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63화 (63/85)

#063화

무흔은 제게 뚫어져라 박히는 윤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너무 과한지라,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저 멀리 사라져가는 반딧불이만 계속 구경하는 척하며 몸을 꿈틀거렸다.

긴장감이 영 풀리질 않아, 술병을 냅다 입으로 가져가 벌컥벌컥 들이켰다.

“은증왕.”

“응?”

“희로국으로 돌아가지 않게 된다면, 뭘 제일 먼저 하고 싶나?”

“나가고 싶어.”

짧은 답이었지만, 순간 윤은 제 질문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가슴이 철렁했지만 한 발 늦었다. 무흔의 입에서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벽제성에서 냉궁의 문을 나섰을 때, 벽제성에서 벗어났을 때, 효명성에 와 감옥 문을 나섰을 때, 처소에 갇혀 있다 처음 마당으로 나왔을 때… 그리고 오늘처럼 나 혼자서, 감시하는 이 하나 없이 홀로 나올 때… 전부 매 순간이 달랐어.”

무흔은 주변을 둘러보며 약간은 격앙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의 세상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지. 길을 걷고, 산에 오르고, 이렇게 밤의 호수를 보고… 전부 그대에겐 흔한 일상이라 할 것이나, 나에겐 새로움이야.”

술을 한 모금 더 들이켜고, 무흔은 병을 윤에게로 넘겼다. 그쪽도 한 잔 하라는 식으로 술병을 들어 입으로 기울이는 시늉을 해 보였다.

예의상 입술만 살짝 술로 적시려던 윤은 흠칫 놀랐다. 마지막 한 모금 정도만 남아 있다는 건, 이 한 병을 무흔이 아까부터 여기 서 있는 동안 홀짝홀짝 다 마셔 버렸다는 소리였다.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이 뭐냐 물었지? 나는 제일 먼저, 이 성을 나가보고 싶어.”

길게 하늘을 돌아 어느덧 되돌아온 반딧불이의 빛에 무흔의 표정이 살짝 드러났다.

절대로 이루어질 리 없다 여기는 허망한 꿈, 그것을 읊는 무흔의 얼굴에 희망 따위는 없었다.

윤은 그 앞에서 무슨 말을 어찌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최대한 화제를 다시 제 손이 닿는 곳으로 끌고 와야만 했다.

“산에도 가야지.”

“산도 좋고 바다도 좋아. 그래, 강이나 계곡, 폭포 모두 마찬가지야. 모두 알고 싶어. 그런데 더 궁금한 건 사람들이 사는 곳이야.”

무흔은 술병을 빼앗아 탈탈 털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셔 버렸다. 빈 병을 윤의 품에 내던지듯 쥐여주고, 무흔은 걷기 시작했다.

걱정이 된 윤은 냉큼 곁으로 따라붙었다.

“시끌벅적한 시장도 가 보고, 평범한 백성들이 사는 거리도 구경해보고 싶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내가 이런 몰골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살아갈 수 있는지, 그게 궁금하긴 한데… 그건 불가능하겠지.”

“몰골이라니.”

“저주를 떠안고 태어났지. 허옇고 다르잖아? 그게 딱히 좋아 보이진 않을 테지. 그대도 마찬가지면서 뭘. 그럴 거면 처음엔 잘해주질 말든가.”

무흔이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되돌려야 할지. 윤은 당황하여 머리가 백지가 되어 버렸다.

“술이 좀 취한다. 그치이이?”

무흔이 말끝을 늘이더니, 걸음걸이가 좌우로 조금씩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발목 사이의 사슬이 아무래도 불안한지라, 윤은 손짓 한 번으로 사슬의 좌우를 뚝 떼어내 제 손으로 옮겨 쥐었다.

무흔은 순간 두 발이 자유로워진 것을 느끼고는 윤에게로 홱 몸을 돌렸다.

“어? 왜애?”

“걷는 게 엉망이야. 이러다 넘어져.”

“주 국공, 저어기 활쏘기 훈련하는 데나 가 봐. 성주님께서 그런 데 납실 시간에 왜 날 감시하고 있어? 알아서 별당까지 잘 기어갈 테니까 관심 끄세요. 흥!”

난데없이 코웃음을 치고, 무흔이 책을 꼭 끌어안더니 처소 방향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나갔다.

“아하하!”

취기가 한순간에 올랐는지, 무흔은 바람을 가르고 달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윤이 비밀리에 감시를 붙인 정예부대원 둘이 기척을 죽인 채로 무흔을 쫓았다.

어떻게든 성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려 했는데, 그가 가장 원하는 건 나가는 거라니.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윤은 손에 들린 사슬만을 허망하게 내려다봤다.

*

다음 날 정오 즈음, 윤은 그림자처럼 무흔의 뒤를 밟은 정예부대원들의 보고를 받았다.

“간밤에 은증왕께서 술기운이 막판에 확 오르셨는지, 처소 출입문을 다섯 걸음 정도 남겨놓고는 고목 아래에 주저앉으셨습니다. 줄기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 버리신지라, 저희가 별당 침대에 눕혀드렸습니다.”

“오늘 아침엔 영 기상이 늦던데.”

“예, 술 때문인지 사시(巳時)가 지나고 나서야 기침하셨습니다. 숙영부인께서 꿀물을 올린 후 해장을 위한 식사를 들이셨고, 잘 드셨다고 합니다.”

윤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감돌았다.

“밤에 그리 잠들어 버렸으면, 어제는 발 지압을 받지 못했겠군?”

“예, 그래서 지금 받고 계신다 합니다.”

“뭐라?”

“식후 바로는 안마가 불가하다 하여, 은증왕께서 꼬박 반 시진을 기다리신 후 아주 반갑게 안마사를 맞이하시는 것을 보고 이리로 오는 길입니다.”

“음.”

“어제 너무 산책을 열렬히 다니신 터라 발이 많이 피곤하시긴 할 겁니다.”

“그래, 가서 쉬거라. 경호 교대는 잘하였지?”

“예, 주군. 염려 마십시오.”

그들이 나가자마자, 내내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평이 킬킬 웃으며 안으로 들었다.

“경호 맞습니까? 감시 아니고요?”

“뭐라?”

“자유롭게 산책을 해 준다 허락해 주셔 놓고서는, 이리 은증왕의 뒤통수를 치실 줄이야.”

“다치거나 혹 길을 잃을까 하여 저들로 하여금 드러나지 않게 살피라 한 것뿐이야.”

“예예.”

사평은 윤에게 자그마한 나무통을 내밀었다. 새끼손가락 굵기로, 금박을 입혔으며 붉은 실로 봉인되어 있었다.

“방금 황실의 매가 도착하였습니다.”

“이렇게나 빨리?”

“열어보십시오.”

대단한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황제의 명을 받들고 가는 전령이 곧 효명성에 도착할 것이라는 통지였다.

잔뜩 긴장했던 윤은 한숨을 내뱉어 버렸다.

“이상한 일이지요. 황제의 전령이 온다는 예고는 항상 비둘기가 달고 왔는데. 이번에는 매가 왔군요.”

“황제께서 급하신 건가.”

“은증왕만을 오라 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포로의 송환을 성주님께 맡겨, 두 분 다 중경으로 오라 할 것이 뻔하지요. 두 달 후, 태황태후마마 생신연 즈음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비둘기 대신 급하게 매를 보낸 것을 보니 날짜가 당겨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은증왕을 안 보낼 핑곗거리는 몇 가지나 되나?”

“중요한 것은 가짓수가 아니라 타당성이지요. 전령이 가지고 온 조서의 내용에 따라 맞춤으로 고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

“글로 정리하여 올릴 터이니, 그만 나가 보시지요.”

“응? 내가 어딜?”

윤은 시치미를 잡아뗐다.

“은증왕이 발 지압을 받고 있다 하지 않습니까. 그 안마사가 전신 지압이 가능한 자임을 은증왕이 알게 되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원치 않는 심상이 윤의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발 좀 꾹꾹 눌렀기로서니 녹아내릴 것 같은 소리를 내던 무흔이 떠오르자 절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되어버렸다.

“내가 지금 가서 지압을 멈추게 하면, 옹졸하니 속이 좁다는 소리를 또 듣게 되겠지?”

“지압은 이미 끝났겠지요. 이제 발 상태도 좋을 것이니 오늘은 선심 쓰듯 산에 데려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시장에 나갈까. 어제 은증왕이 그러더군. 사람들이 어찌 사는지가 궁금하다고.”

“아, 좋은 생각입니다. 신기하고 재밌는 걸 구경하고 간식도 사 먹고 하다 보면 크게 기뻐할 겁니다.”

둥둥둥둥.

성벽 쪽에서 북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정기 정찰을 마치고, 흑성부대가 돌아온 것이었다. 그 소식이 집무실에 바로 닿자, 사평은 윤을 토닥였다.

“시장은 내일 가셔야겠습니다.”

탁탁탁탁탁.

그때였다. 자그마하고 빠른 발소리가 복도를 울리며 가까워지고 있었다. 누구인지 충분히 예상되는 바였다.

“오라버니!”

설하가 들어와서는 윤과 사평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이어 조심스런 표정으로 눈치를 살짝 보며 운을 띄웠다.

“어제 은증왕께서 그러시는데, 이제 자유롭게 산책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응. 그렇단다.”

윤의 따뜻한 반응에 설하는 냉큼 오라버니의 팔뚝에 매달렸다.

“그럼, 응방에 같이 가도 돼?”

“가렴.”

“어, 그렇게 쉽게 허락해 주는 거야?”

“응?”

서로 의아한 눈빛을 교환하는 그들을 보며, 사평이 대신 나섰다.

“성주님께서 작성해주신 출입 불가 지역 목록에 제가 응방과 배추밭을 추가해 두었기에 아가씨께서 저리 물으시는 겁니다.”

“아….”

“실제로 은증왕께선 응방 뒤의 쪽문으로 탈출을 하려 하셨었지요.”

그 말에 설하의 얼굴이 삽시간에 울상으로 바뀌었다.

“그럼, 안 되는 거야?”

“아니야. 가서 재밌게 놀거라. 은증왕께서 이곳에 정을 붙이실 수 있게 좋은 구경을 많이 시켜드려.”

“우와! 고마워!”

설하는 윤을 꼭 끌어안고는 신이 나서 뛰쳐나갔다.

“요즘 매에 빠져 있다더니, 은증왕에게 자랑하고 싶은가 보군.”

“시장은 안 가십니까?”

“나는 어차피 흑성부대도 살펴야 하니 오늘은 무리이지. 그는 아마 나보다는 아이들과 노는 게 더 즐거울 수도 있어. 날 보면 자꾸 화를 내거든.”

“은증왕께서도 성주님께 좋은 의미로 관심이 있으시니까요. 그래서 부딪치시는 겁니다.”

“간신배 같은 해석을 하는구나.”

“응방을 허락하신 것은 매우 좋은 판단입니다. 은증왕이 아이들과 좋은 추억을 쌓으면, 그만큼 이곳에 정을 붙이는 것에도 도움이 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사평의 눈에 장난기가 휙 스쳐 지나갔다. 그가 웃음을 머금고는 말을 이었다.

“안마사의 지압을 받는 것도 권장할 만하겠습니다. 은증왕께서 그 맛을 잊지 못해 여길 뜨기 싫어하게 되실 테니까요.”

윤은 사평을 흘겨보고 일어나 흑성부대를 맞이하러 나섰지만, 몇 시진이 지나도록 그 말만큼은 뇌리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그날 밤, 윤은 무흔의 처소에서 나오는 안마사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였다.

*

다음 날 밤, 어김없이 안마사를 부른 무흔은 난데없이 등장한 윤을 보고는 대번에 난감해했다.

“어쩐 일로 이 밤에?”

“오면 안 되나?”

“안마사가 올 시간이라.”

좀 가 줬으면 좋겠는데,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편히 안마를 받고 싶었는데, 윤이 나타나면 그게 불가능했다. 소리 내는 걸 참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으니.

“오늘부터 그대의 발 지압은 내가 맡기로 했어.”

“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윤의 손에 들린 나무함을 바라보는 무흔의 표정이 경악에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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