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믿을 수 없다는 듯, 무흔은 뒤로 한 걸음 빠지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설마… 그 안에 든 게?”
“온수보다 향유가 좋다며?”
무흔은 버럭 화부터 내질렀다.
“내 즐거움을 그리 앗아가야 속이 시원한가?!”
“난 잘 못 할 거라 여기는 거야?”
“이거 보세요. 그쪽은 국공이야. 성주고. 평생 이런 걸 받아만 봤지 해 주는 쪽이 아니라고. 모든 일엔 다 전문가가 있는 법이거늘.”
“이리 와. 앉아 봐.”
윤이 손을 휘둘러 무흔의 발목에 아직도 걸려 있는 황금의 발찌를 잘라냈다.
툴툴대던 무흔은 그제야 가뿐해진 발로 윤을 향해 걸었다.
“기대는 안 하겠어. 대신 주 국공이 엉망으로 하면, 다시 남이를 불러준다고 약조해.”
“지금, 안마사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른 것인가?”
“다정? 아니, 사람이 이름이 있는데, 그럼 이름을 부르지 언제까지 사람 면전에 두고 안마사 안마사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 간밤에 남이에게 비법을 전수받았으니 기대해도 좋아.”
윤이 발에 손을 대려는 순간, 무흔이 냉큼 의자 아래로 발을 거두었다.
“왜?”
“잠시만. 지인의 제어를 해야지.”
“아, 그래야지. 내게 힘이 흘러나갔다간 오히려 그대가 피곤해질 것이야.”
“하아, 이미 피곤해. 가만히 온몸의 기운을 쪽 빼고 등 기대고 앉아서 아무 생각 없이 지압을 받는 게 얼마나 편한지 아나? 지압을 받는 내내 제어를 해야 한다니, 원.”
“제어가 익숙해지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이야. 이 기회에 연습을 더 하면 좋지 뭘 그러나. 연습 상대는 나뿐인데.”
무흔은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직은 자연스레 제어를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지라, 고요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시작해야만 했다.
“자, 이제 됐어. 시작해 봐.”
제어도 제어이지만, 무흔은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어제 종일 얼굴을 보지 못하여 그런지, 오늘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이 심장을 더 콩닥거리게 만들었다.
“아….”
시작부터, 무흔은 작은 신음을 터뜨렸다.
마구잡이로 발을 쥐고 주물럭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윤이 제법 지압을 하는 자다운 손놀림을 보이는 게 아닌가.
“어때?”
“이제 시작인데 뭘. 발이 으스러지지 않는 건 다행이네.”
“어제 아이들과 응방에 갔다지?”
“와. 새끼 매가 그렇게나 작을 줄이야. 주 국공의 매는 엄청 크고 무시무시하지 않나. 근데 설하의 매는 병아리보다 조금 더 크더군?”
“병아리는 본 적이 있고?”
“저번에 송아지가 태어나던 날, 닭과 병아리도 보았어. 으…응.”
말끝에 묘하게 붙는 신음소리에, 무흔의 발만 집요하게 바라보며 지압을 하던 윤이 고개를 들었다.
눈에 묘한 기운이 돌더니만 윤은 볼이 미어져라 미소를 띠고는 다시 지압에 열중했다.
“그, 그, 매들이 많더구먼. 주 국공의 매만큼 크고 시커먼 매의 발목에다 뭔가를 감아서 날려 보내는 것도 보았지.”
순식간에 뺨이 화끈 달아오른 무흔은 얼른 응방에서의 일을 이야기했다.
무흔이 이야기하는 검은 매는 황제의 전령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달고 온 매였다. 하루 푹 쉬고, 배불리 먹고, 황궁으로 돌아가는 것을 무흔이 본 모양이었다.
“그 매는 무슨 소식을 어디로 가져가는 것인가?”
“성주라고 해서 이 성의 자잘한 일까지 다 알지는 못해. 사평은 알겠지.”
윤은 일단 모르는 척 잡아떼었다. 전령의 가져온 조서의 내용을 보고, 대책을 세운 후에 무흔에게 전달할 생각이었다.
“매를 길들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닌가 보더군. 설하가 직접 아침저녁으로 매에게 먹이를 주고 시도 때도 없이 붙어 있다 하던데.”
“응. 설하의 매는 그래야 할 시기야.”
“하늘을 나는 매가 참 부러웠었는데… 거기 그리 새들이 길들여져 갇힌 것을 보니 어쩐지 안쓰러웠어. 날 보는 것 같, 읏, 으응….”
난데없는 감정이입으로 분위기가 가라앉으려는 찰나, 무흔의 입술 사이로 녹아내릴 듯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여기 만져주는 게 좋은가 봐?”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그럼 여긴 하지 마? 아니면 더 해줘?”
“…묻지 마.”
윤이 웃음을 참으며 다시 복숭아뼈 아래쪽과 발등을 길게 누르고 지나갔다.
무흔은 소리를 내지 않으려 참는 것 이외에, 하나의 요소가 더 튀어나오려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를 악물었다.
‘이상해. 남이 그자가 안마를 해 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주 국공이 만질 때는 왜 이리 내 몸이 달아오르지?’
무흔은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윤의 손놀림을 유심히 눈에 담았다. 분명 남이가 해 줄 때와는 다른 무언가가 자신의 내밀한 욕구를 자극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주 국공 이자가 혹 사술을 배워온 것이 아닐까? 손놀림은 남이가 훨씬 더 능숙해 보이는데. 저 어설픈 손놀림에 뭔가 감추고 있는 거야? 아니면, 혹시?
무흔은 순간 스친 의혹을 바로 풀어보기로 했다.
“그 향유는 성분이 뭐야?”
“나도 모르겠는데. 방금 남이가 들고 오는 것을 가로채서 내가 들고 왔거든.”
“사실인가?”
“이리 소소한 것에까지 의문을 품나? 왜?”
“아니 뭐… 그냥, 궁금했어.”
“염려 마시게. 효명성에서 쓰는 향유는 모두 하온의 감독하에 만들어지는 것이야.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그 녀석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제작하는 물건이라고.”
그때부터였다. 무흔의 말이 없어졌다. 아까는 미약하게나마 간간이 신음도 흘리고 했었는데, 어느덧 침묵의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배운 것을 떠올리며 지압에 열중하던 윤은 오기가 생겨 더 혼신을 다해 무흔의 발과 발목, 그리고 종아리에까지 정성을 쏟아 넣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윤이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던 차에, 정화의 기운이 살결을 타고 넘어오기 시작했다.
“은증왕, 괜찮은 거야? 지인 제어가 안 돼?”
무흔은 뺨과 귀가 달아오른 채로 이를 악물고 손목에 채워진 금사슬을 으스러져라 꽉 쥐고 있었다.
“내가 너무 아프게 누른 건가? 참지 말고 말을 하지 그랬어.”
“그, 그러게. 그만 받을래. 고마웠어. 어… 응방 출입을 허가해 준 것도 고맙고, 어… 나는 그만 좀 쉴게.”
무흔은 슬그머니 다리를 꼬고 앉았다. 꼬은 허벅다리 사이에 단단하게 선 것을 끼워 넣어 일단 당혹스런 사태를 가려보았다.
“낯빛이 안 좋은데, 내가 혹 혈자리를 잘못 건드린 건가? 도학 선생을 불러줘? 아님 하온이 편하겠어?”
“아, 아니야. 괜찮아. 요 며칠 너무 과하게 산책을 다녔더니 몸이 피곤해서 그런 거겠지.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
“가서 누워.”
윤이 무흔의 몸을 일으켜주려 팔을 내밀자, 무흔은 손목에서 찰랑찰랑 사슬 부딪히는 소리가 나도록 두 손을 저어댔다.
“아니야, 아니야, 어우, 아니야. 주 국공 먼저 가셔야지. 나는 배웅하고, 그런 후에 눕도록 하겠어.”
무흔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아무래도 걱정이 된 윤이 무흔의 이마로 손을 뻗었다.
“괜찮다니까. 그만 가. 아이고, 밤이 이렇게 깊었네. 주 국공도 쉬어야지.”
무흔은 윤이 제 이마를 만지지 못하도록 열심히 도리질을 치며 당황에 겨운 말을 쏟아냈다.
벌떡 일어나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아직 다리 사이에 피가 쏠린 것이 정상화되지 않은지라.
무흔은 그것을 가라앉히기 위해 허벅다리 안쪽에 힘을 주어 스스로 통증을 가했다.
“괜찮은 게 아닌 것 같은데? 지금 표정이 엄청 아파 보인다고.”
그 걱정스런 목소리에 무흔의 신경질이 가중되었다. 화를 내면 윤이 저를 달래주려 더 머물 것만 같아, 최대한 간절하게 말해보기로 했다.
“제발… 나가주겠는가.”
그제야 윤이 한 발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지. 허면 내일… 새벽에 나와 산에 같이 오를까?”
“아니, 아니야. 내일은 푹 쉴 생각이야. 다음에 가지.”
윤은 나무함에 향유병을 챙겨 넣다 말고 여전히 의자에서 꼼짝도 않는 무흔을 올려다보았다. 확실히 어딘가 이상했다.
은증왕이 온천과 폭포를 마다할 리가?
“하아아아.”
무흔이 긴 한숨을 내쉬고는 꼬아 앉은 다리를 천천히 풀었다. 그러더니 의자에서 흘러내리듯이 누워서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은증왕, 내 지금 당장 의원을 불러올 것이니 쉬고 있어.”
윤이 다급히 나무함을 들고 무흔의 처소를 나섰다. 그의 발걸음이 마당을 요란하게 지나 본채로 향해 더는 소리가 나지 않자, 무흔은 그제야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
내가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아니, 내가 사내의 손길에 육욕이 동하다니!
발정을 했어! 내 것이 서고, 몸이 배배 꼬일 정도로 흥분을 하였다!
무흔은 간신히 가라앉힌 아랫도리를 내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리 없다 부정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도 안 돼… 내가… 내가 어찌 사내를 상대로….”
무흔은 정신없이 경대를 열어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뺨이 달아오른 것은 물론이요, 귀까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까는 침조차 바짝 말랐었다.
“이럴 수는 없어. 이건 잘못된 거다. 뭐가 문제였지? 남이가 지압을 해 줬을 땐 시원하고 좋기만 했어. 주 국공의 지압은 대체 어디가 어떻게 달랐기에!”
윤이 의원을 부른다 했으나, 이건 의원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의원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는 문제였다.
“남이가 그랬어. 발뒤꿈치 안쪽 혈자리는 생식기랬지. 그래, 주 국공이 거길 누른 거야. 그래서….”
그리 중얼거리다 말고 무흔은 다시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야, 아니야. 남이가 뒤꿈치 언저리를 누른 게 한두 번이던가. 주 국공 때와는 달랐어. 평온했다고!”
좌우로 정신없이 서성이던 무흔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스쳤는지 냉큼 신발부터 신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가 도착한 곳은 불타 버린 예전 처소 옆에 자리한 서가였다.
이능력자와 치유자에 대한 책부터 빠르게 챙기고, 그다음으로는 발의 혈자리와 시침, 지압에 관한 내용이 담긴 의서를 뒤졌다.
“찾았다!”
처소로 돌아갈 마음의 여유 따위는 없었다. 무흔은 서가 한쪽에 줄줄이 놓인 책상 앞에 자리를 잡았다.
초가 다 닳은 탓에 서고 관리자가 와서 새 초를 갈아주어야 했을 정도로 긴 시간 동안 그 자리에 뿌리내린 듯 앉아 책을 읽어 내려갔다.
이능력자와 치유자에 대한 책은 발현 이후부터 닳도록 읽었던 터라 내용을 확인하는 선에서 그칠 수 있었지만, 의서는 아니었다.
발바닥과 발가락의 혈자리, 그리고 지압의 효능에 대해 샅샅이 살피고 집요하게 파고들었으나 무흔은 어느 책에서도 원하는 답을 찾지 못했다.
“하아, 젠장.”
책을 덮고 일어나려는데, 구석에 놓인 책상에 자리한 자가 무흔을 따라 일어났다.
“무슨 책을 그리 열심히 읽으시는가. 사람이 온 것도 모르고.”
윤의 목소리임을 깨달은 순간, 이상할 정도로 심장이 나대고 몸이 떨렸다.
“헉!”
제 상태에 소스라치게 놀란 무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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