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58화 (58/85)

#058화

*

윤은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반가운 물건을 발견했다.

책상 위에 놓인 동그란 백옥 노리개. 심하게 더러워지긴 했지만 확실히 무흔이 착용하고 있던 그 물건이었다.

윤은 반색을 하며 노리개를 집어 들었다.

“이것은 은증왕이 찾던 게 아닌가?”

“맞습니까? 화재현장에서 나왔습니다.”

노리개를 찾아 들고 온 이환이 뿌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부까지 싹 다 불탔다고 들었는데 이 정도로 온전하게 남아 있을 수가 있나?”

“수레로 잔해를 실어 나르던 중, 흙더미가 잔뜩 있기에 치우는데 그 안에 파묻혀 있었다는군요.”

“흙더미가 실내에? 흠, 강문의 힘인가?”

“그날 설하 아가씨 말로는 은증왕의 지시로 강문이 마당의 흙을 아가씨 손에 잔뜩 뒤덮어준 덕에 불이 꺼졌다 했습니다. 그 흙이겠지요. 아아아아!”

“뭐야?”

“생각났습니다! 설하 아가씨가 엉엉 울기에 무슨 소린지 도무지 못 알아들었거든요. 강문과 재랑이 말하길, 은증왕께 보여드릴 물건을 화재 통에 잃어버려 속상해했다고 했어요.”

“아이들이 이걸 찾아냈을 줄이야. 녀석들… 그런 후엔 또 싹 다 까먹고 있었나 보네.”

윤은 노리개를 들어 앞뒤로 상태를 자세히 살폈다. 커다란 백옥과 그 주변을 장식하는 보석들은 온전했으나 은은한 초록빛이 감도는 백색의 실과 매듭 장식은 말도 못 하게 더러운 상태였다. 씻어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숙영부인을 불러야 하겠습니다. 이대로 돌려드릴 수야 없지요.”

지그시 미소를 짓고 있던 사평이 일어나 다가와서는 머리를 쑥 들이밀었다.

“보석은 잘 닦고 실만 동일한 매듭 장식으로 교체하면 새것처럼 반짝반짝 예쁠 것입니다. 같은 색상의 실을 구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겠습니다. 은증왕이 크게 기뻐하겠군요.”

“그렇지?”

헤벌쭉 웃던 윤은 순간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관리했다.

“흠, 일이나 내놔.”

“제가 다 처리했습니다. 확인하시고 인장만 쿵쿵 찍어주시지요.”

제게 일더미를 안겨주는 것에서 큰 기쁨을 찾는 사평이 미리 업무를 다 처리했다? 윤이 의아한 표정으로 사평을 바라보았다.

“새벽부터 은증왕과 단둘이 산에 오르셨다 들었습니다. 두 분께서 드디어 마음이 통하신 모양인데, 그 달콤한 시간을 방해해서야 쓰겠습니까. 돌아오신 후에도 좋은 시간을 보내시라 제가 특별히 배려를 해 드렸으니, 가서 즐기시지요.”

“무… 무슨 헛소리인가!”

평소보다 유난히 과한 반응을 보이며 당황하는 윤의 모습이 사평과 이환의 눈에 이상하게 비쳤다. 둘은 시선을 교환했다.

“주군, 가 보십시오. 오늘은 시찰할 것도 없고 효명군의 훈련도 잘 마무리 지었습니다, 이따 도학 선생이 마을에서 돌아오시면 관련하여 보고만 받으시면 됩니다.”

이환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군을 떠밀었지만 난데없이 귀가 붉게 달아오른 윤은 측근들의 시선을 회피했다.

어제와의 차이라면 하나뿐이었다. 무흔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깨달은 것.

대체 이 변화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윤 스스로도 난감했다.

“지금 굳이 갈 필요 없네. 이따 밤에 만나기로 하였으니.”

밤에 만난다? 그 말에 사평과 이환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

그들이 대번에 납득하고 수긍하는 데다, 무려 흡족해하고 있다니! 그 모양새가 윤의 눈에 상당히 거슬렸다.

“별채와 본채 중 어디에서 취하실 예정이십니까? 숙영부인께 노리개 수선을 부탁드리면서 준비 또한 청해야겠습니다. 역시 술상을 들이는 게 좋겠지요?”

사평이 호들갑을 떨자 옆에 선 이환이 그를 막고 나섰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목욕 직후 술이라니요. 해롭습니다! 게다가, 주군께서 은증왕을 눕히시는 데 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안 될 거라 여기시는 겁니까?”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것이지. 게다가 그 낭창낭창한 은증왕이 우리 성주님의 저 몸을 버텨내려면 맨정신엔 힘들 것이야.”

“오, 그렇게 깊은 뜻이! 허면 차라리 독주가 낫지 않겠습니까?”

“과유불급이라. 알딸딸하게 취하는 정도면 충분할 거다.”

사평은 윤이 앉아 있는 책상을 턱 소리 나게 내리쳤다.

“별채 말고, 본채로 하시지요.”

둘이 아주 쿵짝이 맞아 멋대로 지껄여대는 내용에 윤은 기가 찼다.

무슨 소리를 더 떠들어대나 어디 한 번 들어보자는 식으로 윤은 팔짱을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이환에게 들었습니다. 묶는 취미가 있으시다고. 필시 거친 행위가 이어질 것이니 귀중품이 많은 별채에서는 삼가 행동을 조심하셔야 하겠지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역시… 장사의 두뇌는 하늘이 주군께 내린 선물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보통의 포승줄을 사용하시면 은증왕의 여린 피부에 상흔이 거칠게 남을 것이니, 제가 당장 창고에 다녀오겠습니다. 분명 제의 때 사용하는 무명 밧줄이 있을 것입니다.”

“형님, 무명이라니요. 비단실로 된 것은 없습니까?”

“비단으로 된 밧줄이 있을 리가. 비단이라… 허리에 묶는 끈은 너무 가늘어 오히려 살을 파고들 것이네.”

“팔다리 묶는 정도라면야, 지금 내려가서 숙영부인께 청을 드리면 장인들을 모조리 동원하여 오늘 밤이 되기 전에 충분한 양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네도 머리를 쓸 때가 다 있구먼. 헌데… 꼭 밧줄이 아니라 하더라도, 여인들이 머리를 장식할 때 쓰는 긴 비단끈이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보다 못한 윤이 거칠게 손짓을 해 댔다.

“나가.”

“골라주십시오. 비단 밧줄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끈으로도 족하십니까?”

“간이 배 밖으로들 나왔구나.”

윤은 손을 펄럭였다. 방금 전의 손짓과는 확연히 달랐다. 책상 위에 놓인 길고 묵직한 은제 문진이 허공에 붕 떠올라서는 사평과 이환의 팔뚝을 두 대씩 번갈아 후려갈겼다.

“윽!”

“주군! 너무하십니다.”

괘씸한 것들. 윤은 그리 뇌까리며 이환의 반대쪽 팔뚝에도 문진으로 몇 번 더 매를 때렸다.

“아니, 왜 저만 더 때리십니까!”

“어디서 입을 함부로 놀려!”

“혹 저번처럼 은증왕의 손목에 족쇄를 금으로 또 채우실 겁니까?”

“나가!”

이환이 맞는 동안 사평은 책상에 놓인 노리개를 잽싸게 집어서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술상 따위 들였다간, 가만 안 둬!”

윤은 그가 나가는 뒤통수에 대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어째 다들 은증왕과 관련된 일이라면 놀려먹지 못해 안달을 내는지. 이환과 사평뿐만이 아니었다. 숙영부인과 도학 선생도 그렇고, 성 전체가 이 건에 대해 능글능글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닌 이라 하면, 성격이 참으로 진중하고 조용한 하온 딱 한 사람밖에 꼽을 수 없을 듯했다.

*

하온은 도학 선생이 마을에서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그와 동행하여 무흔을 방문했다.

무흔이 오늘 산에서 있던 일을 도학 선생한테 전부 털어놓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제 입방정을 후회했고, 제 형이 무흔보다 더 잘났다 그리 잠깐의 우월감을 느꼈던 자신을 책망했다.

괜히 산에 대한 얘길 꺼내는 바람에 윤과 무흔이 부쩍 가까워진 계기만 마련한 셈이었다.

“이게 다 도학 선생과 하온 덕분입니다. 뭐라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힘의 양이 대단할수록 제어를 익히기가 어려운 것을요. 고작 이레 만에 해내시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이라 참으로 고독하고 무료함과 싸우기도 힘들었을 것인데요.”

기특해 죽겠다는 어조가 뚝뚝 묻어나는 도학 선생의 말에 무흔의 얼굴에는 어딘지 아련한 미소가 배어났다.

“그렇지 않습니다. 고독과 무료함은 내 평생의 벗으로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줄로만 알았으나… 효명성에 온 이후로 단 한 순간도 그리 느낀 적 없어요.”

외로움을 달래주는 이가 있는 것이겠지. 하온의 머릿속에서는 성주와 무흔이 엉킨 모습이 아른거렸다. 이제 더 이상은 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인가 싶어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도학 선생이 먼저 자리를 뜨자, 무흔은 하온을 붙들고 어르신에게 마저 털어놓지 못한 제 속내를 이야기했다.

“주 국공이 다시 손발을 묶겠다고 했어. 하아… 너무하잖아.”

“아직도 도망칠까 염려를 하신답니까?”

“그런가 보지. 허, 누굴 바보 멍청이로 아나.”

“무슨 다른 뜻이 있으신 건 아닐까요? 언제 포박하실 거라 언질이 있으셨습니까?”

“오늘 밤에.”

하온은 기회를 잡았다. 머리에 반짝 스치는 생각을 바로 입으로 옮겼다.

“성주님께서 너무하시네요. 그 의중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궁금하지. 날 물 먹이려는 게 아니라면, 그 인간은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제가 성주님을 떠보지요. 때에 맞추어 몰래 성주님의 방 창밖에서 엿들을 수 있으십니까?”

“그럼, 얼마든지 가능하지. 본채 뒷마당이 여기 앞마당 아닌가.”

무흔은 하온을 꼭 안았다 놓았다.

“고마워. 매번 자네 덕분에 내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아.”

티 하나 없는 미소와 깊이 전해져오는 신뢰. 그로 인해 하온은 죄책감을 한 아름 뒤집어쓴 채로 별채를 나섰다.

*

밤이 되었다. 무흔은 마루에 나와 앉아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건너편 본채에 하온이 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윤의 침소에 불이 들어왔다. 무흔은 책을 내려놓고 신발을 신고는 최대한 기척을 죽여 마당을 건너 윤의 창 바로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으로 처소를 옮긴 이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지켜 봐온 바, 시종들은 항상 미리 연락을 받아 성주의 도착 직전에 방에 불을 올리곤 했으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사람이 안에 드는 인기척이 울렸다.

바로 이어 하온이 당도했다.

“이 시각에 어쩐 일이냐?”

“비밀리에 긴히 여쭤볼 말씀이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이리 찾아뵈었습니다.”

“그래, 앉거라.”

둘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느낌이라, 무흔은 창에 귀를 더 바짝 가져다 대고 섰다.

“그의 일로 물을 것이라도 있느냐?”

윤이 ‘그’라 지칭하는 자는 하경, 하온의 형일 것이 분명했다.

“예. 그와 더 높으신 분을 데려오기 위해 성주님의 능력을 쓰실 생각은 없으신지 알고 싶습니다.”

더 높으신 분이라면 당연히 염록왕이겠지. 무흔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갑자기 어찌 그런 것을 묻느냐?”

“다른 이를 위해 이능력을 쓰실 수 있으시다면, 그를 위해서도 써 주시기를 청하옵니다.”

하온이 윤에게 절을 올리며 간청했다. 윤은 난데없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그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바깥의 무흔 또한 영문을 모르는 채로 두 손을 꼭 맞잡고 있었다.

“성주님께서 은증왕을 각별히 아끼신다지요. 하여 그를 곁에 두시기 위해 어쩌면 희로국에서 이능력을 사용하실 거란 소문까지 암암리에 돌고 있습니다.”

“허… 너조차 그런 뜬소문을 믿는 것이냐?”

하온은 마음먹은 일을 재빨리 해치우기로 했다.

성주는 제게 솔직하지 않을 게 당연했다, 이제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던질 생각이었다. 그가 내놓을 답이 거짓이든 참이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창문 밖의 무흔은 자신의 속내를 방어하고자 하는 성주의 매몰찬 답을 듣게 될 테니.

“성주님께서는 정녕 은증왕을 은애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58)============================================================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