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
당황한 무흔은 말까지 더듬어가며 발목을 좌우로 마구 움직여봤다.
“생식기라니… 아, 아닌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해 보게.”
이번에는 그 자리를 피해, 안마사가 발뒤꿈치의 끄트머리를 눌렀을 때 소리를 질렀다.
“악! 거기야! 아까 안쪽이 아니고 그 옆이네.”
“이곳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음문입니다.”
음문이라 함은, 곧 뒷구멍, 항문이었다. 무흔은 깜짝 놀라 고개를 좌우로 저어댔다.
“절대, 절대 아니야.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발 만져주는 걸 좀 좋아하나. 주 국공이 무섭게 쳐다보고 있어서 그냥 아무 데나 골라 아프다고 한 거야. 실은 발이 멀쩡하고, 하나도 안 아팠어. 엄청 시원해.”
무흔은 냉큼 이실직고하고서는 그를 향해 웃어 보이고, 이어 윤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물었다.
“기왕 이렇게 데려온 김에, 이쪽 발도 좀 주물러 주고 가라 해도 될까?”
“그렇게 해.”
윤은 근처에 놓인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무흔은 그제야 윤이 내내 초조한 얼굴로 서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별 뜻 없는 거라 치부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저를 걱정해줬다며 미련하게 또 솔직하게 좋아해야 하는 건지.
윤과 눈이 마주치자 무흔은 얼른 고개를 푹 숙여 제 발을 내려다보았다.
“다친 데가 없으시면, 온수 족욕 대신 향유를 발라 주물러 드릴까요?”
“응, 좋을 대로.”
산적같이 생긴 사내는 지니고 다니는 대여섯 병의 향유 중 하나를 골라 안 어울리게 섬세한 손놀림으로 무흔의 발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흐… 흐읏.”
힘과 기교를 겸비한 엄지가 미끈덕거리는 발바닥을 깊게 꾹 누르고 지나가자 무흔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무흔은 얼른 입술을 앙다물었다. 윤이 저를 보고 있으니 이런 꼴을 보이는 것은 한 번으로 족했다.
그 단단한 손가락이 이번에는 발가락 사이사이를 세심하게 누르고, 오장육부가 모여 있다는 발의 혈 자리들을 모조리 섭렵한 후, 발목과 종아리 시작점에까지 이르렀으니, 무흔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또 내 버렸다.
“으응… 아….”
무흔은 손을 들어 입을 막아 버렸다. 윤을 보기가 너무 민망해서 이제 그만 안마를 멈추라 하고 싶은데, 그러기엔 또 기분이 너무 좋았다.
“크흠. 그 정도로 하지.”
지압을 멈추게 한 쪽은 윤이었다. 못마땅한 표정을 애써 감추려는 듯 억지인 티가 분명한 미소를 드리우고 있었다.
“예, 성주님.”
“수고했네. 그만 가 봐.”
“좋은 밤 되십시오.”
좋은 밤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무흔은 시종들이 발의 향유를 닦아주기 무섭게 얼른 다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모두 물러가고 윤과 단둘이 남게 되자, 이번에도 그에게서 등을 돌려 누웠다.
가뜩이나 마음도 싱숭생숭한데, 방금의 민망한 사건까지 하나 더 얹힌 터라 도저히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은증왕, 넘어진 곳은 괜찮다니 다행이야. 다리에 까진 곳도 없고.”
“응.”
“자려 하는가?”
“자야지.”
“오늘은 푹 자. 포박은… 내일. 사람을 보낼게.”
기어이.
“남한테 시키는 걸 보니 이번에는 금사슬을 채워 놓지 않을 모양이야?”
“그게 무거워서 한동안 팔이 아프지 않았는가. 내 미안하여….”
“미안? 미안할 일은 그게 아니지 않나? 금이라서 미안한 게 아니라 손발을 묶어놓는 것 자체를 미안해야 하는 거 아니야?”
매섭게 쏟아져 나오는 무흔의 목소리에 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묶어두려는 것은 단순히 포로에 관한 법령에 따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무흔을 곁에 두고 싶은 욕망이 꿈틀댄 탓이었다.
윤의 눈에, 무흔은 벗어나고 싶어 하는 자였다. 그가 평생 지니지 못했던 자유에 대한 갈구가 시선을 마주할 때마다 느껴졌다.
언제든 작은 기회 하나라도 나면 그가 사라질 것 같아 윤은 매 순간 불안함을 안고 있었다.
“주 국공, 말이 나온 김에.”
무흔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마음에 걸리는 것을 담아둬봤자 손해는 제 쪽임을 알고 있었다.
평생 갇혀 살아온 바, 말할 기회를 놓치게 되면 그다음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상대가 다시 저를 찾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으니까.
“청할 것이 있어. 어려운 결정이 되겠지만, 숙고해줬으면 좋겠어.”
윤과 눈을 맞췄다. 심장이 요란하게 나대고 있었지만 지금 감정 따위보다 중요한 것은 무흔 자신의 처우와 안녕이었다.
“이번엔 내 쪽에서 먼저 신뢰를 건넨다는 의미로….”
무흔은 윤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묶어.”
“왜 이래.”
“내일 묶으나 오늘 묶으나 나한테는 크게 다를 바 없어. 저어기, 옥피리 묶어둔 금사슬 갖다가 쓰면 되겠네.”
“방금까지만 해도 묶는 것 자체에 대해 미안해하라 했으면서?”
“그건 그거고. 어쨌든 탈주 사건은 내가 주 국공에 대한 신의를 저버린 것이니, 그 신의를 되찾고 싶어. 그러기 위한 장치라고 하자. 약속의 증표 같은 거.”
“불편할 텐데.”
“금으로 묶으나 내일 병사한테 밧줄로 당하나 불편한 건 똑같아. 뭐, 정 그렇게 미안하면 저번보다 좀 헐렁하게 해 주든가.”
마음을 정하지 못한 듯 윤이 저를 그저 지그시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 자리를 피하고 싶기도 하고, 제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하기도 하고.
그런 이유로 무흔은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나와 그 봉인된 옥피리를 들고 왔다. 그것을 윤 앞에 내려놓고 다시금 두 손을 내밀었다.
“일단 그대가 해야 할 일을 해. 내 신의를 받고, 그대도 내게 신의를 돌려주었으면 좋겠어.”
“청이 무엇이기에.”
“묶고 얘기해.”
윤은 내심 다른 이에게 포박을 맡기는 것이 내키지 않던 차였다. 내일 병사를 보내겠다 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으니, 차라리 지금 최대한 가볍게 만들어 주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옥피리에서 황금 사슬을 풀어냈다. 확실히 사람이 손발에 두르고 지내기에는 과하게 무거웠다. 윤은 거기서 본래 수족갑에 사용했던 양의 절반 이상을 덜어내어 옆에 내려놓았다.
손목과 발목에 매끈하고 둥근 고리부터 채웠다. 너무 가늘어서 아프지 않을 정도로 얇게. 그런 후에는 사슬을 빚어내기 시작했다.
발걸음이나 행동이 불편하지 않도록, 길이는 이전보다 길게 해 주었다. 하지만 무게는 놀라울 정도로 가벼웠다. 심혈을 다해 이능력을 쏟아부어 사슬 하나하나 속이 빈 형태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저번보다는 좀 낫겠지만, 그래도 불편할 테니 내 처소의 일하는 자들 중 영민하고 성품 좋은 이를 골라 그대의 시중을 들도록 보내줄게.”
“고마워. 가볍네.”
훌쩍 가벼워진 수갑만큼이나 마음도 가벼웠으면 좋으련만. 무흔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육중한 무게에 짓눌리고 있었다.
“내가 바라는 것을 주 국공도 알겠지. 희로국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해 줘.”
“아….”
윤의 얼굴에 단번에 난처한 기색이 솟았다. 아까 하온도 그러하더니, 이제 무흔까지 비슷한 이야기를 제게 하고 있었다.
“사평이 낸 묘책을 모두 거절했다지. 하지만 충분히 가능하기에 책사가 그리 제안을 건넨 거 아닐까?”
“그 방법으로는 곤란해. 신념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야.”
“만약 내가 치유자인 걸 사평이 알았다면, 어떻게든 날 곁에 두도록 그가 주 국공을 설득했을 거야. 이환이야 말할 것도 없고, 도학 선생도 마찬가지야. 이미 내게 그대를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고.”
“…….”
“날 위해서 희생해 달라는 말이 아니야. 그걸 다 감수하고라도 날 곁에 두는 거, 주 국공 본인을 위해 그리하는 게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당연히 이기적이지.”
“내가 없으면… 하늘이 주신 그 힘을 사람을 위해 제대로 쓸 수도 없잖아.”
무흔이 정확하게 짚어냈지만, 그럼에도 윤은 선뜻 그리하겠다 할 수 없었다.
만약 이능력자와 치유자로서만 생각할 수 있었더라면 아마도 긍정적인 답을 내놓았을 게 분명했다.
문제는 마음이었다. 윤에게 무흔은 이미 마음속 깊이 곱게 품은 외사랑이었다.
백 번 생각해 봐도 무흔을 곁에 두기 위해 이능력으로 장애물을 쓸어 버리는 것은 지극히 이기적인 결정임이 분명했다.
“다른 방책을 찾아볼게.”
“생각은 이미 충분히 하지 않았어?”
침통하기까지 한 윤의 표정을 바라보며, 무흔은 그에게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내가 정말 간곡히 청할게.”
무흔은 윤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평생 이렇게 묶여서 살아도 좋으니까,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게 해 줘.”
속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왈칵 올라와 무흔은 표정을 숨기려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몸을 앞으로 접어 윤의 발에 이마를 갖다 대었다.
“내가 이렇게 빌게. 제발… 나 좀 살려줘.”
윤은 더 이상 안 된다고 말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아무리 유폐였다고는 하나, 은증왕은 일국의 황자였다. 그가 이렇게까지 한다는 것은 자존심마저 내려놓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은증왕, 일어나. 이러지 말고, 마음을 다스려.”
윤이 무흔을 일으키자마자, 무흔은 그의 손을 덥석 붙들었다.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깨끗한 기운이 넘실넘실 윤에게로 흘러들었다.
자연스러운 상태일 때보다 더, 무흔은 제힘을 한껏 방출해 봤다.
“이걸 좋아하잖아. 원하는 대로 가져. 내 청을 들어주기만 한다면 내가… 어… 전엔 안 된다고 했지만… 어… 그… 입술까지는 허락할게.”
선금을 받고 계약을 이행하겠다 할까. 윤의 어두운 마음이 기회를 잡아 자신에게 달콤하게 속삭였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무흔의 눈을 보며 안 된다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솔직히는 그러겠노라 말하고 싶었다.
“답을 닷새 안으로 줄게. 그 안에 다른 묘책을 찾아낼 수도 있고. 생각을 더….”
그놈의 생각. 생각. 생각. 무흔은 더는 참지 못할 분노에 휩싸였다.
“허, 생각해 본다는 게 그런 건가? 치유자들은 계속 태어나니까 상성이 맞는 치유자가 발현되면 회룬석 목걸이라도 걸어놓고 훈련시켜서 날 대체할 수 있으니까?”
“그럴 리가.”
“내 힘이 필요하다며. 가지라는데, 뭘 더 생각해. 하겠다 하지 않겠다 그 둘 중 하나인데!”
내 힘만을 원하는 게 아니라, 그대가 날 마음에 두고 원했더라면 이렇게 망설일 일 따위는 없었겠지.
그러한 결론이 서자 무흔은 정말로 눈물을 쏟을 듯한 기분이 되어 버렸다. 마음이 찌릿찌릿하게 아리고 그 통증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생각만큼 내 힘이 절실히 필요한 건 아닌가 보네. 내가… 계산을 잘못했어.”
“은증왕.”
“가. 쉬고 싶어. 자야겠어.”
“나 한 사람만의 신념 문제로 끝나는 게 아니야. 희로국과 건원국의 외교 문제 따위는 신경 안 써. 어차피 전쟁 중이니. 하지만 이쪽 황제와 내 문제가 되어 버린다면, 내 사람들의 목숨이 걸려 있고 그에 따르는 성주로서의 책임은….”
“그만. 추후에 답을 주겠다며. 구구절절 사연을 들은들 내가 뭘 할 수 있겠나.”
무흔은 제 안에 머물던 슬픔이 체념으로 변하려 하는 것을 깨닫고는 얼른 마음을 다잡았다. 허무하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주 국공, 이렇게 묶어두길 다행이야. 만약에 포박이 내일이었다면, 나는 오늘 밤에 또 도망쳤을 테니까.”
무흔은 매몰차게 돌아서서 침대로 향했다. 발목에 늘어진 사슬이 바닥에 처량하게 끌리는 소리만 둘 사이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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