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화
*
무흔은 온종일 가만 앉아 제 몸을 두르고 있는 지인의 힘을 느끼려 애썼다.
하지만 아침이 지나 오후가 되고, 또 해가 저물도록 진전이 없었다.
간절함을 듬뿍 품고 노력했건만. 결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첫술에 배부를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그만 쉬시지요.”
내내 곁에 같이 있어 주었던 도학 선생이 위로를 건넸지만 무흔은 침울한 표정을 거둘 수가 없었다.
“다들 이리 잘 못 합니까?”
“허허, 하루 만에 대뜸 성공하는 치유자는 내 평생 단 한 명밖에 보지 못하였습니다. 본디 쉽게 익힐 수 있는 게 아니지요.”
“그런가요.”
“나이가 어릴수록, 힘의 양이 적을수록 자연스레 빨리 터득합니다. 은증왕께는 둘 다 해당되질 않는 셈이라. 허허.”
무흔은 저를 한껏 비웃으며 돌아간 윤을 떠올리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한쪽 입꼬리가 얄밉게 올라갔던 그 잘난 낯짝을 떠올리니 분이 다 치밀어올랐다.
어떻게든, 반드시, 내일은 성공하리라! 그리 다짐했다.
“이리 틀어박혀 있으니 더 힘드실 겁니다. 바깥의 기가 잘 통하는 자리를 찾아보지요. 국공에게 부탁해보리다.”
살펴 가십시오, 하고 인사는 꾸벅했으나, 무흔은 외출에 대한 기대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주 국공이 허락할 리가 있나.”
금사슬로 칭칭 감긴 옥피리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났다. 움직일 때마다 팔뚝이 욱신거리기는 하지만, 오늘 밤은 두 손이 자유로우니 다른 것으로 괴롭혀줄 테다.
무흔은 밤이 깊기를 기다렸다. 그사이 윤이 쳐들어와서 손발을 다시 감아놓겠다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술시(戌時)가 다 지나가도록 그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오늘은 당연히 이거지!”
곱고 아름다운 악기의 몸체에 상처를 낼 걱정이 없으니. 무흔은 처음부터 눈독을 들였던 금(琴)을 꺼내 들고 마루로 나가 앉았다.
“달도 밝고, 좀 춥긴 한데… 뭐, 괜찮아.”
옆면이 자개로 화려하게 장식된 긴 현악기를 내려놓고, 그 앞에 자리 잡았다. 이것이 얼마 만에 뜯어보는 줄인지!
윤의 침소와는 고작 마당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이었다.
무흔은 어제보다 좀 더 으스스하고 을씨년스러운 가락을 얹어 현을 튕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다경(15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횃불을 든 한 무리의 병사들이 윤의 처소를 지나 마당으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무, 무슨 일인가?”
그 기세가 제법 위협적인지라, 무흔은 연주를 멈추고 놀라 물었다.
“별당의 악기를 모조리 거두어 오라는 주군의 명이 있었습니다. 이리 내어주시지요.”
“뭐라?”
무흔은 벌떡 일어나 본채 쪽을 바라보았다. 분명 이곳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청소 담당 여종이 말했었다. 모든 악기를 다 연주해도 된다는 허락이 있었다고.
그에 대해 따지러 가려는데, 험악한 인상의 병사 둘이 무흔 앞을 가로막고 섰다.
“손목을 이리 내십시오.”
상대의 손에 들린 것은 가느다란 밧줄이었다. 무흔은 기가 차다는 듯이 고개를 젖혀 웃고, 양손을 허리에 짚었다.
“허, 거 참….”
행동으로 먼저, 그런 다음엔 말로 한 번 더 시간을 끄는 듯이 연기를 하고. 무흔은 두 병사 사이를 날쌔게 빠져나와 마당을 가로질러 단번에 윤의 침소까지 이르렀다. 신발도 신지 않은 채였다.
한 번 와 본 적이 있으니 희미하게나마 구조를 기억하고 있었다. 무흔은 익숙한 그 방문을 벌컥 열어 안으로 들어섰다.
“주 국공! 아니, 사람이 대체… 헉!”
윤이 하필 옷을 갈아입고 있던 중이었다.
기세 좋게 소리를 지르던 무흔은 놀라서 그대로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이어 돌아서서는, 병사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우선 문을 닫아 꽉 붙들었다.
“허락도 없이 남의 침소에 벌컥 들어오는 것은 무슨 경우인가?”
“하룻밤 정도 손발 좀 안 묶는다고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는 거 아닌데! 좀 내버려 두지, 그것이 고까워서 사람들을 보냈나?”
“원칙이지. 그쪽도 그리 알고 있지 않았는가?”
“아무리 그렇다 해도 말이야!”
항의를 하려 윤에게로 슬그머니 돌아선 무흔은 여전히 눈앞이 살색으로 뒤덮인 통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 와중에 또 이미 눈에 익숙한 몸이라고, 이제는 눈을 깔거나 돌리지는 않을 수 있게 된 것을 깨달았다.
심미적으로 빼어난 육체란 이런 것이구나.
무흔은 경탄을 애써 감춘 시선으로 은근슬쩍 윤의 몸을 훑었다.
“거… 그러지 말고, 좀 봐 줍시다.”
“갑자기 뭐 이리 뻔뻔하게 나와?”
무흔은 문밖의 병사들을 의식하며 윤에게 두 발짝, 다가갔다.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 비밀스런 화제를 입에 올렸다.
“그… 제어를 익힐 때까지만 풀어주면 안 될까? 도학 선생이 계시지 않을 때도 혼자 연습을 하고 싶은데, 손발이 묶여서야 곤란해서 말이야.”
“나가.”
“생각해 봐. 어차피 제어법을 익힐 때까지 나는 도학 선생을 졸졸 쫓아다닐 텐데, 도망갈 리 있겠어?”
윤은 무흔을 등지고 돌아서서 얼른 옷부터 걸쳤다.
이게 아닌데.
얼굴을 보면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아서 일부러 병사들을 보냈건만. 이리 실물이 쳐들어와서 따박따박 말을 늘어놓고 있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단호하게 내렸던 결정을 자꾸만 철회하고 싶어진다.
“밖에들 있느냐. 은증왕을 별당으로 모시거라.”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이 열리고 병사들이 들어섰다. 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은증왕의 손과 발을 포박하라는 명은 거둔다.”
“예, 주군. 허면 처소 주변에 감시를 설까요?”
“됐어. 어차피 별당에서는 여길 지나치지 않고는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 은증왕을 데려다주고 너희도 그만 돌아가거라.”
“존명.”
“은증왕, 그대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고자 함이니 처소에서 나오지 마. 지금처럼 내 구역으로 뛰어드는 짓도 불허한다. 가 봐.”
“고마워!”
무흔의 답은 짧았지만 그 어조만 들어도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음이 느껴졌다.
윤은 그 얼굴을 오늘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확인할까 싶어 유혹을 못 이기고 돌아섰지만, 이미 늦었다.
훈련된 정예병들은 신속하게 포로를 끌어내었고, 언제나 완벽한 시종들은 소리 하나 나지 않게 문까지 닫은 후였다.
창으로 다가선 윤은 살짝 창문을 열어 무흔이 뒷마당을 가로질러 별당으로 걸음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저렇게나 좋을까.”
병사들의 배웅을 받고는 좌우로 폴짝폴짝 뛰어가는 무흔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미소가 배어 나왔다.
하얗게 빛나는 머리카락이 마구 흩날리는 것이 귀신 같기도 하고. 그래서 홀리는 건가. 생각이 그렇게 흘렀다.
*
제 안에 품은 기를 느끼고자 무흔이 수련에 돌입한 지도 벌써 6일째였다.
제자리걸음은커녕 아직 발도 떼지 못한 상태였다.
도학 선생은 별채를 벗어나 무흔을 기가 좋은 터에 데려가면 좋다 윤을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윤은 무흔이 치유자임을 비밀로 해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웠으니,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제와 오늘은 도학 선생이 마을에 내려가 없는지라, 무흔은 어떻게든 가르침을 떠올리며 홀로 터득해보려 애를 썼다. 아침과 점심이 지나고 해가 서쪽으로 넘어갈 즈음, 무흔이 반가워하는 이가 별채에 모습을 보였다.
“하온!”
마루에 나와 가부좌를 틀고 있던 무흔은 벌떡 일어나 그를 맞았다.
“진전이 좀 있으십니까.”
“진전은 무슨. 막막해.”
“본디 처음 막 발현했을 때가 제어를 익히기 가장 좋은 시기입니다. 은증왕께서는 언제인지도 모를 그때를 놓치신데다, 지금 너무 힘이 커진 탓에 제어가 버거운 것이지요. 일단 한 번만 요령을 터득하셔도 물꼬가 트이는 것처럼 평탄해질 테니 너무 염려 마십시오.”
“하아… 살면서 이렇게까지 막막한 건 처음이야.”
“바깥에서 익히는 것이 훨씬 빠릅니다. 성주님께 요청은 좀 해 보셨습니까?”
“어휴, 말도 마. 매일 청을 넣는데 안 들어줘. 저기 보게.”
무흔은 마당을 가리켰다. 커다란 나무 아래, 대나무 돗자리가 하나 펼쳐져 있었다.
“도학 선생이 이 정원 안에서 그나마 그나마 그나마 그나아아아마 기가 잘 통한다는 곳을 골라주셔서 저기다 자리를 폈지 뭐야. 헌데 저기서 해 봐도, 딱히 효과가 없어.”
가만히 말을 듣던 하온이 잠시 침묵하더니 어려운 얘기라도 꺼내는 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 형 말입니다.”
“응. 루경, 아니 하경.”
“실은… 그가 치유자입니다.”
“뭐?”
“희로국에 자리를 잡을 때는 우선 화공으로 잠입하였지요. 그렇게 신뢰를 얻은 후, 치유자로 발현이 되었다 거짓으로 연기를 하여 지금은 황궁에 있습니다.”
“여기 있을 때부터 치유자였다?”
“예. 형은 워낙 건강하여 의원이 맥을 짚을 일도 없었고, 이능력자들과 신체 접촉을 할 일은 더더욱 없던 터라 남들보다 늦게 발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 나와 비슷하군!”
하온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아니었다.
둘 다 치유자이기는 하나, 무흔의 지인은 성주의 능력을 생(生)하게 하는 흙의 기운을 지녔다. 반대로 제 형은 성주의 능력을 극(剋)하는 불의 기운을 가진 터라, 단 한 번도 성주에게 지인을 해 주지 못했다. 하온은 그런 제 형을 늘 안타깝게 여겼다.
“형은 제1정예부대 소속, 올해의 병사상을 2년 연속으로 수상하고 장교로 승진했지요. 이환 종사관만큼은 아니지만, 기를 제어하는 것엔 달인입니다. 그런 형조차 지인의 능력을 제어하는 것엔 고생을 하였어요.”
“그리 어려운 일이었단 말인가….”
“그러니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하온은 진심으로 위로했다. 물론 약간의 고소함도 있었다.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완벽한 제 형이 어렵게 이룬 것을 무흔이 쉽게 이루지 못하는 건 너무도 당연했다.
“하경은 어떤 방법으로 제어에 성공했다 하던가?”
“뒷산에 사흘 밤낮 틀어박혀 있더니, 혼자 터득해서 나왔습니다.”
“산!”
나에게도 산이 필요해. 무흔은 하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짐했다.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찾아왔으니, 더는 그저 기다리기만 할 수 없었다.
*
결국 이레째 되는 날 새벽, 무흔은 다짜고짜 윤에게로 쳐들어갔다. 산에 오를 채비를 하던 윤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내가 분명, 이런 식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금한다 했잖아?”
“산에 가야겠네.”
“누구 맘대로.”
“도학 선생에게 들었어. 주 국공이 매일 새벽마다 애용하는 곳이 그렇게 기의 흐름이 좋은 명당이라던데? 성주 전용 등산로가 있다더니, 거길 말하는 거지?”
“아….”
“나한테서 지인을 강탈하여 주 국공은 살다 살다 몸이 이리 가뿐해지는 날도 오셨으니, 이제는 그쪽이 내게 보답을 할 차례야. 날 지금 산으로 데려가.”
무흔은 당당하게 요구했다.
산에 데려다주기로 했던 그 약조 얘길 들먹였다가는 분명 또 배신이 어쩌고 할 테니. 그에 대해서는 절대로 언급하지 않았다.
윤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 그것을 해결해준 것에 대한 공치사를 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잡았다.
무흔은 두 손을 허리에 얹고 가슴을 펴고, 또 고개를 쳐들었다.
“딱… 한 번만이야.”
성공이었다.
무흔은 헤헤 웃으며 윤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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