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화
무흔은 최대한 무던한 척,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속내를 숨기려 애썼다.
너무 신나게 좋아했다가는 그 꼴이 보기 싫다고 말을 뒤집어 저를 돌려보낼지도 모를 일이니까.
“주 국공, 산은 여기서 먼가?”
“별로.”
“산세는 험해? 오르막길이 가파른가?”
“별로.”
“그곳까지 오래 걸리나?”
“별로.”
“주 국공.”
“왜.”
“답을 하는 게 귀찮아?”
“별로.”
“왜 자꾸 별로, 라고 하는데?”
무흔이 들뜬 것은 당연했다. 그토록 바라던 산에 오르는 것이었으니.
윤은 아니었다.
새벽에 난데없이 나타난 고운 얼굴에 덜컥 마음이 흔들려, 지금 이렇게 무흔을 데려가는 것이 옳은 판단인지 아닌지 걸음을 한 발짝 옮길 때마다 끊임없이 고민 중이었다.
“은증왕, 조용히 가지. 나는 매일 수련을 해야 해. 그대도 놀러 가는 건 아니지 않나? 끊임없이 말을 늘어놓으면 머리를 비우기 힘들고 마음도 어지러워지는 법이니까.”
무흔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조용히, 입을 꾹 다물고 윤의 뒤를 따랐다.
단순히 타박을 당한 것이 속상해서는 아니었다.
윤이 탈주 사건 이후로 줄곧 제게 화를 내는 것도, 태도가 바뀐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그것이 어쩌면 단순히 배신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새로이 샘솟은 생각 하나가 무흔의 마음 한구석을 쓰리게 갉아먹기 시작했다.
*
산어귀에 도착할 때까지 둘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윤은 그저 한 번씩 뒤를 돌아보며 무흔이 잘 따라오는지를 확인했고, 무흔은 입을 꾹 다문 채로 제겐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던 구역을 반짝이는 눈으로 뇌리에 새길 뿐이었다.
“이쪽으로.”
윤이 가리키는 쪽으로 산의 진입로가 뻗어 있었다.
드디어 산이다.
무흔은 벌써부터 양 뺨이 상기되어서는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흙을 밟았다.
묻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앞서 올라가는 매정한 등짝을 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심장이 저릿했다. 그것이 온몸으로 자꾸만 퍼져가는지라, 무흔은 일단 저를 감싼 이 산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우와! 주….”
무흔은 산 초입에서부터 이름 모를 빨간 열매가 가득 매달린 나무를 발견했다. 신이 나서 윤을 부르려다 말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본 윤은 덤불에 달라붙다시피 한 무흔을 발견했다. 곧 따라오겠거니, 하며 평소와는 달리 아주 느릿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랬건만. 스무 걸음 좀 못 되게 걸었을까, 응당 뒤에 따라오고 있어야 할 인기척이 들지 않았다.
놀란 윤은 무흔을 찾아왔던 길을 얼른 되돌아 내려갔다. 산에서 길을 잃으면 낭패였으니.
그가 무흔을 발견한 곳은 아까의 그 덤불 앞이었다.
“은증왕! 뭘 하느라 안 올라오는데?”
“아… 미안. 따라갈게.”
무흔이 소매 안쪽에 무언가를 숨기고 허둥지둥 윤을 따랐다.
그렇게 한참을 또 올라가다가 윤은 뒤가 조용한 것을 깨닫고 걸음을 멈추었다.
“이 인간이 대체….”
이번에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무흔을 찾아낸 곳은 길에서 벗어난, 더 깊숙한 숲이었다. 새하얀 머리카락에, 새하얀 옷 덕에 그나마 빨리 찾은 것이었다.
“주 국공, 내가 버섯을 발견했어!”
산속, 습하고 해가 덜 드는 구역은 어딜 가나 버섯 천지라는 것을 무흔이 알 턱이 없었다. 눈이 초롱초롱하여 양손 가득히 버섯을 따고 있었다.
“바구니를 들고 올 걸 그랬네. 주 국공, 혹시 땅에서 철 같은 것을 뽑아내어 둥글고 깊은 그릇 같은 것을 만들어줄 수 있나?”
“하아… 그 버섯을 다 먹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
“독버섯도 있는 거야? 알록달록한 건 하나도 따지 않았어. 책에서 봤거든.”
“그쪽 손에 들린 건 환각을 일으키는 버섯이야.”
후두둑.
무흔의 왼손에 있던 버섯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만 가지. 이래서 어디 해지기 전에 도착하겠나.”
“하지만 나무에서 자라는 버섯은 처음 보는데.”
“다른 건 처음 안 보고? 산엔 돌만큼 널린 게 버섯이야.”
“아까워라….”
“나중에 산에 갇히거든, 불 피우고 구워 먹든지. 지금은 올라와!”
윤은 버럭 신경질을 냈다. 무흔이 산에서 혹 길을 잃은 것이 아닌가 순간 심장이 철렁하도록 걱정했었는데, 버섯 타령을 하고 있을 줄이야.
“뭐, 뭘 이런 걸 가지고 화를 내고 난리야.”
버럭 신경질을 내며 앞서가는 윤을 보고도 무흔은 크게 맞받아치지 못했다. 아까 스쳤던 생각이 마음을 짓누르자 찌르르한 쓰린 느낌이 심장에서부터 또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겉옷 소매 안쪽에 모아둔 것을 윤 몰래 확인하고, 다시 그를 따라 걸어 올라갔다.
윤은 그로부터 두 번이나 더 한 자리에 머무른 무흔을 찾아 되돌아 내려가야만 했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아직 산의 초입조차 다 지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 세 번까지는 참았으나, 네 번째는 아니었다.
윤은 산딸기 덤불 앞에 쪼그리고 앉아 알알이 맺힌 빨간 열매를 옷자락에 열심히 담고 있는 무흔을 정말로 힘들게 발견했다.
“은증왕.”
무흔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막 딴 열매를 톡 떨어뜨렸다.
“하하, 열매를 모으는 데 집중하느라 그만.”
“전생에 다람쥐셨나. 하아.”
윤은 무흔의 옷자락에 그득히 쌓인 색색의 열매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갖가지 종류가 모인 것으로 보아, 지금껏 올라오면서 내내 숨겨왔던 모양이었다.
“버섯을 보고 화를 내길래. 열매를 버리라고 할까 봐, 하하, 걸렸네.”
“죽고 싶은 건가?”
“뭐라?”
윤은 무흔이 모아놓은 열매들 중, 다홍빛으로 물든 것을 가리켰다.
“저걸 먹고 죽기라도 한다면, 포로 교환은 없던 일이 되겠지. 나보고 그 책임을 지라는 건가.”
“말 한 번 더럽게 예쁘게 하네.”
무흔은 제법 묵직하게 열매가 모인 겉옷자락을 둘둘 말아 쏟아지지 않도록 손으로 조심스레 안았다.
“딴짓 안 하고 따라갈 테니까. 걸어.”
무흔의 얼굴에 우울함이 내려앉았다. 난생처음 오르는 산에 홀딱 빠져들어서는 정신을 놓을 정도로 신나 하던 그가, 발끝만 내려다보며 윤의 뒤로 가 섰다.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바스락바스락 발소리를 내며 둘은 산을 올랐다.
윤은 문득 그 적막이 미안해졌다.
그토록 고대하던 산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이 당연할진대. 너무 타박을 준 게 사실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제 쪽에서 먼저 치면 저쪽에서 지지 않고 들이받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오늘은 종일 무흔이 저자세였다.
“열매를 그리 많이 따서 무얼 하려고.”
분위기를 풀어보려 윤이 짜증기를 쏙 뺀 목소리로 질문을 건넸다.
무흔은 힐끗 그를 올려다보고서는 팔에 가둔 열매를 더 조심스레 품었다.
“조반을 먹지 못하고 산에 올랐잖아. 찬합에 도시락을 싸 온 것도 아니고. 종일 그 명당에서 기와 씨름을 해야 하니 배를 채울 뭔가가 있어야지.”
“아, 그래서 버섯도 그렇게 캐려 한 건가?”
“뭐 그런 셈이지.”
그것으로 다시 대화가 끊겼다. 무흔은 좌우로 열심히 눈을 굴려 산의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묻고 싶은 것, 들여다보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입을 꾹 다문 채로 발만 바삐 놀렸다.
둘 사이에는 또 침묵이 감돌았다.
“은증왕.”
이번에도 먼저 말을 건넨 쪽은 윤이었다.
“왜?”
“오늘은 왜 이리 조용한가? 아침에 날 찾아와서 기세 좋게 산에 데려가 달라 할 때까지만 해도 참 요란하더니.”
“아….”
무흔은 안전성이 입증된 산딸기를 세 알 오물오물 씹어 삼켜 입을 축였다.
“주 국공 보기에 내가 새삼 불쌍한가?”
“왜 얘기가 그렇게 되지?”
“말도 이리 다 걸어주고. 주 국공은 은근히 착한 심성이 남아 있단 말이야.”
“뭐라?”
“내게 참으로 잘해주던 그대가… 언제부터인지 매번 화를 내고 또 눈도 마주치지 아니하며 매몰차게 굴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야.”
윤은 뜨끔했다. 제 미숙한 마음을 눈치챈 것인가 하여.
괜히 겁이 나 아무 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말없이 걸음을 옮기는데, 무흔이 뒤에서 조용히 읊조렸다.
“내 평생, 이런 일 한두 번 겪었을 것 같나. 이제 제법 내성이 생겼달까. 처음엔 동정심으로 내게 잘해주던 이들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발을 빼려 하지. 저주란 그런 거야. 다들 어느 순간 이리 가까이 지내도 되는가 하여 덜컥 겁이 난다고들 하더군.”
그런 게 아닌데.
윤은 대체 무슨 답을 어떻게 해야 무흔이 자학으로 빠져드는 것을 멈추게 하고 제 비루한 속내는 드러내지 않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날 멀리하려 드는 거, 당연한 일이야. 미안하게 생각할 거 없어.”
“당연하다니?”
“다 이해해.”
윤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해? 지금 무슨 소리를….
“강문, 설하, 재랑이… 그 아이들도 아직은 어려서 아무것도 모를 때니까 나를 열심히 찾아오고 또 반가워하는 것이겠지. 자라고 철이 들면 자연스레 내게 걸음하지 않을 거야.”
무흔의 목소리가 꼭 울 것처럼 들렸다. 윤의 마음에 그를 꼭 끌어안아 위로하고 싶은 충동이 솟는 순간, 무흔의 입술이 한 번 더 달싹였다.
“그대라고 남들과 다르겠는가.”
윤이 걸음을 멈추었다. 눈을 내리깔고 발밑만 바라보며 돌과 흙이 섞인 길을 조심스레 오르던 무흔은 윤의 몸에 툭, 부딪쳤다.
“엇, 미안.”
무흔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윤의 얼굴을 살폈다.
“왜?”
윤의 표정은 해석하기 참 애매한 상태였다. 그가 멈칫하더니만 어색하게 몸을 반 정도 틀어 앞에 놓인 비석을 가리켰다.
윤의 허리께까지 오는 지표석이었다.
“여기… 여기서부터, 나 외에 다른 이들은 출입금지야.”
윤은 일단 그리 둘러댔다.
좁은 샛길이 하나 우측으로 갈라져 났고 그 앞에 시커먼 돌비석이 하나 서 있었다.
무흔은 허리를 숙여 돌에 적힌 내용을 읽었다.
“효명 성주 외 출입을 금한다. 아, 이쪽으로 가면 그 기의 명당이라는 곳이 나와?”
“응.”
“성주의 권한으로 독점하는 거야?”
무흔의 목소리에 다시 장난기가 섞여들었다. 윤은 그제야 마음이 좀 놓였다.
그러다 말고, 이번엔 자신의 속내가 이상하게 여겨졌다.
무흔이 울적한 것이 싫고 기운을 찾은 것이 좋아 보인다?
단순한 동정심으로 치부하기엔 기분이 이리 파도처럼 울렁대는 것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제 안의 솔직한 감정을 이제는 마주하기로 했다.
내가 그대를 좋아하나 보다.
인정하는 순간, 머리가 한없이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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