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화
냉전의 시작이었다.
태풍의 중심에 선 도학 선생만이 고요하고 진정되어 있을 뿐, 무흔과 윤은 슬슬 풍파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여긴 왜 왔는데?”
“나라고 좋아서 왔겠는가? 도학 선생께서 잠깐만 들러 달라 간청을 하시니 동행해 드린 것뿐이야.”
아침부터 무흔을 만날 것에 은근히 기대를 품었던 윤은 내심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곱지 않은 눈매 하며, 잔뜩 날이 선 목소리 하며.
그 와중에, 아침 햇살에 부딪혀 빛나는 샐쭉한 표정마저도 미인의 표상이라. 그리 보이는 제 눈의 약함을 속으로 타박했다.
“국공께선 은증왕의 팔다리에 걸어둔 것을 풀어주시지요.”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기 무섭게 도학 선생은 윤을 부른 목적을 입에 올렸다.
“불가하오.”
“국공.”
“저자는 손발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순간 또 도주를 생각할 것이 분명해. 이미 두 번이나 그리했는데 세 번이라고 아니할까.”
“허면 일단 풀어주고 가신 후, 수업이 끝났다 연통을 드리면 다시 족쇄를 채우러 와 주십시오.”
도학 선생의 제안이 윤의 의도에서 미묘하게 비켜 나갔다. 머물러 있으려 했는데 그만 가 보라니.
“그사이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예?”
“저자는 감시병에게 독초를 먹이고 자신에게 잘해준 하온을 후려쳐서 기절시키고 탈출하였지. 도학 선생께도 그리할지 모르니, 안전장치 없이 내버려 둘 수는 없소.”
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무흔은 어쩐지 억울해졌다. 감시병으로 하여금 배앓이를 하게 한 것도, 본인을 가격하라 한 것도 모두 하온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그렇다고 그것을 사실대로 입 밖에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주 국공, 내게 지인의 제어를 가르쳐주기 위해 오신 분을 내가 다치게 할 것 같나?”
“그대는 그 손목의 사슬로 내 목을 졸랐어.”
“그야… 진짜 죽일 생각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그, 구석에 몰린 쥐가 살아보겠다고 마지막 발악을 한 것이나 다름없지.”
“잔인무도한 협박이었지.”
“풀어줘. 배워야 해! 이대로 힘을 질질 흘리면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무흔은 버럭 성을 냈다. 분명 지난 밤까지만 해도 지인의 제어를 배우게 된 것에 대해 윤이 고개를 끄덕끄덕 해 주었는데, 왜 난데없이 오늘 아침에 와서 이리 난리를 치는지 대체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흠, 허면, 일단 풀어주고, 그대가 제어법을 배우는 동안 내가 여기서 감시하지.”
헛기침 한 번, 그리고 시선을 피한 채로 윤의 제안이 덜컥 튀어나왔다.
그것을 지켜보던 도학 선생은 입을 꾹 다물어 웃음을 참았다. 입꼬리 끝에 경련이 이는 것을 간신히 버텼다.
“자, 풀어줘.”
무흔은 두 팔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그가 내내 지켜보든 말든 족쇄만 풀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약조를 손바닥 뒤집듯 하는 윤이 마음을 바꾸기 전에 얼른 손과 발의 거추장스러운 것을 떼어내고 싶었다.
굳이 여기 있겠다는 것을 보면 딴생각이 있는 게 분명했지만, 그 시커먼 속내의 내용이야 지켜보면 알 수 있을 테니까.
“아주 신났군.”
윤은 허공에서 손날을 휙휙 두 번 그어 내렸다. 그와 동시에 양 손목에 걸렸던 황금의 수갑이 한쪽씩, 무 잘리듯 썰려 나갔다.
툭. 투툭.
세 덩이로 나뉜 금속이 바닥을 묵직하게 두드리며 떨어져 내렸다.
“하아아….”
무흔은 길게 숨을 내뱉고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손이 자유로워지는 것이 이렇게나 가뿐한 일이라니. 양 손목에 감긴 토끼털부터 풀어내고, 신이 나서는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윽!”
오만상을 찌푸리며 무흔은 양팔을 붙들었다. 어깨에서부터 손목까지, 통증이 어마어마했다.
“금이 아무리 무겁기로서니, 엄살은.”
윤이 퉁명스레 중얼거리더니만, 말과는 달리 냉큼 무흔 코앞으로 가 바짝 붙어 섰다.
“팔 내놔 봐.”
“의원도 아니면서. 아니, 도학 선생께서 이리 계신데 주 국공이 나서서 보면 뭘 안다고?”
윤이 제 팔뚝을 만지려 들자 무흔은 그의 손등을 찰싹 때려 쳐내고서는 의원을 향해 휙 몸을 돌려 섰다.
“도학 선생, 좀 봐 주시겠습니까.”
“예, 그리하지요.”
의원이 허허 웃으며 다가오는 동안, 무흔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곁에 선 윤을 올려다봤다.
“뭐하고 섰어? 발도 풀어줘야지.”
“이번엔 다리가 아프다고 요란을 떨겠군.”
윤이 아래쪽으로 손을 대충 휘저었다.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 마구 난도질을 해 놓는 통에 바닥에는 금사슬의 파편이 너저분하게 깔렸다.
무흔은 조심스레 발끝을 들어 의원이 있는 쪽으로 가볍게 폴짝 뛰었다.
“어, 다리는 멀쩡한데?”
무흔이 고개를 갸웃하자 도학 선생은 굳이 볼 필요도 없다는 듯 허허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간밤에 피리 소리가 꽤 오래 퍼지더이다.”
무흔은 뜨끔했다. 밉살스러운 윤의 잠을 방해하려 실컷 불어댔는데, 정작 도학 선생이 시끄러워 잠을 못 이룬 것은 아닌가 싶어 걱정부터 덜컥 들었다.
“혹 주무시는 데 방해가 되었는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늙은이는 원체 누우면 눈을 감고 바로 자는 체질이라. 아침에 숙영과 조찬을 함께하였는데, 그녀가 일러주더이다. 음률이 귀에 착착 감기는 통에 우리 국공께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셨다 하더군요.”
무흔은 슬그머니 윤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눈 아래가 평소보다 좀 거무죽죽한 듯도 했다.
작전의 성공이 이리 기쁠 줄이야! 무흔은 싱글벙글 웃으며 도학 선생 앞으로 가 앉았다.
“아이고, 주 국공께는 미안하게 됐습니다. 금을 뜯고 싶었으나 양 손목에 덜렁거리는 사슬이 혹 귀한 악기에 상처를 낼까 염려가 되지 뭡니까. 하여 옥피리를 택하였던 것인데… 아무래도 피리 소리가 여느 악기보다는 좀 구성진 편이지요?”
구성지다기보다는 음산했다는 것이 옳았다. 무흔은 어제 두 사람이 돌아간 후 일부러 스산한 곡조를 골라 귀신을 불러들일 기세로 불어대었으니.
윤은 아무렇지 않은 척 뽀얀 옥피리가 놓인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래서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니야. 그저 잠이 안 온 것뿐.”
윤은 손을 휘둘러 바닥에 널브러진 금 조각들을 한데 모으더니, 그것을 무흔이 벽에 기대 세워둔 옥피리 쪽으로 가볍게 날렸다.
황금은 순식간에 동글동글하고 가느다란 사슬로 변형되어 피리에 칭칭 감겨들었고, 그대로 봉인되었다.
무흔은 윤과 피리를 번갈아 바라보고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가만 보면 주 국공은 생긴 것과는 달리 속이 참 좁아.”
“생긴 것?”
“세상을 다 집어삼키게 생겼잖나. 실제로 그럴 힘도 있으시고. 헌데 신념이니 충정이니 하는 데 얽매여서는, 간절한 내게 그거 조금 나눠주는 걸 아까워하지. 좀생이 같으니라고.”
“허, 배덕한 자가 할 소리는 아니지.”
“배덕? 내가?”
“최소한의 도덕도 양심도 없는 자에게 내 그런 소릴 들을 이유가 있나.”
결국 보다 못한 도학 선생이 나섰다.
“두 분께서 참으로 의가 살갑습니다. 훗날 좋은 벗이 될 기미가 벌써 보이는군요.”
뭐라는 거야. 두 청년이 똑같이 그러한 표정으로 도학 선생을 돌아보았지만, 초로의 의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무흔의 팔뚝을 살짝 위로 들어보았다.
“윽!”
“간밤에 그렇게 피리를 불으셨으니 오늘 이리 아픈 것입니다. 황금이란 본디 철이나 돌보다도 무거운 법. 묵직한 것을 양손에 걸고, 팔을 이렇게, 계속 이 자세로 계셨지요?”
“아… 그러합니다!”
이번에는 윤이 웃었다.
“해시에 한 시진, 그리고 자시에 한 시진, 도합 두 시진을 불어댔으니 아픈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미련하기는.”
윤의 음성에는 웃음기가 넘쳐흘렀다. 무흔이 이를 악물고 그를 돌아보자, 도학 선생이 둘을 다독였다.
“자, 그만그만. 이제 수련을 시작해야 하는데 이리들 마음이 요동쳐서야 원.”
도학은 아주 오래간만에 입이 근질거렸다.
양기와 음기가 서로 엉키고는 싶으나 아직 무르익지 못해 맞서 날뛰니, 저 둘이 합방이라도 하게 되면 그 요란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었다.
삼라만상의 이치를 꿰고 있으나 천기누설은 절대로 하지 않는 덕에 단명하지 않고 천수를 누리고 있으니, 이번에도 꾹 참고 지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국공께선 멀찍이 떨어져 감시를 하시고, 은증왕께서는 이쪽에 앉으시지요.”
도학 선생이 창을 활짝 열고 방석을 놓은 자리는 볕이 무릎 위로 따스하게 들고 바람의 흐름이 잘 드는 위치였다.
“눈을 감고, 우선 자세를 바르게 합니다. 허리는 세우고 어깨에 힘을 뺀 상태로 팔은 떨구어 양손을 각각 무릎 위에 두십시오.”
무흔은 그의 말을 따랐다. 방금까지 윤과 언쟁을 한 것은 어느덧 싹 잊고, 드디어 제어를 배우게 되었다는 기대감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너무 신이 났다.
“무엇이든 첫 배움은 참으로 즐겁지요. 설레는 것은 알고 있으나, 지금은 고요함을 차분히 몸에 머물게 하여야 합니다.”
맥을 짚지도 않았는데 어찌 알았지! 무흔은 퍼뜩 놀라 얼른 마음을 가다듬었다.
무흔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선 윤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새하얀 얼굴 위로 떠오르는 표정의 요란한 변화를 눈에 담았다.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순간 흘끗 뒤를 돌아본 도학 선생과 눈이 마주쳤다.
다 안다는 듯, 그리 포근히 웃어주며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통에 윤은 어색하게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감춰보려 해도, 이상하게 도학 선생과 숙영부인 앞에서는 잘 되질 않았다. 분명 그들에겐 연륜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은증왕께서는 회룬석을 뗀 이후로 지인의 힘을 느끼신 적이 있습니까? 이능력자의 기혈을 정화한다거나 상처를 치유해줄 때 말고, 홀로 조용히 계실 때. 몸에서 그 힘이 피부 위로 일렁이는 느낌을 받으신 적이 있는지요?”
“없는데요.”
“예… 그럼 이해하기 쉽도록 몸의 구멍을 예로 들겠습니다.”
구멍이라는 말에 음란한 생각부터 들었던 윤은 이어지는 도학 선생의 말에 자기반성부터 했다.
“피부에는 땀을 배출하는 미세한 구멍이 있습니다. 이는 눈에 보입니다. 허나 무림의 고수들이 기를 방출하고 또 거두어 운용할 때 쓰는 구멍, 그 혈은 눈에 보이지 않지요.”
무흔은 이환이 재미 삼아 보여주었던 검기를 떠올렸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치유자들의 능력 또한 피부 위로 방출과 차단을 가능케 하는 미세한 구멍이 있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것을 열고 닫는 것이 제어의 전부입니다. 간단하지요?”
“막막한데요.”
“우선 치유의 기를 스스로 느끼는 것이 첫 단계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무흔은 애를 써 보았으나 의욕과는 달리 아무런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한숨을 푹 쉬고 고개를 드는데, 윤이 기척을 죽이고 밖으로 나가려는 것이 눈에 띄었다.
“주 국공, 나 감시한다며. 가는 것인가?”
무흔의 목소리엔 꼴 보기 싫은 것이 사라져 잘됐다는 듯한 기색이 묻어났다.
윤은 비웃음을 한껏 머금고 손을 들고 인사를 건넸다.
“보아하니, 꼬라지가 오늘 안에는 끝나지 않을 듯하여. 그럼, 고생하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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