림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흠… 이것이 자네가 효명성에서 출발하기 전날에 도착한 그림이라는 말인가?”

“예, 평소와는 달리 상단의 단주가 가장 빠른 말로 가장 무예가 날랜 자에게 들려 보냈습니다. 저번 그림이 왔을 때로부터의 시간적 간격을 고려해보면, 이 정보는 긴급하고 이례적인 일이라 볼 수 있습니다.”

황제는 대번에 연꽃을 가리켰다.

“연꽃이 자리를 옮겼구나.”

“예, 염록왕 전하께서 궐에서 아주 가까운 곳으로 처소를 옮기게 된 모양입니다.”

“좋지 않아. 우리 첩자가 그쪽 태자의 측근이 되었다 하기에 이번에는 빼올 수 있으려나 했는데….”

윤은 이어 배경에 숨겨진 암호를 모두 해독해주었다. 저번에 왔던 그림의 내용과 대단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상단에서 온 자가 말하기를, 희로국 황제의 광기가 극으로 치닫고 있다 합니다.”

“정복 전쟁의 마무리를 찍을 때가 되기는 하였지. 벽제성에서 자네가 힘써준 덕에 우리 군의 손실이나 피로 또한 전혀 없고 말이야.”

윤은 말없이 고개만 살짝 숙여 보였다.

“아, 그렇지. 대체 언제까지 혼사를 미룰 작정인가. 자네가 이리 중경에 들 때면 여식을 가진 집안들이 온통 뒤집어지는 것을 알고 있나?”

“아직은 제가….”

“정 귀비 소생의 공주가 올해로 열한 살이 되었어. 어떠하냐?”

“제 나이 스물여덟입니다. 공주님과는 띠가 상극이라 황실의 혼인 조건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허허, 거절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구먼.”

“송구합니다.”

“네가 후사를 보는 것은 비단 주씨 가문의 대를 잇는 문제만이 아니니라. 북부의 안정이 곧 정국의 안정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예, 폐하. 제게 맞는 치유자를 찾게 되는 대로 혼사를 결정하기로 하겠습니다. 언제 폭주하여 명을 다할지 모르는데, 장인 될 이에게 이러한 저를 믿고 여식을 내어 달라 청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도 예부상서가 효명성에 다녀와서는 그 얘길 하더구나. 네 혼사를 위해서라도 치유자를 찾는 일을 얼른 추진해야겠군, 허허.”

윤은 형식적인 감사의 인사를 최대한 정중히 올렸다. 이제 은증왕에 대해 슬쩍 운을 띄우려던 차였다.

“은증왕 말이야.”

황제에게 선수를 뺏겼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인데, 윤은 어쩐지 그것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예부상서 말로는 앙칼진 맛이 있다 하던데, 그것이 무척이나 매력적이라면서?”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요.”

“독특한 미색이라 하던데, 참으로 궁금해.”

“오늘 만나보실 것입니까.”

“오늘은 그도 여독을 풀고 푹 쉬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일, 더욱 곱게 피었을 때 만나보려 하네.”

피었을 때? 윤은 발끈하는 속내가 겉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희미한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은증왕은 어느 처소에 머물게 되는지요?”

“아직 정하지 아니하였네. 오늘 밤은 운우정에서 쉬며 단장을 하기로 하였어. 내일이 기대되는군.”

운우정(雲雨停). 황제가 비밀리에 창기들을 불러들여 별난 취미를 즐기기 위해 예부상서의 조언을 받아 세운 전각이었다.

윤은 당혹스런 낯빛을 이번엔 감추지 못했다. 은증왕의 거취를 놓고 황제와 협상을 할 생각이었는데, 계획이 어그러졌다.

내일 연회를 마친 후 황제는 은증왕을 취하려 할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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