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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68화 (68/85)

#068화

*

황제의 명을 받들고 온 50살의 표기장군 목채완은 도착한 순간부터 줄곧 은증왕을 궁금해했으나, 병중이라는 도학 선생의 말에 아쉬움을 삼켰다.

결국 그는 은증왕을 만나보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그 시각, 윤은 사평에게 질질 끌리다시피 도학 선생 앞에 섰다.

윤에게서 자세한 내막을 듣고, 도학이 먼저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은증왕께서 생각을 해 본다 하셨다라….”

“그런데 성주님께서는 설득도 더 하지 않으시고 그냥 나오셨다 이 말씀입니다. 이를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사평이 따가운 눈총을 보내며 말도 안 된다는 식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짚이는 것은 둘이야. 첫째는 내게 화가 난 것에 대한 지나가는 복수요, 둘째는… 그것이… 은증왕은 워낙 바깥세상을 보고자 하는 욕구가 큰 자라. 하여 중경으로 간다는 것을 일단 반기는 것이 아닌가 싶어.”

윤이 설명을 마치기 무섭게 사평은 대번에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후자는 아닙니다. 절대. 밖을 나다니고 싶으셨거든 성주님과 함께 시장이든 마을이든 어디든 구경을 나서면 그만입니다. 산이며 강이며, 심지어 바다가 문제겠습니까. 중경이 궁금하거든 성주님과 그리로 여행을 다녀오는 것도 방법이지요. 왜 쉬운 길을 놔두고 벼랑길로 떨어지려 합니까?”

“그럼 전자라는 건가?”

“저는 그쪽이 가깝다고 봅니다. 충분히 마음을 풀어주고 달랠 수 있을 거예요. 도학 선생께서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열을 올리는 사평과는 달리 도학 선생은 여유롭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그저 웃고만 있었다.

“허허….”

“허허라니요. 성주님께서 정신이 번쩍 드시도록 한 마디 해 주십시오.”

“사평, 자네가 지금껏 살면서 예측이 빗나간 것이 몇 번이나 되겠는가. 손에 꼽을 정도이지?”

“그러합니다.”

“이번 은증왕의 선택 또한 그러하기에 자네가 더욱 당황한 것이야. 너무 열 올리지 말게.”

사평은 뜨끔했다.

“우리 국공께서 태평해 보이시는 것엔 다 이유가 있지 않겠나.”

확실히 윤은 낮에 씩씩대며 별당을 나섰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마치 그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혹 은증왕을 그사이 다시 만나셨습니까? 그가 좋은 대답을 해주더이까? 삐진 속내를 풀었나요? 성주님께서 달래주셨습니까?”

“자네답지 않게 오두방정은.”

윤은 시종이 내온 술을 사평과 도학에게 한 잔씩 따라주며 여유 있게 웃어 보였다.

“아까는 내 화가 많이 났어. 은증왕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는 통에 열이 올랐거든. 헌데….”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우고, 윤은 둘을 향해 가볍게 잔을 들어 올렸다.

“내가 못 할 게 뭐 있겠는가?”

희로국에서 무흔을 빼오기 위해 이능력을 쓰겠다 다짐까지 했던 마당에, 그를 곁에 두기 위해 못 할 짓은 없었다.

더 이상 종종거리며 끌려다니지 않기로 했다.

그리 결론을 내리고 나니, 절로 웃음이 나고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술을 들이켜 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 세상 구경, 실컷 하라 하지. 일단 중경까지 동행하고, 올 때 데리고 오면 그만이야.”

*

호쾌하게 결단을 내린 윤과는 달리, 무흔은 잠이 오지 않는 밤을 고뇌로 보내는 중이었다.

“간다고 할까, 아니면 꾀병 계획에 동참해 줄까.”

뒤척뒤척 몸을 뒤집어가며 중얼거린 무흔은 한숨을 푹 쉬었다.

“중경에 간다 해서 주 국공을 두 번 다시 못 보게 되는 건 아닐 거 아냐.”

무흔은 눈을 꾹 감고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아직 오지도 않은 헤어짐과 아쉬움 또 그리움을 헤아려보는 자신을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뇌리에 공포와 고통으로 선명하게 아로새겨진, 일방적인 폭행이나 다름없는 그 짐승 같은 행위는 떠올리려 하는 것만으로도 저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그런 내가 주 국공을 상대로 몸에 반응이 왔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야, 흔들리지 말자. 나는 절대 그런 식으로 몸을 내주고 싶지 않아.”

이 와중에도 윤이 했던 말이 머리에 무섭게 남았다. 중경에 가면 어찌 될지에 대해 예전에 윤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건원의 황제께서는 과시하는 것을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다 하였지. 그 호기심이라는 게 날 두고 하는 소리였던 것 같은데…. 과시? 그럼 날 여기저기 내놓아 구경거리로 만든다는 소리일까?”

예전처럼 갇혀 사는 것도 싫고, 그렇다 하여 구경거리가 되어 손가락질을 받거나 이상한 시선의 중심에 있기도 싫었다.

“아니야, 주 국공이 그럴 거라 생각한다는 거지,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어지러운 마음 탓에 수면이 엉망이었다. 자다 깨다 자다 깨기를 반복하고, 그나마 깊은 잠이 제대로 든 것은 해뜨기 직전의 새벽이었다.

늦은 아침, 눈을 떴을 때 무흔은 신기하게도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구름이 걷힌 듯한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 찰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을 붙들었다.

“결정했어.”

아휘를 불러 씻고, 옷을 입고 긴 머리를 단장했다.

*

윤은 장군과 차를 나누기 위해 다실로 향하는 길이었다.

“성주님!”

뒤에서 누군가 저를 부르며 뛰어오는 소리에 그는 걸음을 멈췄다.

“은증왕에게 무슨 일이 생겼느냐?”

돌아선 윤은 아휘를 발견하자마자 대뜸 무흔의 안부부터 물었다.

“아닙니다. 지금 은증왕께서 신발을 신고 계신데, 다실까지 성주님과 함께 가고 싶으시다 하여 제가 이리 뛰었습니다.”

아휘가 그리 윤을 잡고 있는 동안, 저쪽 길 끝에서 무흔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필, 오늘따라 유난히 하얗고 반짝이고 고와 보일 건 뭔지.

무흔이 저를 보고는 반갑다는 듯 두 팔을 번쩍 치켜들고는 손목 사이에 늘어진 황금 사슬을 마구 흔들어대고 있었다.

뻔뻔하고 이쁜 것.

윤은 어금니를 꽉 물어 치솟는 화를 일단 삭였다. 심호흡을 깊게 한 번 하고, 양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주 국공, 오늘 중경에서 온 장군과 차 약속이 있다 하지 않았는가. 같이 가지.”

“생각해 본다더니, 벌써 마음을 정했나 보군.”

“응. 나는….”

무흔은 윤과 보폭을 맞추어 빠르게 걸어가며 금사슬을 꽉 쥐었다. 아무래도 말을 하려니 긴장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중경으로 가려고.”

화를 내려나. 아니면 분위기가 말도 못 하게 얼어붙으려나. 무흔이 그리 고민하였건만, 윤은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괜한 거짓말로 용쓸 필요 없고 잘됐어.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는 건 나로서도 감수할 게 많은 부분인데. 게다가 도학 선생에게 거짓말에 참여해 달라 하는 것도 영 마음에 걸렸었거든.”

윤이 오히려 잘됐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무흔은 옆으로 눈을 슬그머니 굴려 그러한 윤의 표정을 다시 확인했다.

‘이 인간이 왜 이러지? 날 붙잡으려는 새로운 작전인가?’

분명 어제 그렇게 화를 내고 갔는데 오늘 이리 난데없이 유쾌해 보이다니. 방금 중경으로 가겠다는 말을 꺼내면서 엄청 긴장했는데, 어딘지 허무하고 이상했다.

무흔은 지난 밤에 잠자리에서 뒤척이며 궁금히 여기던 것을 묻기로 했다.

“그… 건원의 황제 말이야, 나를 손님 대접해 줄까? 아무래도 황제의 아우가 희로국에 잡혀 있으니 나를 험하게 다룰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런 걸 바라고 중경에 가겠다는 건가?”

“그런 건 아니고.”

“내가 말했잖나. 황제께선 궁금한 건 꼭 해결해야 하고, 알고 싶은 건 뼛속까지 들여다봐야 직성이 풀리시는 분이시라.”

“나를 두고 그럴 것이라는 얘긴가?”

윤은 내심 걱정을 하고 있었다. 황제가 아무래도 무흔을 내버려 두지 않을 것만 같아서. 희로국에서 무흔을 버린 걸 황제가 알고 있으니, 예를 갖추어 손님 대접을 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내가 황제 폐하의 속내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괜히 무흔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윤은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아, 그리고 과시하기 좋아한다 하지 않았어?”

“그건 사실이야. 좋은 게 들어오면 꼭 어린아이처럼 동네방네 자랑을 하셔. 그러다 보니 대소신료들이 앞다투어 뭐든 최상급을 진상하려 하는 못된 습관들을 들였지.”

“나는 어떻게 될 것 같아?”

“그걸 감수하고 중경으로 가겠다 하는 거 아니었나?”

윤의 말투가 어찌나 싸늘한지. 무흔은 옆으로 고개까지 틀어 눈을 흘겼다.

“매정하기는.”

“나의 보호를 거절한 건 그쪽이니 매정하다는 말을 들을 이유 따윈 없지. 들어가. 이쪽이야.”

윤이 발을 멈추고 한 팔은 접어 등허리에, 다른 팔은 길게 뻗어 다실로 무흔을 안내했다.

이미 도착해 바깥 풍경을 감상하고 있던 풍채 좋은 사내가 얼른 돌아서서 그들을 맞았다.

“목 장군, 미리 와 계셨습니까?”

“예, 무척이나 기대가 되는지라…. 이분이 은증왕이시군요.”

이것이 예행연습인가. 무흔은 그러한 생각부터 들었다.

맞은편에 선, 나이가 아비뻘인데다 정2품 장군이라는 자가 넋을 놓은 듯이 제 눈과 피부, 머리카락을 뜯어 보고 있었다.

윤이 헛기침을 하며 상석에 앉자 그제야 목 장군도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 앉았다. 무흔도 앉고 서로 자기소개도 하고. 그렇게 어색한 만남의 자리가 시작되었다.

“은증왕께서 아프시다 들었습니다. 이리 거동하셔도 괜찮으신지요?”

“대륙 최고의 명의인 도학 선생께서 돌봐주신 덕에 병을 떨치고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도학 선생 말로는 마음의 병이 몸으로 전이되어 치료가 참으로 쉽지 않다 하던데….”

무흔이 뭐라 답을 해야 할지 궁리하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켜는데, 윤이 대뜸 말을 받았다.

“은증왕이 건원국의 수도에 가고 싶었는지, 마음의 병이 씻긴 듯 나은 모양입니다. 내내 시름시름 앓더니만, 출발을 앞두고 이리 털고 일어날 줄이야, 허허.”

무흔은 속으로 발끈하는 것을 억누르고, 윤을 향해 생글생글 웃으며 답했다.

“도학 선생께서 워낙 명의시라, 제가 그 덕을 보았지요. 감사할 따름입니다.”

목 장군이 차를 마시면서도 힐끔힐끔 무흔의 자태를 훔쳐보았다. 그것이 영 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목 장군께서는 어찌 효명성에 다실이 따로 있는 것을 아시고 여기서 차를 들어 보고 싶다 하셨습니까?”

그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리기 위해, 윤이 질문을 건넸다.

“일전에 식사 자리에서 예부상서가 그리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효명성에 가면 꼭 다실은 구경을 해 보라고요. 이유를 몰랐는데, 이리 와 보니 정말 특별하군요.”

무흔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또한 아이들의 손에 이끌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온갖 이능력으로 빚어낸 건축 기술과 자연의 조화에 넋을 뺏겼었다. 그런데 지금 예부상서라 하지 않았나?

목 장군이 예부상서의 사람인가 싶어 무흔은 덜컥 경계심부터 들었다.

의외의 관계에 놀란 것은 윤 또한 마찬가지였다.

“숙부님과 가까운 사이이신 줄 몰랐습니다. 두 분이 평소 왕래가 있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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