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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56화 (56/85)

#056화

윤은 길옆으로 한 발 물러나 앞을 향해 팔을 뻗었다.

“여기서부터는 외길이니, 은증왕이 한 번 앞서가 보겠는가?”

“좋지.”

무흔의 발걸음이 대번에 가벼워졌다.

룰루랄라 걸어 나가는 그 뒷모습에, 살짝 엿보이는 발그레한 무흔의 뺨에 윤은 심장이 더 두근거렸다. 여전히 산이 신기한 듯 반짝거리는 저 눈동자에 발목이 다 붙들리는 기분이었다.

“주 국공! 여긴 처음 보는 풀들이 너무 많아. 이럴 줄 알았으면 식물에 대한 책도 자세히 읽어둘 걸 그랬어.”

“의원이 될 것도 아닌데. 풀은 알아서 어디에 쓰나.”

“신기하잖아.”

무흔이 앞서나가기 시작하니, 이제는 영 전진이 되질 않고 있었다. 두세 걸음 가다 말고 멈춰 서서 들풀을 들여다보고, 또 서너 걸음 가다 말고 처음 보는 나무라며 만져보고 나뭇잎을 구경하고. 게다가 여전히 버섯에 집착하고.

“그만 좀 가지?”

“언제 또 산에 올 수 있을 줄 알고? 사람들한테 듣자 하니 곧 사신단이 돌아온다던데. 이게 마지막일지 모르니까… 그쪽이 이해 좀 해 줘.”

“아니, 애초에 여기 올라온 목적이라는 게 있지 않나?”

“아.”

무흔은 산에 정신이 팔려 까맣게 잊고 있던 그 목적을 떠올렸다.

“일단 올라가서, 최대한 빨리 성공해내면 그만큼 산을 구경할 시간도 늘겠지. 이래서야 원, 해지기 전에 내려올 수나 있겠나.”

“애초에 산에 그냥 올라와서는 안 됐어.”

“응?”

“만반의 준비를 하고, 먹을 것과 수통을 챙겼어야 하는 건데.”

“하긴… 은증왕께선 먹는 게 중하시지.”

윤이 말끝에 피식 웃음을 흘리는 것을 무흔은 대번에 눈치챘다. 눈을 흘겨주고, 걸음을 옮기며 꼭 끌어안고 있는 열매를 한 알 입에 넣었다.

“먹지 마.”

“왜.”

“그 안에 독 있는 열매가 섞였다니까.”

“내가 알아서 아까 먹어봤던 것들만 골라서 먹는 거야. 누굴 바보 취급 하나.”

“지금이라도 골라내서 버려.”

“되게 잔소리하네.”

윤의 참견질이 못마땅하다는 듯, 무흔은 성큼성큼 보폭을 늘려 앞서나갔다. 옆에 보고 싶은 것들이 널렸지만, 꾹 참고 일단 목표 지점까지 향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이고, 힘들다.”

곡소리가 절로 나왔다. 무흔은 열매를 옷자락에 바리바리 싸 들고 걷는 건 산행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 중이었다. 깊이 들어갈수록 산세는 점점 험해졌다. 산이 처음인 무흔이 편히 오를 수 있는 길은 절대 아니었다.

“잠깐만, 하아, 하아, 좀 쉬었다 가자.”

무흔은 앉을 만한 바위가 눈에 띄기 무섭게 엉덩이를 붙이고 숨을 몰아쉬었다.

“겨우 요만큼 와서?”

“난 발도 아프다고. 아침을 먹고 왔어야 했어. 열매 몇 알로는 힘이 안 나.”

“조그마한 뒷산 좀 오르는 거 가지고 참. 애들도 쉽게 다니는 곳인데.”

무흔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윤은 아까부터 몇 번이고 망설이던 것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데려다줄 테니 얌전히 있어.”

그가 무흔을 번쩍 들어 안았다.

“주 국공! 지금 뭐 하는 거야!”

“열매 딴 거 쏟아 버리고 싶지 않으면 꼭 쥐고.”

“으아악!”

“얌전히 좀 있어 봐.”

“놔!”

무흔이 당황하여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하는 데다 난동을 피우자 윤은 결국 공주님이라도 모시듯 두 팔로 고이 받쳐 들었던 무흔을 짐짝처럼 한쪽 어깨에 짊어졌다.

무흔의 긴 다리와 엉덩이가 윤의 앞쪽으로, 허리에서부터 머리까지는 윤의 등 뒤로 늘어졌다.

“이게 무슨 짓이야!”

“더는 지체 못 해. 산 아래에서 기다리는 이들이 걱정할 거고. 좀 가십시다. 얌전히 힘 빼고 경치 구경이나 해.”

윤이 무흔을 들쳐메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윤의 몸에 얹힌 채 난리를 치던 무흔은 결국 몸에 힘을 뺐다. 윤의 두 손이 제 몸을 붙들고 있는 게 느껴져서 그게 좀 어색하지만, 들려서 이동하는 것이 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곱게 안았을 때 얌전히 있을걸.

다시 아까처럼 예쁘게 안아달라고 요청할 수는 없는 터라, 무흔은 얌전히 등에 대롱대롱 매달려 윤의 말대로 산을 구경했다.

“주 국공, 저기 보라색 열매가 있는데?”

“내려갈 때 따먹어.”

“이 길로 다시 내려오는 거 맞지?”

“응.”

“어? 주 국공, 방금 지나온 곳, 저 옆에 길이 하나 있는데 저긴 뭐야?”

“폭포랑 온천 가는 길.”

무흔은 쿵, 하고 심장이 울리는 듯했다. 폭포에, 게다가 온천이라니!

지금 엄청 무심한 말투로 이야기한 것이 무엇인지 주 국공 본인이 모를 리 없었다.

“내려줘!”

“얌전히 있어. 이따 내려갈 때 들러.”

무흔은 열매를 쥐고 있지 않은 쪽의 손을 주먹 쥐어 윤의 등을 쿵쿵 내리찍었다.

“지금 보고 가!”

무흔이 난동을 피울수록 그 몸을 붙들고 있는 윤의 손과 팔에는 힘이 더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윤이 무흔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고 나서야 무흔은 잠잠해졌다.

“더러운 변태 새끼!”

“여기서 땅으로 떨어지면 그냥 타박상 입는 걸로 안 끝나. 비탈에서 데굴데굴 굴러가 팔다리 부러지고 싶어?”

“이제 얌전히 있잖아. 엉덩이에서 손 떼!”

“다 왔다.”

윤이 무흔을 꼭 끌어안아 조심스레 땅에 내려놓았다.

무흔은 머리의 방향이 바뀌며 아찔한 기분이 일었다.

짧게 어지러움이 이는 순간, 두 발을 땅에 대고 막 선 채로 윤에게 의지하여 그의 팔을 꼭 붙들었다.

“하아….”

안도의 한숨이었는데, 윤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얼굴을 가까이해 무흔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

“괜찮지 그럼!”

갑자기 훅 들어온 얼굴에 오히려 당황한 무흔은 열매를 칭칭 동여 싼 옷자락을 꼭 쥔 채로 뒤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순간 뒤로 디딘 발이 편평하지 못한 바위의 폭 꺼진 부분에 닿았다. 동시에 무흔의 몸이 뒤쪽으로 휘청 넘어갔다.

“으아아!”

“위험해!”

윤이 팔을 쭉 뻗었다. 뒤로 넘어가려는 무흔의 등을 받쳐서는 단번에 자신의 몸쪽으로 확 끌어안았다.

“고, 고마… 고마워.”

두근두근두근두근, 심장이 몸 밖으로 나온 듯이 뛰고 있었다. 방금 무슨 정신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 무흔은 잠깐 다시 생각을 해야 할 정도였다.

아슬아슬한 간격 탓에 오히려 꼼짝도 하지 못하고 숨을 참았던 윤은 얼른 무흔을 놓아주었다.

둘의 몸이 붙었다 떨어지는 그 순간, 붉은빛 주홍빛의 동그란 열매들이 후두두둑 발치로 쏟아져버렸다.

“내 열매!”

지금껏 애지중지 곱게 모셔 들고 챙겼던 온갖 열매들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아까워라.”

무흔은 완전히 울상이 되어 눈이고 입매고 어깨고 죄다 축 처져 버렸다. 보다 못한 윤이 무흔의 등을 휙 돌려 떠밀었다.

“명당은 저쪽이야. 이리 와.”

무흔은 입이 툭 튀어나온 채로 윤이 가리키는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잿빛 바위는 제법 널찍하고 평평해 사내 셋은 다리를 쭉 뻗고 편히 앉을 수 있는 크기였다.

울긋불긋한 단풍과 바위산이 어우러진 풍경이 시야에 아름답게 들어찼고, 어디선가 그득한 향내가 풍기는 듯도 했다.

무흔은 멀리서 들리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림으로만 보았던 그 계곡인지 폭포수인지, 혹은 작은 개울일지. 상상만으로도 설렜다.

그 와중에도 무흔은 아쉬워 죽겠단 얼굴로 흩어진 나무 열매들을 바라보았다.

“배고프신가?”

“그래서 이러는 게 아니거든?”

“그럼?”

“내가 내 손으로 수확한 첫 열매라고.”

“그쪽이 기른 것도 아니잖나?”

“어… 그러니까… 채집이야!”

윤이 웃음을 터뜨렸다. 비웃음 혹은 박장대소가 아니라, 귀여워 죽겠다는 식의 따뜻하고 포근한 미소가 가득히 어렸다.

그 미소에 무흔은 반대로 꿍꿍이를 의심했다. 정색하며 물었다.

“뭐, 뭐야? 갑자기 왜 그러는데?”

“도학 선생께 배운 대로, 제대로 앉아서 올바른 호흡을 하고 눈을 감아. 몸을 타고 도는 기를 느껴 봐. 첫발이라도 떼어야 그다음으로 나가지.”

그 속내가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어찌 되었든 윤의 말이 옳았다. 뒤를 한 번 더 돌아보며 열매에 대한 아쉬움을 삼킨 무흔은 단념하고 눈을 감았다.

깊은 호흡부터 하고, 지난 며칠 동안 도학 선생에게 꾸준히 들었던 방법들을 차근차근 실행해나갔다.

‘확실히 다르다. 별채에 틀어박혀 있을 때랑 달라. 뭔가 잡힐 듯이 안 잡히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희미하게나마 뭔가 느껴져.’

무흔은 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배가 고팠던 것도 잠시, 어느 순간 싹 잊었다.

태양의 위치가 바뀐 것이 확연히 느껴질 정도로 시간이 흘렀건만, 성과는 없었다. 무흔은 안 되는 일에 집중하느라 힘이 쭉 빠져 버렸다.

그러다 순간, 눈을 번쩍 떴다.

“이게 무슨 냄새야?”

고기였다! 불과 연기, 그리고 고기. 무흔은 벌떡 일어났다. 두리번거렸으나 시야가 닿는 곳에 윤은 없었다.

연기를 따라서 홀린 듯이 걷다, 문득 바닥을 보았다.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열매를 다 치웠나?”

걸음을 빨리해 연기가 나는 곳에 이르자, 윤이 불 앞에 서서 고기를 살피고 있었다.

“주 국공?”

“먹을 때 하나는 귀신같이 아는군.”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기가 긴 나무 꼬치에 꿰여 통으로 불에 구워지는 중이었다. 홀린 듯이 다가간 무흔은 대체 저 작은 짐승의 정체가 무엇인지 고민했다.

“토끼고기야.”

“야만인!”

“먹지 말든가.”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는데! 무흔은 고개를 쳐들었다. 하늘을 날던 매가 내려와 윤의 어깨에 앉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우으아아, 놀래라.”

무흔은 저도 모르게 심장으로 손을 가져갔다.

짙은 밤색의 거대한 매는 당장에라도 사람의 명줄을 끊을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윤이 팔을 내밀자 매는 가뿐하게 날아 팔뚝에 내려앉았다.

“크다….”

“이 녀석이 토끼를 잡아다 줬어.”

“어떻게 산으로 부른 거야?”

“피리가 있거든.”

윤이 목에 걸린 아주 작은 나무 피리를 꺼내 보였다.

“이걸 불면 찾아와?”

“월영은 영특하니까.”

“만져봐도 될까?”

윤이 월영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저 사람이 네게 인사를 할 거야. 놀라게 하지 말고, 따뜻하고 순수한 사람이니까 잘 받아줘야 한다.”

매에 다가가고 싶은 마음 반, 두려움이 솟아 긴장하고 있던 마음 반이었는데. 무흔은 윤의 다정한 목소리에 용기가 났다.

눈이 마주치자 윤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무흔에게로 한 발 다가섰다.

무흔은 그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통에 한 발짝도 뗄 수 없는 상태였으니.

맥이 마구 날뛰는 것이 무시무시한 월영 때문인지, 그 매의 주인 때문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안녕. 나는 무흔이라고 해.”

맹금류에 다가서는 것은 쉽지 않았다. 무흔은 책을 읽는 듯한 인사부터 건네고, 슬쩍 눈을 들어 윤을 보았다. 제 어색한 말투에 이미 저쪽은 웃음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렇게, 만져봐. 쓰다듬어.”

윤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먼저 시범을 보였고, 무흔은 바들바들 떨며 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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