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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화
걱정 그득한 무흔의 표정을 살핀 후, 사평은 주변을 일부러 돌아보고 목소리를 한껏 낮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쪽에 보이는 전각은 주씨 집안의 사당입니다. 성주께서 얼마 전, 새벽에 잠을 이루지 못하시고 저곳에 들어 선조들께 향을 피우고 절을 하셨지요.”
무흔의 표정에는 뜬금없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난데없이 무슨 사당에 절 타령이냐는 식으로. 사평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은증왕께서 바라시는 대로 하시겠다 그리 선조들께 고하셨다 합니다.”
“허면, 나와 염록왕 둘 다를 구하는 데 이능력을 쓰겠다 결심했다… 그 말이 맞는가?”
“예, 그러합니다. 참으로 잘됐지요?”
무흔의 얼굴이 찬란할 정도로 빛나 보였다. 그러다 순간 거짓말처럼 암담해졌다.
“어찌 그러십니까? 기쁘지 아니하신지요?”
첫 반응은 사평이 정확히 예상한 그대로였는데. 대체 무흔이 무슨 연유로 저러는지를 그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기쁘지 않을 리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무흔의 얼굴에는 심려의 기색이 그득했다. 무흔은 손목에 걸린 금사슬을 만지작대며 발끝만 바라보며 걸음을 무겁게 옮겼다.
“염려되는 부분이 있으시거든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해답을 찾아오겠습니다.”
사평의 힘 있는 목소리에도 무흔의 기분은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염려할 것이 뭐 있나. 주 국공 혼자 나서도 포로 교환장을 싹 쓸어 버릴 수 있을 텐데.”
무흔은 대충 답을 둘러댔다. 심란한 이유는 문제의 그날 밤 자신이 했던 발언 때문이었다.
주 국공이 그리해 준다면 제 입술을 허락해주겠다고.
약속을 이행해야 하는 그 장면을 상상하는 순간, 무흔은 손으로 두 뺨을 잽싸게 감쌌다. 제 얼굴이 붉게 달아오는 것을 사평이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얼른 가세. 전령이 날 구경한답시고 들이닥치기 전에 누워 있어야지. 기왕이면 열이 난 것으로 꾸미는 것이 좋겠어.”
무흔은 긴 다리를 쭉쭉 뻗어 빠른 걸음으로 마구 앞서나갔다. 고작 이만한 상상에 얼굴을 붉히는 자신이 끔찍하게 싫었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야. 주 국공과 멀어지려 다짐했건만, 왜 그가 결심했단 말에 이리 설레지?’
무흔은 처소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 사평이 같이 가자며 간곡하게 저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으나 지금은 그럴 정신이 없었다.
몸을 혹사시켜서라도 머리에 든 괴상망측한 생각을 밀어내고 제 몸에 자꾸만 솟아나는 더럽고 무시무시한 욕망을 떨쳐내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주 국공과 멀어진답시고 희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그곳에 가면 그자가 있으니까. 연옥에 갇힌 것처럼 그 행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다. 차라리 주 국공이 나아.’
“아아악!”
무흔은 숨을 헐떡일 정도로 달리면서도 괴성을 질렀다.
‘차라리 주 국공이 낫다니!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상대가 이자이든 저자이든 행위 자체가 인간 이하, 짐승만도 못한 것은 매한가지인데!’
어쨌든 희로국에 돌아가지 않게 되는 즉시 주 국공은 멀리해야 한다, 라는 다짐만을 무흔은 가슴 깊이 아로새겼다.
*
윤이 무흔의 처소에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약 한 시진가량이 흐른 후였다.
“성주님께서 혼자 오고 계셔. 전령은 동행하지 않았고.”
본채 문 앞에 나가 있던 시종이 아휘에게 정보를 물어다 주고는 급히 되돌아갔다.
침대로 들어가 아픈 척 누워 있던 무흔은 그 소리에 벌떡 일어나 마루로 나왔다. 종종거리고 기다리다가, 그 잠깐을 참지 못하고 신발을 신었다.
“어딜 가시려고요?”
아휘가 놀라서 묻자 무흔은 본채를 가리켰다.
“사람을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법이 어딨어! 내가 당사자고, 내 일인데!”
씩씩대며 마당으로 걸어 나가다, 무흔은 다시 돌아 들어왔다.
윤에게 초조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의연한 척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휘, 차를 준비해줘. 마음을 가라앉히는 걸로.”
“예, 마침 좋은 차가 본채에 들어왔습니다. 가지고 올게요.”
차라면 별당에도 필요한 만큼은 갖추고 있었다. 아휘가 눈치 빠르게 자리를 비운 것이었다.
윤이 바로 도착했다. 무흔은 벌떡 일어나 그를 맞았다.
“은증왕.”
“주 국공.”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여 인사를 건네자 무흔 또한 그리했다.
윤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조금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무흔은 답답함에 냉큼 윤의 코앞까지 다가가 물었다.
“어찌 되었어?”
“사신단의 협상이 결렬됐다더군. 포로 교환이 무산되었어.”
무흔은 놀란 표정으로 가슴에 손을 얹었다. 한참 만에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미소가 순식간에 번져나가고 긴장으로 그득했던 눈에는 찬란하게 반짝이는 생기가 넘쳤다.
그 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는 윤의 얼굴에도 똑같이 미소가 감돌았다.
“희로국에 가지 않아도 돼. 다행이야.”
윤의 두 손이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는 순간, 무흔은 그를 덥석 끌어안아 버렸다.
“살았다. 하아아… 이제 살았어.”
무흔은 그리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위로 들었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윤을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저를 바라보는 따스한 눈동자, 입가에 어린 다정한 미소, 그런데 어딘지 편치 않아 보이는 미묘한 긴장감.
윤의 그 표정에 의아함을 느낀 순간, 무흔은 제 두 팔이 무엇을 어쩌고 있는지를 뒤늦게 깨달았다.
“저리 가!”
무흔은 질겁을 하며 윤의 가슴팍을 밀쳐내고 뒷걸음질 쳤다.
“아니, 가만히 있는 사람을 껴안은 건 그쪽이면서 저리 가라니.”
“어쨌든. 떨어져 있으라고.”
둘은 딱 한 팔 길이만큼 떨어져 섰다.
무흔은 윤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우선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일단 이 어색하기 짝이 없는 침묵을 깨뜨려야 했다.
“자세한 얘기나 좀 해 봐. 희로국과 협상은 왜 결렬되었는데?”
윤에게서 답이 바로 나오지 않자, 무흔은 고개를 슬며시 들어 그를 살폈다. 난처한 윤의 표정을 한눈에 읽을 수 있었다.
“그쪽 황제가 거절한 모양이야.”
“허, 저주를 품은 자식 새끼는 인질로서의 가치 따위 없다?”
기가 차다는 듯, 무흔이 헛웃음과 비아냥을 내뱉고는 고개를 절레 저었다.
윤은 사평이 이야기했던 그 기회를 떠올렸다. 아비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충격받은 무흔을 달래주며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고 가까워지라고.
힘이 빠졌는지 혹은 긴장이 풀렸는지, 비틀거리며 자리에 앉는 무흔을 보고 윤이 막 가까이 다가가려던 차였다.
“휴, 다행이야. 미친 부황이 손절을 다 해 주고. 덕분에 살았어. 아비로서의 도리를 이제야, 난생처음 제대로 해 주네.”
이어 유쾌하게 웃기까지.
할 말을 잃었다. 이게 아닌데. 윤은 작전이 처음부터 꼬여 들어가는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흔은 앞에 놓인 탁자를 손끝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앉아. 아휘가 차를 가져온댔어.”
“안 돌아오겠지. 그대가 나와 둘이 있는데, 그 녀석이 방해를 할 것 같나?”
“잘 심어둔 끄나풀답네.”
“선의는 선의로 받아주지?”
“아, 그러고 보니 아휘가 아까 도시락을 가지러 다녀와서 그러더군. 황제의 전령으로 장군이 왔다고. 혹 무슨 일이 더 있는 것인가?”
올 것이 왔다. 윤은 무흔과 마주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황제의 명은 두 가지야. 하나는, 내달 5일에 있을 연회에 내가 참석할 것. 다른 하나는 은증왕 그대에 대한 것으로….”
윤이 말을 잠깐 멈추었다. 일부러 뜸을 들이는 것이 아니라 쉬운 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무흔은 윤의 망설임을 대번에 눈치챘다.
“건원의 황제가 이후 나의 거취에 대해 대체 뭐라 했기에?”
“맨 처음과 같아. 중경으로 데리고 오라는 명이야.”
“장군씩이나 되는 자가 전령으로 온 것은 결국 날 끌고 가기 위해서겠군. 위에서도 주 국공이 날 내놓지 않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나 봐?”
무흔은 중얼중얼대며 머리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이건 기회였다. 주 국공에게서 멀어질 기회.
‘사내가 몸 좀 만졌다고 발정하는 내가 아니라, 본래의 멀쩡한 나로 되돌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무흔은 생기가 돌고 있을 게 분명한 제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푹 수그렸다. 저와는 달리 윤은 심각한 상태였으니까.
“일단 그대가 병을 얻어 누워 있다고 표기장군에게 운은 띄워 두었어. 다행히 도학 선생이 성에 계시니 합당한 뒷받침을 해 주실 테고.”
“도학 선생께서 그런 거짓말에 참여하신다?”
“그대가 무탈하게 머무르기를 원하니까. 내일 낮에 장군과 함께 차를 나누기로 하였는데, 그대는 초대에 응하지 말고 여기 가만히 누워 아픈 척만 하면 돼.”
윤은 대번에 무흔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그리하겠노라고 답할 줄로만 알았다.
“생각을 좀 해 볼게.”
무흔의 대답은 윤의 기대와는 달랐다. 달라도 아주 한참 동떨어진 답이었다. 당황한 윤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생각할 게 뭐 있나?”
무흔은 썩 유쾌하지 않은 표정으로 윤을 흘깃 바라보고서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아주 조용하고도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억 안 나나 봐? 내가 무릎 꿇고 매달렸을 때, 주 국공은 생각해 보겠다 했잖나? 헌데, 내가 생각 좀 해 본다는 게 그리 당연하지 않을 일이야?”
“당연히 여기… 나와… 아니, 효명성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줄 알았어.”
“희로국만 아니면 나야 어디라도 상관없지,”
“내가 전에 얘기했잖나! 중경에 가면 여기와는 다를 것이야. 황제께선 그대를….”
“나를 뭐.”
무흔의 대답에는 따지는 듯한 분위기가 묻어났다.
힘이 매섭게 들어간 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일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 것이 견딜 수 없이 답답했으며, 대체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됐어, 그 생각이라는 거 어디 실컷 해 보시게.”
윤이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
무흔은 그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너무 심했나 싶기는 한데, 한 방 먹인 것이 솔직히 통쾌했다.
생각해 본다는 둥, 닷새 후에 답을 준다는 둥 윤이 배짱을 튕겼던 그날, 눈이 붓도록 펑펑 울었던 걸 생각하니 미안함이 쏙 들어갔다.
그러다가도 사평이 아까 이야기해 준 것이 마음에 툭 걸렸다.
윤이 저를 위해 신념을 버리고 이능력을 사용하기로 결심했다고.
남고 싶은 마음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속에서 꼬여 뒤엉켜 버렸다.
“정말 생각을 해 봐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네….”
무흔은 윤이 가 버리고 없는 텅 빈 마당을 바라보았다. 기분이 복잡미묘했다.
마루로 나와 기둥을 붙들고선 이마를 가볍게 콩 박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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