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화
*
윤은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전처럼 무흔이 속을 긁는답시고 악기 연주라도 해 준다면 좀 나을 텐데. 암흑과 고요에 젖은 새벽이 마음을 더 심란하게 만들었다.
“벽제성에서 이미 더럽혀진 바 있는 신념인데… 내가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는 것일까.”
아직도 그날의 일을 생각하면 자괴감이 들고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이능력에 대한 긍지가 한순간에 무너졌던 그 끔찍한 기억이 윤을 괴롭혔다.
“내 평생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그리 중얼거리기 무섭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 번이 어렵지 한 번이 두 번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했는데, 딱 그 꼴이었다.
“내 이리 사욕 앞에 나약한 자였는가.”
윤은 침실 창을 열고 어둠 속에 묻힌 건너편 별당을 바라보았다. 절망이 그득하던 아까의 그 보라색 눈동자가 잊히질 않았다.
“쉬운 결정이 아님을 그대가 어찌 알겠는가. 하아… 알아주길 바라는 것도 우습지.”
동쪽 하늘에 어슴푸레한 빛의 기운이 돌기 시작할 즈음에야 비로소 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침통한 표정의 그가 향한 곳은 조상들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이었다. 초를 켜고 향을 피우자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났다.
윤은 대대로 이능력자였던 선조들의 이름을 눈으로 훑고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용서를 구하지 않겠습니다. 훗날 조상님들을 뵐 낯이 없을 것이나,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부끄러운 짓을 하려 합니다.”
윤은 절을 올렸다. 바닥을 짚은 손에 이마가 닿자, 아까 제 발에 머리를 대었던 무흔이 떠올랐다. 그 절실함이 지금 제 안에도 똑같이 일었다.
“아버지와 조부님의 가르침이 부족하였다 꾸짖지 마시옵소서. 그분들의 올곧은 길을 따르지 못한 것은 오로지 못난 제 탓입니다.”
무흔에게는 닷새를 기다리라 했으나, 정작 윤은 반의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마음을 결정해 버렸다.
마음이 한없이 불편할 줄로만 알았는데, 정작 결심을 하고 나니 이리 발걸음이 가벼울 수가 없었다.
윤은 날 듯이 걸어 별당으로 향했다.
“같이 산에 오르자 해야지.”
*
무흔이 잠에서 깬 것은 동이 틀 무렵이었다. 튕기듯이 벌떡 일어나 앉은 무흔은 눈을 뜨자마자 한숨부터 쉬었다.
“하아….”
머리를 쓸어넘기려 팔을 드는 순간, 절그럭 하는 소리에 흠칫 놀랐다.
“수갑을 찼었지. 허, 회룬석 목걸이보다도 가벼워서 깜빡했네.”
무흔은 우선 창가로 향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살그머니 창을 열었다.
별당에서 지내는 동안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윤이 새벽같이 산에 오르려 나간 후에는 어김없이 본채의 창이 모두 열렸다. 환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어디 보자, 벌써 산에 간 건 아니겠지?”
살짝 열린 창틈 사이로 눈을 가져다 댄 무흔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아직 안 갔어. 미친 척하고 매달려서 데려가 달라고 해야겠… 헉!”
중얼거리던 무흔은 얼른 주저앉아 창문 아래로 몸을 숨겼다. 윤이 본채에서 나와 뒷마당 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아니, 저 인간이 왜 이쪽으로 나오지?’
무흔은 아주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창 너머의 윤을 관찰했다.
마당에서 그나마 가장 기가 잘 통하는 곳이라며 도학 선생이 대나무 돗자리를 펴 놓은 곳에 윤이 척 하니 자리를 잡는 것이 아닌가.
‘뭐지? 설마, 오늘은 산에 안 가고 저기서 명상을 하는 거야? 왜?’
해가 완전히 떴는데도 윤이 자리를 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무흔은 그가 곤히 자는 저를 차마 깨우지 못하고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저 저의가 의심스러울 뿐이었다.
순간, 무흔의 그 시선을 느낀 것인지 윤이 별당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잽싸게 숨는다고 숨었으나 아무래도 걸린 것 같았다.
“젠장.”
지난밤의 굴욕을 떠올리자 무흔은 순간 암담해졌다.
어찌 되었든 윤을 보아야 하는데 막 자고 일어난 이런 몰골로는 무리일 듯했다. 얼른 경대로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으아악!”
무흔의 비명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거울 속의 허여멀건 사내는 눈이 팅팅 부어 있었다. 사슴도 울고 갈 만한 커다란 눈망울은 사라지고 실낱같은 줄 두 개가 눈이 있었던 자리를 알려주고 있었다.
지난밤 잠들기 직전까지 이불을 움켜쥐고 울고 또 울고, 지쳐 쉬다 또 울었던 탓이었다.
“은증왕! 무슨 일이야!”
바깥에서 윤의 목소리가 울리더니, 저벅저벅하는 다급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던 무흔은 요란하게 사슬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잽싸게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손바닥으로 눈을 꾹꾹 눌러 보았다. 울다 자면 눈이 붓는다는 진리를 태어난 지 20년이 넘도록 알지 못했던 것이 한스러웠다.
“자는 척하지 마. 비명 소리 듣고 들어온 거야.”
이불 너머로 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흔은 속으로 젠장젠장 되뇌며 어떻게든 눈의 부기를 빼 보려 애썼다. 손목에 찰랑이는 금사슬이 서늘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것을 그러모아 눈 위에 얹었다.
“괜찮은 거야? 무슨 일인데?”
이런 꼴로 마주칠 수는 없었다. 아까 은경 너머로 보았던 몰골은 차마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우스꽝스러웠으니.
“혹 간밤에 넘어진 것으로 인해 통증이 뒤늦게 올라온 건 아니야?”
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어느덧 침대 옆에까지 이르렀다.
제발, 저리 가. 오지 마. 그리 간절히 비는 것을 하늘이 들은 모양이었다. 바깥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주군, 여기 계십니까?”
무흔은 이불 속에서 안도의 숨을 짧게 내쉬었다. 병사들이 이 새벽부터 여기까지 와서 윤을 찾는 걸 보니 무슨 일이 난 모양이었다.
“이쪽이다. 왜?”
“여기 계셨군요. 다행입니다. 동트자마자 전서구가 도착하였습니다. 하여 아침 교대를 위해 대기하던 수비 병력 전부가 주군을 찾고 있습니다.”
“사평의 지시인가?”
“예. 사안이 긴급하다 하였습니다. 병력의 절반은 산을, 나머지 절반은 성을 뒤지고 있습니다.”
산을 뒤질 정도로 긴급하며, 비둘기가 가져온 소식이라. 대충 짐작이 갔다.
요 며칠 윤과 사평이 목을 빼고 기다리는 것이 바로 전서구였다. 희로국에 갔던 사신단에게서 슬슬 소식이 올 때가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윤은 선뜻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이불 속에서 꿈틀대는 무흔을 가만 응시했다.
지난밤 그의 청을 매몰차게 내친 것이나 다름없으니 지금 이리 상종도 하지 않으려 드는 것이 분명했다.
“은증왕, 이따 다시 들르지. 혹 아픈 곳이 있을지 모르니 도학 선생을 보내겠소.”
무흔에게서는 끝까지 반응이 없었다. 윤은 썩 편치 않은 표정으로 별당을 나섰다.
*
사평은 집무실 문밖에까지 나와 윤을 기다렸다. 평안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과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을 알고는 있으나, 이리 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반성이었다.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이야.
여러 경우의 수 중 하나로 염두에 두기는 했었지만, 너무 가능성이 낮다는 판단하에 제쳐둔 선택지였다.
사평은 이에 대해 윤에게 미리 언급하지 못한 것을 자책했다. 이제 대책을 세울 때였다.
급히 도착한 윤이 대뜸 결과부터 물었다.
“장소와 일시는 나왔는가?”
“들어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평은 윤을 들이자마자 바깥 문을 직접 닫고, 복도로 들어와서는 한 겹의 문을 또 닫고, 집무실 문까지 닫은 후, 마지막으로 창문까지도 꼭꼭 닫았다.
“여기, 읽어보십시오.”
윤은 자리에 앉아 사평이 내미는 것을 받아들었다. 자그마한 쪽지에 적힌 글자를 한눈에 담고, 윤은 미소부터 한껏 머금었다.
“협상 결렬. 황자 귀환 거부. 허, 어떻게 이런 결과가….”
“긴장을 놓으시면 안 됩니다.”
사평은 단호하게 나왔다. 무흔이 희로국에 가지 않게 된 것이지, 이곳에 안전하게 붙어 있게 될 거란 보장이 없었다.
“사신단이 건원국으로 돌아올 때 국경에 이르면 제게 전서구를 보내기로 약조하였지요. 하지만 황제께는 결과가 나온 시점에 매로 소식을 전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겠지. 허면 황제께선 이미 은증왕에 대한 처우를 결정하셨을 수도 있겠군. 명령이 도착하는 건 시간문제겠어.”
“은증왕께는 이 소식을 언제 전해드릴 생각이십니까?”
“일단은 비밀로 하고. 황궁에서 칙서가 오면, 그때.”
윤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어찌 그러십니까. 황명을 거스르게 될 것이 염려되시는지요?”
“아니, 그보다는… 은증왕은 희로국의 황제를 좋아하지 않아. 원한까지는 모르겠고, 한 방 먹이고 싶어 하는 그런 심리는 있더군.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친부에게 버림받은 사실이 상처가 되지 않겠는가.”
“그것이 안쓰러우시다면, 기회로 만드십시오. 상처 입은 마음을 어루만져주시고 다독여 안아주시면 은증왕과의 거리가 더 가까워지지 않겠습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윤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으니 아직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걷힌 것은 아니었다.
“황제께서 은증왕을 내놓으라 하시면 내놓으실 겁니까?”
“글쎄.”
“글쎄라니요! 그리 유약하신 답을 하시면 안 됩니다!”
사평이 버럭 화를 내는 통에 윤은 순간 움찔했다.
“사평, 왜 이러는가?”
“은증왕은 성주님의 생명줄입니다. 그런 존재를 이 성 밖으로 내보낼 생각조차도 마십시오!”
생명줄, 그 말에 윤은 뜨끔했다. 속인다고 속였는데 역시 사평의 눈을 가리기에는 역부족인 모양이었다.
지그시 저를 바라보는 윤의 시선에, 사평은 자신이 아는 것을 밝혔다.
“치유자이지 않습니까? 은증왕.”
“자네만 아는 것인가?”
“저 말고, 하온과 도학 선생도 아시는 것 같습니다만.”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
“염려 마십시오. 워낙 두 분이 단서를 흘리시기는 하셨으나, 저나 되니까 눈치챈 것뿐입니다.”
윤은 사평을 힐끗 바라보고는 멋쩍은 기색이 도는 미소를 살짝 머금고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해버렸다.
“자네 말대로야. 그를 성 밖으로 내보내고 싶지 않아.”
“황제는 분명 은증왕을 중경으로 불러들이실 겁니다. 저희 쪽에서 거부하고 올릴 핑계는 많습니다. 그건 제게 맡겨 주십시오.”
“그가 치유자임은 비밀로 해야 하네.”
“물론입니다. 그동안 주군께서는 은증왕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에 집중하십시오.”
“아, 그렇지!”
윤은 얼른 종이를 펴고 붓을 들었다.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문서에 인장을 쿡 찍어서는 보란 듯이 그것을 사평에게 내밀었다.
“내가 그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아무래도 시기가 좀 그렇고, 하아… 자네가 대신 다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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