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화
은애라니!
무흔은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숨까지 멈추었다. 조금 더 대화가 무르익은 후에 비슷한 질문을 할 거라 생각하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하온이 정곡을 찌를 줄이야.
“내가 왜?”
망설임 한 번 없이 바로 튀어나온 윤의 싸늘한 대답에, 무흔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허면 은증왕의 그 능력 말고는 곁에 두실 이유가 없으신 것입니까?”
“당연하지. 그 이유가 아니고서야, 은증왕은 내겐 아무 의미도 없는 자야.”
윤의 표정과 눈빛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는 하온은 두 번의 대답 모두가 거짓임을 단번에 간파했다.
난생처음 사랑에 빠진 사내가 그것을 숨기느라 어색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었으니.
하지만 창밖의 무흔은 아니었다.
강렬한 부정의 목소리가 지금까지의 그 어느 대답보다도 선명하게 귀에 꽂혀 들었다.
저도 모르게 한 손이 심장을 움켜쥐고 있었다.
‘내가 왜… 그의 답을 놓고 이리 속이 뒤집어진단 말인가!’
무흔은 그 자리에 소리 없이 주저앉았다.
‘내 힘을 원하는 게 당연하잖아. 주 국공의 목숨이 걸렸으니.’
창 안쪽에서 윤의 목소리가 아까보다도 더 서늘하게 흘러나왔다.
“그 이야기라면 그만하거라. 너도 잘 알지 않느냐. 하늘이 사람을 구하라 주신 이능력을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는 목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저는 그가… 얼른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성주님께서 힘을 쓰시면 그도 돌아올 것이고 염록왕께서도 무사귀환 하실 것이며 대륙의 통일도 단번에 이룰 수 있을 테니, 황제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라 했거늘.”
더는 봐 주지 않는다는 식의 눈빛이 매섭게 이어졌다.
그런 윤을 마주하고 선 하온은 제 진심을 울컥 내뱉었다.
“성주님께 그는 대체 무엇입니까? 이용하고 버리는 패입니까?”
“하온.”
“장기판의 졸(卒)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차(車)나 포(包)라 하면 그것이 제게 더 위안이 되겠습니까?”
“그는 우리에게 소중한 이고 또 고마운 이다. 내 그것을 어찌 모르겠느냐. 내 장담하건대, 늦어도 2년 안에는 그가 우리 곁으로 올 것이다.”
돌아오느니 2년이니 하는 헛된 기약 따위, 하온은 그저 흘려 버렸다. 그의 마음에는 ‘우리’라는 말만이 서럽게 남았다.
성주는 형이 ‘우리에게’ 소중하다 하였지 ‘나에게’ 소중하다 말하지 않았다. 하온은 그것이 너무도 야속했다.
“그만 가 보겠습니다. 오늘 일은 잊어주십시오. 제가 괜한 소문에 흔들려 실언을 하였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많이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쉬십시오.”
하온이 성주의 방을 나서면, 무흔은 뒤가 밟히지 않도록 그 즉시 별채로 돌아가기로 계획을 철저하게 세웠었다.
하지만 무흔은 그렇게 움직이지 못했다.
제 안에 휘몰아치는 감정은 처음으로 지인의 힘을 느꼈던 그날의 충격만큼이나 강렬했으니. 그날처럼 다리에 힘이 풀리고 호흡이 편치 않았다.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통증이었다. 무흔은 여전히 움켜쥐고 있는 제 심장에서 쓰린 피가 도는 느낌을 받았다. 쿵쿵 한 번 뛸 때마다 핏줄을 따라 뾰족한 가시가 도는 듯했다.
“내가 왜….”
소리 내어 중얼거리다 제풀에 놀라 얼른 입을 다물었다. 별채로 돌아가야 한다는 계획을 그제야 떠올린 무흔은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던 터라, 발뒤꿈치를 들고 달려나갔다.
“윽!”
하필 마당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발이 엉켜 그 자리에 요란하게 넘어져 버렸다.
“흑….”
하필 몸이 옆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오른쪽 팔뚝과 오른쪽 엉덩이뼈가 지독하게도 아팠다.
그런데도 넘어져서 다행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눈물이 쏙 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너무 아팠다. 뚝뚝 떨어지는 이 눈물에 대한 핑곗거리가 생겼다.
“흐흑….”
무흔은 실컷 울어 버렸다. 속이 좀 시원해지는 것 같다가도 아까 그들의 대화를 떠올리자 다시 서글퍼졌다.
“망할 놈.”
무흔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정말 서럽게 울었다. 대체 윤에게 무슨 기대를 했기에 이렇게나 속이 상한 건지 모를 일이었다.
“은증왕! 괜찮나? 바닥에 왜 이러고 있는데?”
그 짧은 순간, 윤의 목소리가 멀리에서부터 점점 가까워졌다. 아마도 손목 발목에 족쇄를 채운다는 그 무시무시한 약조를 지키러 바로 나온 모양이었다.
“넘어졌어.”
무흔은 웅얼대듯 급히 대답하고서는 소매로 얼굴부터 닦았다. 밤이라 어두워 망정이지, 눈물이 번진 모습을 보인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아으으윽!”
일부러 더 아픈 척을 했다. 팔을 움켜쥐고 죽는시늉을 하면 불쌍해서라도 손에 수갑을 안 차겠지. 무흔은 그 와중에도 얄팍한 수를 부려보았다.
“다쳤어? 팔이 부러졌나?”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 으….”
“다리는? 발목이 성한지 확인해야겠네.”
윤이 무흔의 발등과 발목, 정강이까지 손으로 만져가며 확인을 했다. 커다란 손아귀가 다리를 거침없이 훑고 있었다.
순간 무흔은 양 뺨에서 열감을 느꼈다. 귀까지 다 화끈거렸다.
가을밤의 서늘한 바람이 달아오른 얼굴을 식혀주고는 있지만 붉은 기운을 완전히 지울 수 있을 리 없었다.
무흔은 어둠 속에 얼굴을 감출 수 있음을 재차 다행이라 여겼다.
“내 팔 잡고 일어나. 걸을 수 있나 봐야지.”
무흔은 제 앞에 놓인 단단한 팔뚝을 바라보다 밀어냈다.
“혼자 일어날 수 있어.”
아까 들었던 말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뱅뱅 돌고 있었다. 지인의 힘, 그것이 이유가 아니고서야 은증왕은 아무 의미도 없는 자라 했다.
이제 확실히 알겠다.
무흔은 그제야 윤이 저를 특별하게 봐 주길 원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속이 칼날로 베인 듯이 아프고 나서야 깨닫다니. 저 자신이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다 큰 사내가 아파서 이리 엉엉 울 정도면 보통 아픈 것이 아닐 텐데. 고집 피우지 말고, 일어나.”
윤이 애 취급이라도 하는 말투로 무흔을 토닥였다. 이어 휘청이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자, 걸어 봐.”
“손 치워!”
무흔은 제 몸에 닿은 윤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쳐냈다. 스치는 그 찰나에도 정화의 기운이 새어 나갔다. 마음이 어지러우니 제어고 뭐고 다시 엉망이 되어버렸다.
“많이 아픈가 보군. 하온을… 아니, 도학 선생을 오라 할 테니 마루에 가서 앉아 있어.”
“됐어. 의원에게 보일 정도는 아니야.”
일부러 윤에게 얼른 등을 지고, 무흔은 과하게 절뚝거리며 걸어 나갔다.
그에게 서운한 건 서운한 거고, 화가 나는 건 화가 나는 거다. 아무리 제 마음이 그에게 기운다 해도 당장 손발이 묶이는 꼴을 당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무흔은 마루에 오르자마자 멀쩡한 왼쪽 팔다리에 의지해 왼쪽 몸이 바닥에 닿도록 웅크려 누워 버렸다.
“정말 괜찮겠어?”
걱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무흔은 눈을 꾹 감아 버렸다.
어차피 저를 걱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꼭 필요한 지인의 능력을 염려해주는 것일 테니.
“주 국공, 내 손발을 묶으려 오늘 이리 온 것은 알겠는데… 내일로 미루면 안 될까?”
“그래. 내일로 하지.”
아예 없던 것으로 해 준단 소리는 안 하네.
무흔은 불평을 속으로 곱씹고는 더 몸을 웅크렸다. 정신적인 충격에, 마음의 상처에, 몸은 아프고, 게다가 눈물까지 뽑은 터라 가을 밤바람이 유난히 시렸다. 뼛속까지 추위가 파고드는 듯했다.
“안 되겠어. 방으로 들어가 누워.”
윤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훌쩍 가까이에서 울렸다. 무흔이 뒤를 돌아보려는데, 갑자기 몸이 번쩍 들렸다.
다른 때 같았으면 뭐 하는 짓이냐며 버둥거리거나 내려놓으라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무흔은 그럴 기운조차 없었다.
제게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는 자의 품에 안겨 이동하는 동안, 괜히 더 서러워졌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기분이 드는 것을 정말로 애써 참아냈다.
“누워 있어.”
무흔은 잽싸게 윤에게 등을 보이고 누웠다.
윤이 이불을 덮어주고, 어깨를 토닥여주고, 마지막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별채를 나섰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 다정함에 가슴이 두근거렸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무흔은 눈을 이불에 묻고 눈물이 나오는 즉시 그것을 찍어내었다.
그렇게 훌쩍이다 잠이 깜빡 들 뻔했는데, 무흔은 별채에 들어서는 발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몸을 일으켜 앉자마자 윤과 눈이 마주쳤다.
“몸은 좀 어때?”
“뭐… 그냥.”
윤의 뒤를 따라 커다란 대야와 물이 든 주전자를 든 시종들이 나타났다. 침대 아래에 앉은 그들은 더운물과 찬물을 섞어 대야의 물을 뜨끈하게 해서는 무흔의 발을 담갔다.
“하온은 오늘 진료를 할 상태가 아니고, 도학 선생은 피곤해서 이미 잠자리에 든 지가 오래라 하더군. 일단 안마사를 데려왔네. 그가 손으로 만져보면 대충 상태를 알 거야.”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저번에도 본 적이 있는 사내였다. 무흔이 지독하게 빨빨거리고 성내를 돌아다녔던 그다음 날, 발이 부어 꼼짝도 못 했을 때 하온과 사평이 데려온 그 안마사였다.
그때와 다름없이 사내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꾸벅 인사를 건넸다.
그는 따끈한 물속에 잠긴 무흔의 발을 조심스레 만져보고 반응을 살피며 주무르기 시작했다.
“별 이상 없으신 것 같습니다만, 제가 혈 자리를 눌러볼 테니 아프시면 아프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가 누르는 족족 아프기는커녕 시원할 뿐이었다. 무흔은 그날처럼 야릇한 신음을 내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있었다.
“많이 아픈 모양인데. 참지 말고 말해.”
이를 악무는 모습을 심각하게 지켜본 윤이 내막도 모르고 헛다리를 짚었다.
하는 수 없이, 무흔은 대충 아무렇게나 지르기로 했다.
안마사가 발뒤꿈치의 안쪽을 눌렀을 때였다.
“으악! 거기가 아픈데?”
“이 혈자리는 생식기입니다. 이쪽이 아프십니까?”
그럴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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