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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69화 (69/85)

#069화

목 장군은 허허 웃으며 살짝 민망한 듯한, 그러면서도 자랑하고 싶어 하는 눈치를 드러냈다.

“제게 나이가 찬 여식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예부상서가 다리를 놓아 주어 그 외가 쪽 친척 되는 중서령 댁 차남과 혼담이 오가게 되었습니다.”

“오오, 그런 인연이 다….”

“참으로 신기하지요?”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닌가 봅니다. 숙부께서 효명성에 다녀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윤은 슬쩍 목 장군을 떠봤다. 숙부가 혼담을 진행시킨 시점이 언제인지가 중요했다.

“예, 근래의 일입니다. 출발 전에도 아이들 일로 또 만났는데, 은증왕을 모셔오기 쉽지 않을 것이라 겁을 주지 뭡니까, 하하하.”

“숙부가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하하.”

윤이 무흔에게 곁눈질을 하며 목 장군과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무흔 또한 별수 없이, 어색하게 같이 웃었다.

‘설마, 내가 송환되는 이 일에 예부상서가 관련되어 있는 건가. 아니면,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

무흔은 불안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최상급의 찻잎으로 우린 차를 한 모금 홀짝였으나,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잔을 내려놓은 무흔은 앞의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저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이제 막 병석에서 나와 그런지 아직 체력이 온전치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들이 저를 붙잡지 못하도록 무흔은 냅다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입구에서 대기하던 아휘가 얼른 들어와 무흔을 부축했다.

“내일 출발이니, 은증왕께서는 오늘 푹 쉬시오. 도학 선생께 말해 탕약을 곧 보내드리리다.”

윤의 말에 무흔의 눈이 둥글게 커졌다.

“출발이… 내일?”

“내가 연회에 참석하여야 하는지라 일정이 그리 촉박하게 되었소. 이따 찾아뵙고 자세한 얘길 드리도록 하지. 가 보시오.”

이따 찾아뵙는다던 윤이 무흔의 처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저녁 식사를 다 마치고도 두 시진이나 지난 후였다.

“아니, 내일이라니! 사람들과 작별 인사할 여유 정도는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얼굴을 맞대자마자 튀어나온 무흔의 격한 항의에도 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섰다.

“줬잖나? 반나절이면 충분하지 않아?”

“뭐라?”

“그래서 일부러 이리 늦게 찾아온 건데? 소식을 듣자 하니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러 다니느라 발이 바빴다지.”

“남의 뒤나 캔 것인가.”

무흔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렸다.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헤어짐의 인사를 나누다 보니 속상하고 울적한 마음이 그득했는데, 그걸 뻔히 헤아릴 수 있으면서 이리 못되게 나오는 건 대체 무슨 심보인지.

“뒤를 캐긴. 여기저기서 울음보가 터지는 통에 창문만 열어 놓아도 절로 알겠더구먼. 짐은 쌌나?”

“내가 무슨 짐이 있다고. 옷가지와 장갑은 아휘가 챙겨 주었고, 자잘한 건 저 상자 하나면 끝이네.”

탁자 위에 놓인 손바닥 크기의 나무함. 윤이 뚜껑을 대뜸 열었다.

“무슨 짓인가!”

당황한 무흔은 잽싸게 내부를 손으로 가려보았지만 한 발 늦었다.

“내가 만든 장난감을 이리 고이 간직하고 있는 줄 몰랐군.”

금으로 만든 작은 강아지와 은으로 만든 삼국지의 등장인물들이 상자 안에서 데굴, 굴렀다. 설하가 준 알록달록한 사탕 주머니 또한 그 안에 있었다.

“내일, 설하도 같이 간다지?”

“응. 이모님께서 목 장군 편에 설하와 같이 오는 걸 잊지 말라고 서신을 보내셨네. 내가 중경에 갈 때면 늘 설하도 동행하거든.”

“먼 길 심심하지 않게 갈 수 있겠군.”

“중경으로 가는 동안은 전처럼 그대와 사적인 시간은 보내지 못할 것 같아. 하여 나는 지금 작별 인사를 미리 하려 들렀어.”

“어?”

“이거, 받아.”

윤이 왼쪽 소매 안에서 꺼낸 것은 백옥 노리개였다. 감격에 찬 얼굴로 무흔은 두 손을 내밀어 어머니의 노리개를 받았다.

“불이 났던 날, 아이들이 그대에게 가져다주려 가져왔다가 전각에 떨어뜨린 모양이야. 실이 더러워져서 그 부분만 새것으로 바꾸려 하였는데… 갑작스레 출발하게 된 탓에 시일이 촉박하여 똑같은 것은 찾지 못하고 다른 실로 엮었다 하더군.”

“…고마워.”

“최대한 비슷한 색을 찾는다고 찾았는데, 비슷한지 모르겠어.”

“굉장히 비슷해. 게다가 전보다 더 예뻐졌어. 정말 고마워.”

무흔은 얼른 노리개를 허리에 달았다.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단단히 매듭을 지어 두었다.

“나는 준비한 게 없는데….”

무흔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윤의 손을 잡았다. 제어를 풀고 정화의 힘을 흘려보냈다.

“몸으로 때우는 건가.”

“저급하게 그런 표현을!”

“마지막인데, 더 센 걸로 주면 안 되나?”

“마지막이야?”

“작별 인사니까.”

“하지만… 아예 못 보게 되는 건 아니지 않아? 그리고 주 국공이 위급할 때는 내 지인이 필요할 텐데.”

“참을 만하면 참아야지. 고작 지인 한 번 화끈하게 받겠답시고 열흘이나 걸리는 거리를 오가고 싶지는 않아.”

참을 만하면 참을 수 있는 정도의 욕망이었나.

무흔은 묘하게도 그 생각에 우울해졌다. 상대를 더 그리워할 쪽은 자신일 게 분명했다.

“뭐, 날 알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뿐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쉽겠군.”

역시나 무심한 답변에 무흔은 한 번 더 실망했다. 그것이 큰 그림을 그리는 윤이 일부러 의도하고 있는 것임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이것을… 받아주겠는가.”

윤이 노리개가 들어 있던 그 반대쪽 소매에서 꺼낸 것은 목걸이였다. 회룬석 목걸이. 하지만 무흔이 착용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형태였다.

“그대가 착용하고 있던 열두 개의 돌 중 세 개로 만든 것이야. 북부 최고의 장인이 공들여 세공하였지.”

새끼손톱을 넷으로 나눈 크기의 작은 회룬석 구슬과 금구슬이 교대로 엮여 찬란한 빛을 내고 있는 목걸이였다.

“중경은 이곳과는 많이 달라. 견제와 음모가 판을 치는 만큼, 누가 그대의 적인지 아군인지를 판별하기조차 힘들 거야. 그대가 치유자임을 누군가 알아낸다면, 그것을 좋지 않게 이용하려 드는 자들도 따라붙을 테지.”

“회룬석을 내게 이만큼이나 주는 것인가? 그대 땅의 마물을 막는 데 다시 쓸 거라 하지 않았어?”

“그사이 큰 회룬석을 제법 확보해둔 터라, 이리 작은 회룬석들은 이제 혈자리를 막기에는 좀 그렇지.”

윤은 목걸이에 달아 둔 잠금 장치를 무흔에게 보이며 설명했다.

“하나 건너 하나로 엮인 금구슬들이 모두 똑같은 것으로 보이겠지만, 이건 아니야. 잘 보면 ‘흔’ 자가 새겨져 있어.”

“장인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리 작은 구슬에 글자를 새겼는가.”

“내가 한 거야.”

어울리지 않게 멋쩍은 미소를 짓는 윤을 보고 무흔은 피식 웃었다.

“헌데, 이건 기쁠 흔(欣) 자가 아닌가. 내 이름에 쓰는 한자가 아닌데.”

“그대 이름에는 무엇을 쓰기에?”

“흔적 흔(痕)을 쓰지.”

“그것은 불용한자가 아닌가? 어찌 사람 이름에 흉터의 뜻을 가진 글자를 써?”

“무흔의 무는 없을 무(無). 내 흔적조차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부황이 지은 이름이네.”

무흔의 목소리에서는 서글픔, 억울함, 비애, 외로움, 그 모든 음울한 감정들이 묻어났다. 윤의 귀에는 그리 들렸다.

윤은 별것 아니라는 듯 다독여주기 위해 일부러 더 밝은 목소리를 냈다.

“이제 부황과의 연은 끊었으니, 새로 받은 이름을 사용하면 되겠어. 무는 아리따울 무(娬)를 쓰든가, 아니면 춤출 무(舞)가 잘 어울리겠군.”

“뭐? 춤출 무…는 왜?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춤이 취미인 것을 들켰나 싶어 무흔은 두근두근한 심장을 부여잡았다. 분명 아무도 없을 때만 별당에서 창을 꼭꼭 닫고 혼자 춤을 추었었는데.

“그날 말이야. 그대가 대탈주를 벌이다 서문 앞에서 붙잡혔던 날. 병사들을 상대로 휘두르던 그대의 검을 보았어. 그건 검술이 아니라 검무더군.”

“그게… 티가 날 정도인가?”

“무슨 소리야.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을 텐데.”

“부황은 검술 익히는 걸 금하셨어. 하여 검무를 익힌 거야. 그건 춤이라서 대충 넘어갈 수 있었거든.”

“춤출 줄 아는 것 맞네. 그럼 춤출 무에 기쁠 흔으로 결정해.”

윤은 냉큼 다른 금구슬 하나를 골라 손가락을 대었다. 꾹 눌렀다 뗀 자리에는 선명하게 춤출 무 자 하나가 음각되었다.

“누구 맘대로!”

“하하, 자, 이거 봐 봐.”

윤은 유쾌하게 웃어가며 아까의 그 흔(欣)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금구슬을 무흔의 눈앞에 들이댔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전에 착용하던 것처럼 잠금쇠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글자가 새겨진 이 반지의 안쪽 둥근 선을 가볍게 누르면….”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원을 그리던 목걸이가 하나의 곡선으로 툭 떨어졌다. 윤이 양 끝을 잡아 팽팽하게 당기자 직선이 되었다.

“이렇게, 스스로 풀고 잠글 수 있는 목걸이가 되지.”

무흔은 경탄에 찬 눈빛으로 신기한 장치를 몇 번이나 눌렀다 꽂았다 풀었다 그리 반복했다.

“그대의 힘을 감추어야 할 때 유용하게 사용해. 거기선 장갑을 착용하지 못할 경우도 생길 테니까.”

무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고마움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지.

알알이 맺힌 고운 회룬석 목걸이가 손끝에 닿는 느낌이 너무도 황홀했다.

“이리 줘 봐, 걸어줄게.”

무흔이 고개를 숙였다. 이어 스스로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모아 어깨 앞으로 드리웠다.

윤은 그 하얗고 우아한 목덜미를 한껏 눈에 담았다. 만지고 싶고 움켜쥐고 싶고 또 입 맞추고 싶은 백색의 살결. 맥이 팔딱팔딱 뛸 것만 같은 생명력 넘치는 목덜미. 그 모든 것을 영원히 소유하고 싶었다.

“자, 됐다.”

윤은 무흔의 목에 회룬석 목걸이를 걸어주고, 기쁠 흔 자가 적인 구슬을 한 번 더 꾹 눌러 잠금쇠를 달칵, 잠가 버렸다.

“도학 선생 말로는 이 정도 양이면 그대가 치유자임을 들킬 일은 절대 없을 거라 하더군.”

“다행이다.”

“어때? 이제는 힘이 억눌리고 있는 게 느껴져?”

예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신기하게도 목걸이가 걸리고 목 뒤에서 채워지는 순간, 가슴 속에 넘실대던 바다가 자그마한 호리병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은증왕, 시험해볼까?”

“뭘?”

“목걸이의 효과 말이야. 아무래도 4분의 1로 회룬석의 양이 줄었으니 제대로 작용할지 영 마음이 놓이질 않아.”

윤이 무흔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을 이리 줘 봐. 지인의 제어를 풀고, 자연스럽게 힘을 내게로 방출시키는 거야. 확인해보자.”

무흔은 윤에게로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섰다. 손을 내미는 대신 그는 두 팔을 들어 쭉 뻗어 윤의 목 뒤로 제 손목에 채워진 금사슬을 걸쳤다.

두 손으로 윤의 머리를 가볍게 움켜쥔 후에, 귓가에 속삭였다.

“회룬석을 세 덩이나 썼으니까… 이 정도는 되어야 시험해 볼 수준이 되겠지.”

무흔의 입술이 윤의 입술 위로 포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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