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화
윤이 사평에게 건넨 것은 파격적인 내용이 담긴 산책 허가서였다.
“가져다주고, 반응을 좀 살펴봐 줘.”
“직접 가셔야지요.”
“간밤에 그와 좀… 일이 있었어.”
“마음먹은 대로 잘 안 되시더이까? 은증왕은 아무래도 희로국 사내이니. 동침하는 것에 거부가 심했나요?”
“그런 게 아니라, 하아… 내가 장고 끝에 악수를 둔 것 같아.”
무흔이 치유자인 것을 사평이 알고 있으니, 이제는 그에게 무슨 고민이든 털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
윤은 어제의 일, 그리고 그와 관련한 과거사들을 소상히 늘어놓았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사평은 답답함에 가슴을 퍽퍽 쳐댈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성주님께서는 북부를 다스리는 국공 주윤입니다. 지금껏 모든 기회에 열린 삶을 살아오셨지요. 원하는 것도 하고자 하는 것도 모두. 허나 보통의 사람들은 아닙니다.”
“나는 기회에 익숙하지 않다?”
“예.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놓치면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이지요. 기회가 온다고 전부가 아닙니다. 준비된 자만 행운을 낚는 것이에요.”
사평은 윤에게로 몸을 기울이고 주먹을 꽉 쥐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성주님의 때는 지금입니다.”
그 단호하고도 힘 있는 목소리에, 윤은 눈을 끔뻑끔뻑하며 잠깐 얼어 있었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두 손을 들어 본인의 얼굴을 감싸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평은 기가 차서 목소리를 높였다.
“은증왕을 휘어잡으시란 말입니다! 강렬하게! 그런 거 도가 트셨잖습니까.”
“그게, 이상하게 그자 앞에서는 잘 안 되더라고.”
“푹 빠지셨군요. 허면 그저 솔직하게 나가십시오.”
“그건 또 좀….”
“왜요?”
“상대의 마음이 어떠한지도 알지 못하는데, 나의 감정을 밀어붙이는 것은 실례이지. 혹 상대가 나를 싫어하기라도 하는 경우에는 오히려 고통이 되지 않겠는가?”
“하아… 다 잘하시면서 연애에는 어찌 이리 어리숙하신지.”
사평은 윤이 써 놓은 문서를 곱게 접어 소매에 넣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마음, 제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
무흔은 오전 내내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차피 갇힌 채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악기는 연주할 기분이 들지 않고, 그렇다 하여 책을 읽자니 글자가 눈에 안 들어오고.
서서히 눈의 부기가 가라앉는 그 느릿한 변화만을 지켜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심심해.”
효명성에 와 처음으로 무료함을 느꼈다.
뒹굴거리던 무흔은 불편한 발로 별채 안을 어그적어그적 돌아다니며 그간 들여다보지 못했던 물건들을 살폈다. 그러다 화첩을 발견했다.
“어? 여기 어딘지 알겠다!”
그의 손에 들린 화첩은 북부의 산을 그린 모음집이었다.
윤과 함께 산에 올랐던 날, 넓적한 바위 위에서 명상을 하고 또 수련을 하다가 한 번씩 눈을 뜰 때면 가을의 아름다운 정경이 아래에 펼쳐졌다. 그 장면이 화폭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가기로 했는데… 괜히 내가 무릎 꿇고 지랄을 떨어서 말도 못 꺼내겠어. 산에 한 번 더 다녀온 다음에 뭐라뭐라 성토를 하는 건데.”
땅이 다 꺼지도록 한숨을 쉬고, 화첩의 다음 장을 펼쳤다.
“와! 여기인가 보다.”
폭포수가 쏟아지는 절벽 옆으로 바위틈에 솟아난 온천이 자리한 그림이었다. 아마도 한겨울에 그린 그림인 모양이었다. 폭포에서 쏟아지는 물과 포말이 그대로 얼어붙어 있는데, 온천의 뜨끈한 물에서는 증기가 올라오는 장면이었다.
무흔은 그 생소한 매력에 폭 빠져 버렸다. 아직 가 보지도 못했는데, 화공의 실력이 어찌나 대단한지 마치 눈으로 그 절경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겨울까지 효명성에 머물 수 있을까.”
삽시간에 울적해졌다.
그러다 거울에 비쳤던 제 퉁퉁 부은 눈을 떠올리니 눈물이 쏙 들어갔다. 살다 살다 그런 몰골을 다 눈으로 확인해 볼 일이 있을 줄이야.
화첩을 하나하나 넘기는 동안, 무흔은 산 정상에 올라보고 싶다는 욕구에 휩싸였다.
“은증왕, 사평입니다. 안으로 들겠습니다.”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에 무흔은 화첩을 접어 얌전히 무릎 옆에 내려놓았다.
“어쩐 일로 왔소?”
“좋은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성주님께서 산책을 다시 허락해 주셨어요.”
사평이 활짝 웃으며 소매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 들었다. 그것을 펼쳐 무흔이 앉은 탁자 앞에 내려놓았다.
내용을 한눈에 훑고, 인장까지 확인한 무흔의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아니, 내게 감시를 붙이지 않겠다니! 이게 정말 가능한 소리인가?”
“물론입니다. 은증왕께서 보여주신 그 신의를 성주께서 진심으로 받아들이신 것이겠지요.”
신의. 무흔은 그 신의와 맞바꾼 손목의 금사슬을 내려다보았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마음에 쓰린 바람이 휭 감돌았다.
“진심은 무슨. 어차피 내 발 닿는 데 있는, 성에 있는 모두가 눈과 귀 아니겠나. 그들이 감시지 뭐.”
“그리 생각하지 마십시오.”
“통제 구역이 있는 것은 여전하지만, 산책을 갑자기 허용한다? 왜? 산에 데려가기 귀찮아졌나?”
“아닙니다. 조만간 동행하신답니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야….”
무흔은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리며 본채 쪽을 노려보았다.
“흠. 그런 뜻인가? 본국으로 송환되기 전에 울타리 안에서 여기저기 실컷 돌아다니기라도 해라, 하는 값싼 동정심?”
성주께서는 어제의 일을 반성하고 계시니 부디 호의를 받아주십시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무흔이 무릎을 꿇은 것을 윤이 나불댔다는 인상을 줄 테니까.
“성주께서는 이리 사슬을 채워두신 것을 자책하고 계셨습니다. 동정심이라기보다는 미안함과 죄책감이겠지요.”
“그런 거라면 진심 어린 사과 한 번으로 충분한 것을. 주 국공은 종잡을 수가 없는 인간이야. 나는 그런 태도를 용납할 수 없소. 뭐 포로 주제에 용납을 안 하면 뭘 어쩌겠느냐마는.”
사람을 들었다 놨다. 그게 당하는 입장에서는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무흔은 눈을 내리깔고는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저희 성주님께 서운한 점이 많으시지요?”
사평이 은근한 목소리로 무흔을 토닥였다. 윤이 아까 하도 우스꽝스럽게 설명했던 터라 어디까지나 과장인 줄로만 알았는데, 은증왕은 정말로 속에 맺힌 게 많아 보였다.
“서, 서운? 내가? 아니야, 서운이라니. 내가 왜?”
정말 서운한 게 맞는 모양이었다. 무흔이 울컥하여 말을 더 쏟아냈다.
“장사께선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주 국공 그자가 이랬다 저랬다 마치 날 갖고 노는 것처럼 구는 것을 알면서. 혹 연막을 쳐 주기 위해 나를 현혹시키는 종이 쪼가리를 들고 이리 왔나?”
“아니 저는….”
“사평 그대가 정녕 충신이라면 모시는 이의 잘못을 덮으려만 들진 말아야 할 것이오!”
무흔은 짐짓 화가 난 듯 보였으나, 목소리에 차가운 가시가 돋아 있진 않았다. 새끼 고양이가 갸르릉거리며 여우 앞에서 엄포를 놓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사평은 상황을 대번에 정리했다.
난생 처음 심중에 봄바람이 불어닥친 성주가 질풍노도 소년처럼 어리숙하게 군 것이 원인이었다.
그것이 하필 평생을 갇혀 살아 아직 관계에 익숙하지 않은 무흔에겐 일관성의 결여로 다가왔겠지. 상대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허, 흠, 나는 지금 산책을 하려 하니, 장사께선 그만 가 보시오.”
방금까지 소리를 높였던 것이 무색하게, 무흔이 눈치를 슬쩍 보더니 앞에 놓인 종이를 냅다 챙겼다.
그 모습에 사평은 절로 따뜻한 미소를 머금게 되어 버렸다. 은증왕은 확실히 귀여운 면모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족쇄를 건 채로 산책을 하면 발이 무척 피곤할 것인데, 성주님께 풀어 달라 청을 올릴까요?”
“아니, 아니야… 아니 되지!”
“예?”
“이걸 차고 있으니 산책도 허락해 주고 감시도 풀어준 거잖아. 나는 진짜 괜찮으니 주 국공에겐 아무 말 마시오. 돌아가셔서 내가 고맙다고 전해주시는 게 좋겠소.”
“주무시기 전에 안마사를 보내드릴까요? 지압을 받으시면 발의 피로가 빨리 풀릴 것입니다.”
지압 소리에 무흔의 눈이 반짝였다.
“그건 뭐… 좋을 대로.”
“그리하겠습니다.”
“기왕이면, 그… 온수도 물론 좋은데, 향유도 가져오라 전해주시게.”
무흔은 원하는 것을 끝까지 야무지게 챙기고 사평을 배웅했다.
*
무흔의 산책은 밤이 깊도록 멈출 줄 몰랐다.
아이들이 잠들 시각까지 같이 놀았으며, 엄청난 규모의 주방에 들어가서는 야식을 만드는 것도 구경했다. 술도 한 병 얻었다.
서고에서는 밤에 읽을 책을 고르느라 제법 긴 시간을 보냈다. 성벽에서 이루어지는 불화살 야간 훈련을 먼 발치에서 황홀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몇 시진을 그리 여기저기 돌아다녔건만, 윤을 한 번도 마주치질 못했다. 가는 곳마다 그가 있는지 은근슬쩍 살피기까지 했는데.
무흔은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또한 그리 느끼는 자신이 낯설었다.
서고에서 빌린 책을 한 팔에 안고 다른 한 손엔 자그마한 술병을 든 채, 호수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넜다.
하늘을 수놓는 불화살의 빛 덕분에, 수면을 기준으로 위와 아래가 똑같이 반사되는 기묘한 풍경을 눈에 담았다.
“세상에, 이런 광경이 다 있다니.”
새카만 물이 마치 검은 거울과도 같았다.
무흔은 다리 위에 대뜸 앉아 버렸다.
“술은 이럴 때 마시라고 있는 거지.”
뚜껑을 열어 살짝 한 모금 맛을 보았다.
“캬아.”
잔도 없이 병에다 입을 대고 무려 술을 마시다니. 해 보지 않았던 모든 일들이 그저 다 즐거웠다.
묘한 운치에 취해 두 모금, 세 모금 더 술을 삼켰다. 그 맛이 달게 느껴지는 터라, 풍경을 안주 삼아 끊임없이 홀짝대었다.
다리 난간 위로 몸을 숙이자, 제 모습 또한 거울에 비친 듯 선명하게 드러났다.
“와…. 밤의 물은 이렇구나!”
신기함에 매료되어 점점 더 몸이 물 쪽으로 수그러들던 순간, 쑥 하고 옆에 사람 그림자가 하나 더 튀어나왔다.
“으아악!”
놀란 무흔은 책을 꼭 끌어안고서는 뒷걸음질 쳤다. 허둥지둥 발을 옮기다 그만 사슬이 엉키는 바람에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은증왕!”
다리 난간에 코를 박기 전에 간신히 몸이 붙들렸다. 익숙한 손. 무흔은 고개를 치켜들고 윤을 노려보았다.
“인기척이라도 내고 나타나야지!”
“정신 팔리면 아무 소리도 못 듣는 게 그쪽이야. 저번에 열매를 딸 때도 그랬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무흔은 더 화를 내지는 못하고 고개만 홱 돌려 버렸다. 윤은 손짓 몇 번으로 무흔의 발목 사이에서 엉켜 버린 사슬을 가볍게 풀어냈다.
“뭘 그렇게 들여다 보고 있었는데?”
“그저 신기해서.”
무흔은 호수면을 따라 위와 아래가 완벽하게 대칭이 되는 풍경을 다시 한 번 눈에 담았다.
“신기하지 않나? 이런 놀라운 정경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조차 몰랐거든.”
반딧불이가 떼 지어 흘러가는 모습에 무흔은 순간 시선을 빼앗겼다.
눈이 별처럼 반짝이는 무흔의 그 모습을 윤은 넋 놓고 바라보았다. 지금이 바로, 중요한 이야기의 운을 띄울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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