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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66화 (66/85)

#066화

공관은 효명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길목에 자리잡은 건물이었다. 황제의 명을 전하는 이를 마중 나올 때, 성주가 공관에서 맞이하는 것이 관례였다.

윤은 귀를 의심했다. 황제의 명을 가져온 자가 우렁차게 읽는 내용에 기가 찼다.

“국공 주윤은 벽제성 함락의 1등 공신으로, 그 공을 치하하기 위한 축하연을 다음 달 5일에 열고자 한다. 이에 참석을 명하노라.”

다음 달 5일이면 늦어도 이틀 후에는 효명성에서 출발해야 했다. 잔꾀를 부릴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날을 이렇게 잡은 것이 분명했다.

“희로국과의 포로 교환이 무산된 바, 표기장군 목채완에게 희로국 황자 은증왕 무흔의 호송을 명하였으니 이에 협조하라.”

“신 주윤, 황제 폐하의 명 받들겠사옵니다.”

영혼 따위는 솜털만큼도 깃들지 않은 대답이 윤의 입에서 형식적으로 튀어나왔다.

‘어쩐지.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온 전령의 직위가 과하고 넘친다 했더니. 사평의 짐작대로다. 은증왕의 호송을 다른 이에게 맡겼어.’

무흔을 확실히 데려가겠다는 황제의 뜻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인사임에 분명했다.

정2품, 표기장군 목채완이 사람 좋게 허허 웃으며 윤에게 조서를 전달했다.

“내 막중한 임무를 맡았어요. 주 국공께서 많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장군께서 오셨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자, 성으로 드시지요.”

그들의 담소를 뒤로하고, 사평은 은근슬쩍 자리를 떠서 먼저 성으로 돌아왔다. 성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던 시종이 냉큼 다가왔다.

“장사 나리, 아휘가 소식을 보냈습니다. 은증왕께서 송화정에서 명상 후 음식을 드실 예정이랍니다.”

“오래되었는가?”

“아닙니다. 아직 반 시진도 되지 않았습니다. 은증왕께서 인적 드물고 조용한 곳을 찾으셨기에 송화정 부근 두 군데의 길목 모두 병사들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그래. 넌 즉시 숙영부인을 찾아 전령으로 정2품 장군이 오셨다 전하거라.”

사평은 얼른 송화정으로 향했다. 숙영부인에게야 저 정도만 이야기해 두어도 알아서 식사와 처소를 최상으로 끌어올릴 것이니 걱정이 없었다.

문제는 윤이었다.

“성주님께서 아까 얘기한 대로 잘하셔야 할 텐데….”

은증왕은 병을 얻어 도학 선생의 치료를 받는 중이라 중경에는 당장 갈 수 없다.

그리 밀고 나가기로 입을 맞추었다. 심지어 도학 선생까지 말을 거들어 주겠다며 가담했으니 단순하면서도 참으로 만족스러운 계획이었다.

무흔의 얼굴이 원체 보통 사람보다 희니 표기장군이 그를 본다 해도 건강 여부를 판단하기 쉽지 않을 터였다.

문제는 윤의 상태였다.

사당을 찾아 이능력을 쓰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왔다는 사실을 털어놓을 때까지만 해도 간질간질할 정도로 설렘과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난데없이 축 처져서는 은증왕과 관련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을 얼핏 훔쳐 듣긴 했다.

나를 싫어하나, 라고.

사평은 한숨을 푹 쉬며 걸음을 옮겼다. 이틀 후에 출발이라고 하면, 오늘은 짐을 싸고 동행해야 할 인원을 추리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꽉 찰 게 분명했다.

*

아휘가 무흔을 데리고 온 곳은 정말로 고요했다. 사평과 한 번 와 본 적이 있던 그 정자 뒤쪽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올라가니 사람 하나 앉아 쉴 만한 바위가 있었다.

“이곳이 어떠하십니까?”

“아주 좋구나. 정자는 가 본 적이 있었는데, 뒤쪽으로 이런 곳이 다 있을 줄이야.”

“경치는 볼 것 하나 없지만, 눈을 감고 명상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지요. 저는 이만 내려가 먹을 것을 가져오겠습니다. 혼자 계셔도 괜찮으시겠어요?”

“눈 감고 가만히 앉아만 있는 건데 뭘. 괜찮다. 다녀오거라.”

홀로 남은 무흔은 명상에 실패했다. 끊임없는 잡생각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그 실체는 당연하게도 윤이었다.

웃는 얼굴, 놀란 얼굴, 화를 내던 얼굴, 당황한 얼굴, 그러한 온갖 표정들이 머릿속에서 내가 먼저다 하며 경쟁적으로 튀어 오르고 있었다.

“망할, 주 국공 같으니라고….”

두 손으로 뺨을 감싸고서는 생각을 떨쳐내 보려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다시 마음을 차분히 했다.

이번에는 바람소리, 새소리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잡념을 버리고 자연의 소리에 몸을 맡기자, 졸졸졸졸 물소리가 귀에 흘러 들어왔다.

‘폭포에 가면 저보다 몇십 배는 더 우렁찬 물소리가 들리겠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엄청난 박력이 느껴진다던데, 정말 그럴까? 주 국공에게 데려가 달라… 아악! 안 돼!’

눈을 번쩍 떴다. 산은 궁금했지만 윤을 마주할 수는 없었다. 그가 폭포와 온천에 데려다주면 헤벌레해서는 넋을 놓고 좋다 할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명상은 글러 먹었다.

그 대신 지인 제어 수련을 해 보기로 했다. 어차피 떨칠 수 없는 상념이라면 철저하게 관련이 있는 것을 행함으로써 집중의 대상을 옮겨보려는 것이었다.

“열었다. 닫았다… 열었다… 닫았다.”

보이지 않는 것, 무형의 것을 심상화하여 훈련하는 것은 제법 효과가 좋았다. 예전보다 확실히 속도가 붙어서 이젠 제법 제어가 수월해졌다.

구멍이 열렸다 닫혔다 하는 것을 떠올리다 문득, 발 지압을 받던 순간을 떠올렸다. 뒤꿈치, 맨 끝, 항문이라고 했다.

지금 이 순간 하필 거기가 왜 생각났을까.

무흔은 뺨은 물론이요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어서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생각해보니, 윤 앞에서 저리 소리 내어 말한 적이 있었다. 함께 산에 올랐던 날이었다. 상대가 어찌 생각했을지는 모르겠는데, 이제 와 문득 그게 그런 쪽으로 연결되는 건 무슨 조화인지.

“내 어찌 그런 고통과 공포의 행위를 지인의 제어에 동반하여 떠올린단 말인가!”

무흔은 벌떡 일어나서는 엉덩이를 털고 샛길을 내려왔다. 아휘가 밥을 먹자고 한 그 정자에 신을 벗고 올랐다.

예전에 사평과 차를 나눴던 곳이었다. 여전히 눈에 닿는 모든 것이 아름다웠고 성벽까지 다 보일 정도로 탁 트인 풍경이 훌륭했다.

“성을 나갔다더니, 이제 들어오나 보네?”

성문이 열리고 긴 일행이 들어오고 있었다. 새끼손톱만 한 얼굴이었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행렬 맨 앞에 있는 자는 윤이었다.

‘멀리서나마 보니 좋다. 어제 못 만났잖아.’

‘좋아? 좋으면 곤란하지. 또 몸이 반응하려고?’

무흔은 머릿속에서 대립각을 세워대는 소리에 당황했다. 얼른 윤 쪽에 등을 지고 휙 돌아앉았다. 그날의 일을 떠올리니 다시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어? 벌써 내려오셨습니까?”

한 손에는 4단 찬합을, 다른 한 손에는 수통을 들고 올라오던 아휘가 무흔을 보고 놀라 달려왔다.

“너야말로 벌써 음식을 이리 챙겨온 것이냐?”

“예, 주방이 떠들썩합니다. 요리를 산더미처럼 해 놓았기에 은증왕께서 잘 드시는 것으로 골라 담아달라고 했더니 이리 바로 주었습니다.”

“오늘 성에 손님이 오나 보지?”

아휘는 열심히 찬합을 열어 펼치고 무흔에게 젓가락을 올렸다.

“잘은 모르겠습니다. 높은 분인 것 같아요. 얼핏 무슨 장군이라 하는 이야기를 나오다가 들었습니다.”

“주 국공이 마중을 나갈 정도로 높은 장군?”

“그건 아닐 텐데요. 황족이 아니고서는 마중 나갈 일이 없으신데. 아니다. 황족이시라 해도 성 밖으로 나가시진 않습니다. 저번에 이모님 되시는 분께서 오셨을 때는 문 앞에서 맞이하셨어요.”

“이모님이면, 설하의 모친이신가?”

“예. 아! 아마도 오늘 오신 장군은….”

아휘는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이야기를 하려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재빨리 젓가락을 놀려 맛있게 구워진 새우를 한 점 집어 무흔에게 내밀었다.

“드셔보시겠습니까? 아까 주방에서 새우구이를 극찬하더라구요. 재료가 워낙 훌륭하여 다른 양념이 필요 없다 합니다.”

“어… 그래.”

무흔은 일단 아휘가 내미는 것을 얼른 받아먹었다. 그리하긴 했으나, 이 영민하다는 아이가 짐작한 내용이 무엇인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목도 마르시죠? 여기 수통이 있습니다. 하하, 차도 들고 오려 했는데 손이 모자라서…. 이따가 주방에서 차를 우려 여기로 가져다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래, 헌데 아까 하려던 얘긴 무엇이냐?”

“그것이….”

“괜찮다. 말해보거라.”

“분명 장사 나리나 성주님께서 추후에 말씀이 있으실 터인데 제가 괜히 설레발을 쳤다가 상황이 꼬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음… 그럼 네 아니요로 대답하거라. 혹 황궁에서 전령이 온 것이냐?”

난감해하며, 아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으로 여겨집니다. 은증왕께서도 그리 짐작하셨습니까?”

“이제 슬슬 희로국에 간 사신단에게서 답이 올 때가 되지 않았겠느냐. 내 일인데, 당연히 신경 쓰고 있어야지.”

“염려 마십시오. 성주님께서 어떻게든 방도를 찾으실 것입니다.”

일이 잘못되면 정말로 희로국에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자, 무흔은 입맛이 뚝 떨어졌다.

새우를 한 점 더 먹으려 했는데 과연 방금과 똑같은 맛일지. 탱글탱글한 몸통이 씹고 나면 모래알이 되는 건 아닌지.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얘길 꺼내서… 어?”

아휘가 말을 멈추고 무흔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사평이 올라오고 있었다.

“은증왕을 뵙습니다.”

무흔은 내심 잘됐다 하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아휘가 열심히 들고 올라온 것을 그만 먹겠다 하는 것이 미안하던 차였다.

“내 지금 주 국공과 성문으로 들어오는 일행을 보았네. 혹 사신단과 관련한 소식이 도착했나?”

“그렇습니다. 저는 이를 은증왕께 전해드리기 위해 급히 이리로 오른 터라 내용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사평은 일부러 사실을 감췄다. 좋은 소식을 윤의 입으로 듣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지금 당장 내려가 봐야겠네!”

“제가 모시겠습니다.”

다급히 찬합을 정리하는 아휘를 향해 사평이 여유 있게 하라는 눈짓을 보내고는 얼른 무흔 뒤를 따랐다.

“당부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황제의 전령이 가져온 소식이 어떤 내용일지 알 수가 없는지라, 성주님께서는 그 내용에 따라 전령에게 다르게 대응하기로 하셨습니다.”

“어떻게?”

“일단은 은증왕께서 몸이 심히 아파 먼길을 떠나기는 힘들 것이라 해 둘 것입니다. 도학 선생께 말씀을 드렸더니 흔쾌히 협조해 주신다 하셨습니다.”

“앓아눕는 정도로 되겠는가?”

“혹시 몰라 일단 밑밥을 까는 것이니 은증왕께서는 지금 처소에 드시어 누워 계시면 됩니다. 성주님께서 조서를 받드시는 대로 은증왕께 바로 가신다 하셨습니다.”

“혹시 최악의 경우… 정말 방도가 없겠는가?”

사평은 회심의 한 수를 준비해 두었다. 무흔으로 하여금 성주에게 호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최고의 패, 그것을 꺼내 들 절호의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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