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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57화 (57/85)

#057화

거대한 매는 기다렸다는 듯이 푸드덕거렸다.

“으아아아!”

무흔은 질겁을 하며 뒷걸음질을 쳤고 월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윤의 팔뚝 위에서 얌전히, 조각품처럼 앉아 있었다.

“내가 싫은 건가? 똘똘한 애완동물은 주인의 마음을 따른다던데.”

“그런 거였으면 이 녀석이 그대를 부리로 콕콕 찍었겠지.”

“뭐?”

“괜찮아, 다시 해 봐. 이리 와.”

윤은 무흔의 손목을 덥석 붙들어 매의 등으로 가져왔다.

“살살, 부드럽게.”

무흔은 용기를 냈다. 윤이 손목을 잡아주고 있으니 이 매도 난동을 피우지 못할 거라 믿었다.

손끝으로 매의 머리에서부터 뒷목을 지나 등에 이르기까지, 윤에게 손목을 붙들린 채로 살살 훑어내렸다.

“어떡해… 따뜻하다. 너무 떨려.”

그러다 순간, 무흔은 제 손에서 빠져나가는 지인의 힘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지난 7일간의 수련이 헛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제는 기가 제게서 흘러나가는 순간, 이능력자와 맞닿은 부분에서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흐릿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왜 그래?”

“주 국공, 나한테서 손을 떼지 말아 봐.”

“응?”

“좀 알 것 같아서 그래. 잠시만. 어… 손을 조금만 내려서, 천천히, 내 손을 잡아 봐.”

무흔의 손목을 붙들고 있던 윤의 손은 느릿하게 무흔의 손등 위로 자리를 옮겼다. 이어 엄지 아래 둔덕을 부드럽게 훑은 윤은 무흔의 손가락 사이사이, 자신의 손가락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길고 굵게 뻗은 손가락들이 무흔의 하얀 손등을 덮어 감쌌다.

간질간질한 촉각과 함께, 예전에는 모르고 지나쳤던 기의 흐름이 분명히 느껴졌다.

“하아아아….”

무흔의 입술 사이로 떨리는 숨결이 일었다.

윤은 이를 꽉 물었다. 상대의 호흡으로 인해 묘한 흥분감이 솟은 탓이었다.

“주 국공, 그대로 있어. 도학 선생께서 이게 느껴지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라고 하셨어.”

“다음 단계?”

“혈을 닫는 거야. 지인의 힘을 가두는 거지.”

“해 봐.”

“활짝 열린 구멍을 꽉 조여주듯이….”

무흔은 가르침을 곱씹어 중얼거렸다.

너무도 집중한 터라, 저를 붙들고 있는 윤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윤의 머릿속에 떠오른 심상은 지독하게도 적나라해서, 심지어 다리 사이에 뻐근하게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무흔은 눈을 꾹 감은 채로 손바닥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하면 성공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조금만 더….”

윤과 깍지를 낀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며 무흔이 읊조렸다.

조금만 더, 하는 그 말조차 윤의 귀에 야릇하게 들어와 박혔다. 더는 참지 못하고 윤은 고개를 틀어 짧은 숨을 내뱉었다. 다른 생각을 해야만 했다.

윤은 얼른 왼팔을 높이 치켜들어 월영부터 날려 보냈다.

“어?”

무흔의 집중력이 순간 흐트러졌다. 고개를 치켜들어 하늘로 향한 월영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는 통에 하얗고 길게 뻗은 목덜미가 윤의 눈에 적나라하게 닿았다. 윤은 무흔의 목덜미에 입을 맞춰 빨아들이듯이 정화를 취했던 그날 밤을 떠올렸다.

“주 국공, 나 제대로 해 보게, 그쪽 손도 줘 봐.”

윤의 속이 어찌 끓고 있는지도 모른 채, 무흔은 윤의 빈손까지 덥석 붙들었다.

위험하다는 판단에 한 발 뒤로 물러나려던 윤은 꼼짝없이 그 자리에 얽혀 버렸다.

“꼭 이렇게 해야 하….”

“쉿!”

무흔은 윤의 양손을 잡고 있었다. 꽉 움켜쥐었더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살갗이 간질간질할 정도로 두 손이 아슬아슬하게 맞닿아 있었다.

지인의 기에 집중하고자 무흔이 그리한 것이었지만, 윤의 입장에서는 제대로 죽을 맛이었다.

무흔의 감은 두 눈 아래 하얗고 길게 뻗은 빼곡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눈두덩 위에 살포시 제 입을 맞추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어오르던 차였다.

“어….”

소리를 내어 반응을 먼저 한 쪽은 윤이었다.

맞잡은 손에서 일렁대며 넘어오던 정화의 기운이 일순간 사라졌다.

“성공이야!”

무흔은 펄쩍 뛰며 윤을 꽉 끌어안았다 놓고는, 자신의 손바닥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주 국공, 방금! 느꼈지? 차단을 했어, 내가!”

윤은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지 않으려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윤이 의문을 품은 순간, 한껏 신이 난 무흔은 발뒤꿈치를 들어 까치발을 하고서는 팔을 높이 뻗었다.

하얀 두 손이 윤의 얼굴을 감쌌다.

“손 말고 다른 데도 가능한지 보자!”

무흔이 눈을 꼭 감고서는 손바닥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다시 한 번, 아까와 꼭 같았다.

짜릿할 정도로 황홀하게 넘어오던 맑은 기운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윤은 제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상실감임을 깨달았다.

이번에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저와 무흔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 끊어져 버린 것만 같아,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성공이다!”

무흔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그 자리에서 황실 무희처럼 빙그르르 돌았다.

그러더니, 오전 내내 앉아 기를 느끼겠다며 명상을 하던 그 넓적 바위 위에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부좌를 틀고, 두 손을 자연스럽게 양 무릎에 얹은 채 힘을 뺐다.

“우와… 아하하하!”

우려와는 달리, 한 번 터득한 요령이 연기처럼 사라지진 않았다. 힘의 방출을 제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무흔은 그 원리를 확실히 깨달았다.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몇 번이고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면서, 혼자 바보같이 웃고 또 웃었다.

그제야 배고픔이 밀려들었다. 아까 보았던 토끼고기가 간절해진 무흔은 불향 가득한 고기 쪽으로 홀린 듯이 다가섰다.

“주 국공, 그… 고기는… 다 구워졌네?”

“축하해. 한 발 떼는 데 참 오래 걸렸군.”

무흔은 윤이 불에서 고기를 내리는 것을 황홀하게 지켜보았다.

“진작 주 국공을 모셔다 놓고 해 볼 걸 그랬어.”

“도학 선생이 그것을 몰라 날 부르지 않으셨겠는가. 어제까지의 긴 노력이 없었으면, 오늘 나와 닿았다 하여도 제어의 이치를 깨닫지 못했을 거야. 시간을 헛되이 보냈다 생각하지 마.”

“주 국공, 지혜로운 구석이 있네?”

“이거 먹어. 저것도 이따 챙겨가.”

해가 닿지 않는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가운데가 움푹하게 패인 돌 위에는 무흔이 애지중지 모았던 열매들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주 국공!”

“독이 있는 건 버렸어.”

“오늘 정말 여러모로 고마워.”

무흔은 진심을 담아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동안 내내 윤이 저를 향해 날을 세웠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고기도 구워주고 열매도 챙겨주고.

사람이 달리 보였다. 게다가 웃기까지.

무흔은 고기를 뜯으면서도 몰래 의심스런 눈길로 윤을 훔쳐보았다.

‘분명 나를 멀리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 오늘 그 잠깐 사이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얼른 도학 선생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무흔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산을 내려왔다. 위험하다, 그러다 발목을 접질린다, 하는 윤의 잔소리까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정도로 마음이 바빴다.

그러다 산을 다 내려와서 효명성에 들어와서야 퍼뜩 생각났다.

무흔이 발을 멈추어 선 곳은 지난번 윤과 함께 들어갔던 욕탕 건물 앞이었다.

“아악! 어떡해!”

무흔은 원망스런 눈길로 옆에 선 윤을 올려다보았다.

“왜?”

“폭포와 온천이 같이 있다는 거기! 내려올 때 거길 들렀다 오기로 했잖아.”

“아….”

“아아아? 기억 안 나는 척은. 내가 얘기 안 하니까 슥 지나쳐 온 거 아니야?”

“아깝게 됐네.”

“다음에 가. 다음도 있는 거지? 이번 한 번만 가는 거라고 그러긴 했지만, 그래도 한 번 정도는 더 데려가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산 정상에도 못 올라가 봤고, 애초에 폭포와 온천은 내게 꼭 보여주기로 했던 거잖아?”

무흔은 말을 쉴 새 없이 쏟아냈다. 혹시라도 윤이 안 된다 하면 어쩌나 하는 조급함이 솟구쳤다.

“봐서.”

“그런 답이 어딨어? 애초에 하산 때 들르기로 한 거였잖나. 주 국공, 혹시 기억하고 있었으면서 내가 그 샛길을 휙 지나쳐 내려가는데도 안 잡은 거야?”

“나도 기억이 안 났어.”

“웃기고 있네. 주 국공은 매일 새벽마다 가는 곳이라며. 매일 가는데, 오늘 유일하게 안 간 날인데 기억이 안 났다고?”

윤의 온 신경은 내내 무흔에게 쏠려 있었으니 기억이 나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하산은 내리막길인데, 무흔의 한 손은 열매가 든 옷자락을 애지중지 안고 가느라 쓸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윤은 아무래도 불안하여 혹시라도 무흔이 발을 헛디디는 것은 아닌지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런 윤의 마음 따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무흔은 윤에게 손가락질까지 해가며 강하게 주장을 펼쳤다.

“애초에 산에 데려가겠다는 약조에는 폭포와 온천이 포함이었어. 난 그걸 다 받아야겠으니, 내일 다시 올라가자.”

“약조를 들먹이는 거라면, 그대도 지금 당장 이행해야 할 게 있는데?”

“당장?”

윤이 무흔의 손목을 냅다 붙들었다.

손목 발목에 채울 족쇄 얘길 채 꺼내기도 전에 지인의 힘부터 대번에 옮겨갔다.

무흔은 당황하지 않고 아까 열심히 익힌 대로 힘의 방출을 단번에 차단했다.

“흥!”

고개를 쳐들고 의기양양하게 코웃음을 치자 윤 또한 지지 않고 씩 웃어 보였다.

둘의 분위기가 사뭇 묘한지라, 근방의 이들이 모두 걸음을 멈추고는 그들을 훔쳐보는 중이었다. 그 시선을 눈치챈 윤은 고개를 틀어 무흔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남들이 들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그 귓가에 속삭였다.

“그대가 지인의 제어를 익히고 나면, 다시 손과 발에 족쇄를 채우기로 약조했었지.”

“아….”

“처소에 얌전히 가 계시게. 이행은 밤에 하도록 하지.”

“산은?”

“그것도 밤에 얘기해. 난 그대 때문에 당장 오늘의 일정이 너무도 많이 밀렸으니.”

윤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기 창고를 지키는 병사들의 인사를 받자마자 손짓을 하여 그들 중 둘을 불렀다.

“은증왕을 내 처소 안쪽의 별당에 모셔다드리거라.”

“예, 주군.”

“가다가 주방에 들러 그릇이라도 하나 챙겨 가든가.”

윤은 무흔이 소중하게 품고 있는 열매를 눈짓으로 가리키고는 자리를 휙 떠나 버렸다.

병사들을 양쪽에 낀 채 입을 삐죽 내민 무흔은 길 건너편에서 반가운 이를 발견했다. 팔을 치켜들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하온! 하온! 할 말이 있어!”

무흔이 대번에 의원에게로 달려가자 하는 수 없이 병사들도 그 뒤를 따랐다.

“나 성공했어! 드디어! 산에서! 자네 말대로 산이 효과가 있었어!”

“축하드립니다.”

“도학 선생께선 언제 마을에서 돌아오시나? 오늘이라고 들었는데?”

“날이 저물기 전에 오실 것입니다.”

“오시는 대로 별당으로 와 달라 얘길 전해줄 수 있어?”

“그리하겠습니다. 드디어 성공이군요. 정말 잘됐습니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하고 무흔이 돌아섰다. 병사들에게 주방의 위치를 물어 그리로 방향을 돌리는 그 뒷모습을 하온은 지그시 바라보았다. 눈빛에 서늘한 기색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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