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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65화 (65/85)

#065화

무흔은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며 달렸다. 혹 윤이 따라오는 것은 아닌가 하여.

다행스럽게도 무흔의 뒤를 쫓는 이는 없었다. 아니, 무흔은 숨어서 저를 경호하는 이들을 눈치채지 못했다.

“오늘은 무슨 날인가? 무슨 등을 저리 걸어뒀대.”

서가에서부터 처소에 이르기까지의 담벼락과 나무에는 밝은 등이 군데군데 걸려 있었다. 혹 무흔이 혼자 돌아갈 것을 염려한 윤의 지시였다.

숨을 고르며 달려온 무흔은 일단 침실로 쏙 들어가 걸쇠를 찾아 방의 문부터 걸었다.

“끔찍해! 이건 말도 안 되잖아!”

무흔은 그대로 침대 위에 엎어져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자기혐오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사내를 상대로 마음이야 설렐 수 있는 일이었다.

그것이 우정 혹은 기대거나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될 수도 있고, 볼 때마다 반갑거나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지금의 자신처럼, 날 특별하게 여겨 주기를 바라는 마음. 내가 이러한 만큼 상대도 그러하기를 바라는 두근거림. 그렇지 않은 것을 알았을 때의 서글픔. 그래도 버릴 수 없는 기대감.

무흔은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몸은 얘기가 달랐다.

그토록 혐오해왔던 것이 바로 사내와 육체적 관계였는데. 제 쪽에서 먼저 사내를 상대로 욕정이 동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이건 잘못된 거야.”

건원국. 사내가 사내를 취함에 있어 거리낌이 없는 나라.

이 나라에 와서 이 나라의 음식을 먹고 이 나라의 옷을 입고 또 이 나라의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그 모든 것이 제게 영향을 끼친 게 분명했다.

“이능력자와 치유자의 접촉이 교합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은 있으나, 그것은 치유자 쪽이 아니라 이능력자 쪽이라 했어.”

아까 읽었던 내용을 떠올린 무흔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면 족혈(足穴)이었다.

“발을 만지게 두는 게 아니었어. 남이야 뛰어난 안마사니까 지압을 받는 자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뭔가를 조절했을 거야. 책에도 써 있었잖아? 지압을 받는 자의 상태에 따라 손의 세기를 달리해야 한다고.”

책에서 봤던 발 그림과 설명을 떠올렸다. 발뒤꿈치 안쪽 말고도 생식기에 해당하는 부분은 또 있었다.

다리를 접어 앉아 제 발을 들여다보고 또 꾹꾹 눌러보았다.

“엄지 발가락에 대돈혈(大敦穴), 거기도 생식기와 관련이 있댔지. 하아, 하지만 거긴 머리가 맑아지고 눈을 밝게 한댔는데 아까 내 상태는 머리가 맑아지는 것과는 정반대였잖아.”

무흔은 발목 안쪽 복사뼈에서 손가락 세 마디만큼 위에 자리한 지점을 엄지로 꾹꾹 눌러보았다. 제 손에서는 몸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있었다.

“삼음교혈(三陰交穴), 여기가 가능성이 높지. 서지 않는 자를 서게 만든다고 했는데, 그럼 멀쩡한 나를 서게 만들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 국공이 아까 여길 눌렀던가 아닌가 그리 중얼중얼거리며 서성이던 무흔은 방을 밝히는 불을 하나하나 다 꺼 버렸다.

‘이리 컴컴하면 저쪽에선 내가 자는 줄 알겠지. 그럼 일단 당장은 찾아오지 않을 거야.’

일단 침대에 드러누워 이불을 덮었다. 잠은 조금도 오지 않았지만, 어쨌든 자긴 자게 될 테니까.

읽고 또 읽었던, 발과 생식기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 번 곱씹었다. 대돈이나 삼음교뿐만이 아니었다.

“태계혈, 곤륜혈, 용천혈, 전부 다. 아니 발에 뭐가 그리 많아?”

투덜거려보았지만 이런 연구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무흔은 알고 있었다.

“저런 데를 눌러서 거기가 설 것 같았으면… 남이는 백 번이나 서게 만들었을 거야.”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떻게든 이 결론에서 도망가려 했지만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윤의 손길에 제 몸이 반응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주윤, 위험한 자다.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과 마음을 흐트러뜨리며, 이제는 몸까지… 멀리해야 해.”

이 효명성 안에서, 그의 처소에 딸린 이 별당에 거처하면서 그를 만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방법이 대체 무엇인지. 무흔은 막막해졌다.

*

늦게 잠들었으니 늦게 깨는 것이 당연했다.

무흔은 눈을 뜨자마자 창문을 살그머니 열어 마당 건너편의 동태를 살폈다.

혹 저번처럼 마당의 대자리를 펴 놓은 곳에 윤이 자리 잡고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곳은 비어 있었다.

다행이다, 그리 생각하는 순간 아쉬웠다.

‘응? 내가 왜 아쉬워? 그 인간 얼굴 좀 그 자리에 없는 게 뭐가 아쉽다고!’

무흔은 성을 내며 창을 쿵 닫아버렸다. 손목에서 금사슬 소리가 찰랑, 하고 경쾌하게 울렸건만 마음은 조금도 경쾌하지 못했다.

“깨어나셨습니까?”

처음 듣는 목소리가 마루 쪽에서 울렸다. 무흔은 누구지, 그리 중얼거리며 방 밖으로 나왔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저는 오늘부터 은증왕을 모시게 된 아휘라고 합니다.”

생글생글 웃으며 서 있는 소년은 열일곱 정도 되어 보였다. 오며 가며 본채 근방에서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아, 주 국공이 내게 시종을 붙여준다 했었지.”

“예, 제게 중책을 맡겨 주셔서 정말 기쁩니다.”

“중책이라? 감시를 말하는 것인가.”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라 하는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성주님께서는 그저 매사 은증왕께 불편함이 없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흠.”

무흔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눈앞의 소년을 뜯어보았다.

낯빛과 목소리가 맑고 이목구비는 붓으로 그린 듯이 단정하며 눈에는 총기가 그득했다. 똘망똘망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뭐, 감시야 이 성안의 모두가 하고 있으니 딱히 하나 더 는다고 하여 문제 될 거 있겠어? 그래, 잘 부탁한다.”

“성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세안하실 물을 올릴까요?”

“좋지.”

가지러 나갔다 오겠거니, 생각했는데. 이미 물이 반 정도 찰랑이는 대야가 놓여 있었다.

“그동안 물을 가져다 드렸던 이들에게 물어보니 따뜻한 물을 선호하신다 하더군요.”

아휘는 주둥이가 긴 자기 주전자를 도톰한 면포로 감싸 들고, 뜨거운 물을 조심스레 대야에 섞었다.

“이 정도 온도면 괜찮은지 봐 주시겠습니까?”

무흔은 손가락을 넣어 물을 살며시 저어보았다.

“딱 알맞고 좋아. 고마워.”

그동안은 시종들이 그저 물을 가져다준 것이 끝이었는데. 아휘는 무흔의 얼굴을 꼼꼼하게 닦아주고 머리까지 곱게 빗어 주기 시작했다.

“넌 그동안 주 국공의 시중을 들었느냐?”

“예, 어릴 땐 그랬고 커서는 성주님의 심부름을 하는 전령 시종을 맡았습니다.”

“넌 내 얼굴이니 손이니 만지는 것이 아무렇지 않아?”

“저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저주가 정말 있다면 벌써 성주님께서는 큰 고변을 당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아이고.”

무흔의 등 뒤에 선 아휘는 거울에 너머의 무흔과 눈을 맞추며 해맑게 웃었다.

“은증왕께선 참으로 고우십니다. 기악에도 능하시고, 서책도 엄청 많이 읽으셨다 들었어요.”

“그렇단다.”

“저도 악기와 서책을 좋아합니다. 그런 연유로 성주님께서 저를 딱 골라 은증왕의 시중을 들라 해 주신 것 같아요.”

“넌 중요한 일 하다가 나한테 오게 된 게 싫지 않아?”

“무슨 말씀이세요. 다들 부러워하는걸요?”

말을 참 예쁘게 하네. 무흔은 그리 생각하며 포근하게 웃어주었다.

“저는 물을 치우고 오겠습니다.”

“그래. 아! 잠깐!”

“예?”

“혹시, 발 지압 해 본 적 있나? 아니, 그럴 필요까지도 없지. 그 물 이리로 가져와 봐.”

무흔은 어제 윤이 제 발을 만졌던 그 자리에 앉아 아휘에게 이리 오라며 손짓을 했다.

그가 무흔의 발밑에 조심조심 대야를 내려놓고는 얼른 뜨거운 물을 더 가져다 부었다.

“안마사를 불러올까요?”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무흔은 얼른 하의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따뜻한 물에 발을 담갔다.

“지압을 받고자 하는 게 아니라 확인을 해 보고 싶은 거야. 내 발바닥에 움푹 들어간 곳을 눌러볼래?”

“용천 말씀이십니까?”

“오, 아는구나?”

“여기지요?”

“응, 꾹꾹 눌러봐.”

아휘의 손힘이 남이나 윤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손끝이 여문 편이었다.

“잘했어, 그다음엔 음. 그 엄지발톱 바로 아래 안쪽으로, 응. 거기, 거기야.”

“대돈혈의 위치를 알고 있습니다.”

“의서를 읽었느냐?”

“예, 의원이 되고 싶거든요. 혈의 위치와 이름, 효능은 다 외우고 있습니다.”

“대단하다. 허면 삼음교와 태계혈도 이어서 눌러보거라.”

아휘가 정확한 위치를 찾아 꾹꾹 힘을 주어 눌렀다.

무흔은 제 몸이 어제처럼 반응하는지에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아휘 또한 남이의 경우와 마찬가지였다.

“하아.”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뱉었는데, 아휘가 그것을 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쭤보아도 될지 모르겠는데… 은증왕께서 누르라 명하신 용천, 대돈, 삼음교, 태계 모두 양물과 관련된 혈자리입니다. 혹 그곳에 문제가 생겨 고민하시는 겁니까?”

윤이 분명 그랬다. 영민한 자를 시종으로 보내겠다고. 무흔은 지금 이 순간 그 말이 퍼뜩 떠올랐다.

“아니야! 아니야, 절대. 그 반대라서 해 보라고 한 것이다.”

“그 반대요?”

아휘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솟을 기미조차 없는 무흔의 다리 사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아. 설명하기 복잡하구나. 얘기가 길고. 어쨌든 나는 확인해 보아야 할 것을 확인했으니 됐다. 이만 물을 치우거라.”

“예, 그리하겠습니다.”

무흔은 확실히 결론을 내렸다. 간밤의 일은 족혈의 문제가 아닌 윤으로 인한 것임이 분명했다.

“하아아아.”

무흔이 한숨을 아주 길게 뱉었다.

땅이 꺼질 듯한 소리에 아휘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는 척은 하지 않았다. 양물에 대한 고민은 모르는 척하는 것이라고, 선배들에게 그리 배웠다.

아휘가 대야와 주전자를 정리하고 돌아왔을 때, 무흔은 신발을 신는 중이었다.

“출타하시게요?”

“응. 내 출입이 허가되지 않은 곳의 목록은 받았느냐?”

“예, 다 외워두었습니다.”

“훌륭하구나. 그럼 인적이 드물고 기가 잘 통하며 고요하여 내가 명상을 할 수 있는 곳을 추천해줄 수 있겠느냐?”

“음. 그런 곳이라면… 은증왕께서 가실 수 있는 구역에서는 딱 한 군데밖에 없습니다.”

“가는 길에 주 국공을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는데.”

“성주님께서는 성 밖으로 출타하셨습니다. 은증왕께선 맘 편히 다니실 수 있어요. 헌데, 식사를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윤의 일이 머리를 짓누른 탓에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제야 공복임을 깨달았다.

“내 그곳에서 수련하고 있을 테니 너는 가서 찬합에 먹을 것을 싸 오면 어떠하겠느냐?”

“소풍 분위기가 나겠어요. 그 옆에 정자가 있으니 그곳에서 드시면 되겠습니다. 가시지요.”

몸을 다스릴 수 없다면 영과 혼을 맑게 하여 윤을 밀어내겠다. 무흔은 그리 다짐했다.

그 시각, 윤은 예법에 따라 황제의 전령을 맞이하기 위해 성문 밖 공관에 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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