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화
아까 도학 선생이 맥의 변화를 감지하겠다 한 것은 무흔이 아니라 윤 쪽인 모양이었다. 의원의 손가락이 윤의 손목에 정확히 닿았다.
“응?”
무흔의 손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윤은 의외의 상황에 고개를 휙 들었다.
맥이 아까보다도 더 요란하게 날뛰고 있는데! 그것을 도학 선생도 분명 느꼈을 터였다.
의원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윤은 속이 다 까발려진 듯한 기분이었다. 어려서부터 거의 평생을 봐 온 도학 선생이 저를 보며 끄덕끄덕 웃어주고 있었다.
저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
윤은 양쪽으로 붙들린 손을 어쩌지 못하고 잠시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러한 와중에도 정화의 기운은 넘실넘실 살결을 타고 넘어오는 중이었고, 몸은 좋다고 그걸 넙죽넙죽 받아먹고 있었다.
문제는 마음이었다. 혹 무흔을 상대로 이리 가슴이 뛰는 것을 도학 선생에게 들킨 건가 싶어 윤은 덜컥 걱정이 일었다.
“실로 엄청나군요.”
도학 선생의 경탄이 터져 나오자마자 윤은 냉큼 양쪽에서 손목을 뺐다.
얌전히 기다리기만 하던 무흔은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로 도학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도학 선생, 구체적으로 알려주십시오.”
명의의 해석을 듣고자 하는 보랏빛 눈이 유독 반짝거렸다.
윤의 시선은 무흔의 그 두 눈에 붙들렸다.
방금 지인을 받아서일까. 세상이 온통 반짝이는 것 같이 보였다. 아마 그런 게 분명하다, 그리 생각하기로 했다.
곁에 있는 무흔의 눈이 특히 그러했고, 새하얀 머리카락 또한 은은한 달빛이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 희고 뽀얀 살결은 자꾸만 탐이 날 정도였으니.
윤은 눈을 부릅뜨고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내 이럴 정도로 제정신이 아닌 것은 분명 기가 완벽하게 정화된 상태에서 지인을 더 과하게 받은 게 원인일 것이다. 나중에 도학 선생에게 물어봐야겠어.’
그러한 윤은 안중에도 없이, 도학은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무흔의 질문에 답했다.
“하온의 진맥이 옳았습니다. 따뜻함을 듬뿍 머금은 토양의 기운이 느껴지며, 또한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맑고 깊은 힘이 넘실댑니다. 국공께서 은증왕을 얻으신 것은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복록이지요.”
그가 흡족해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무흔의 손을 꼭 잡았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며 꼴딱꼴딱 죽어가는 귀한 손주 녀석을 건져준 생명의 은인을 만나기라도 한 듯한 분위기였다.
무흔은 어깨를 으쓱하며 곁눈질로 윤을 훑었다.
“주 국공은 그리 생각지 않는 모양입니다. 나를 내친다는 걸 보니.”
“예?”
“포로 교환을 논의하러 건원에서 희로국에 사신단을 보냈지요. 자세한 사항이 정해지는 대로, 주 국공이 나를 보내 버린다 결정했습니다.”
어디 네 이놈 혼나 봐라. 무흔은 딱 그런 생각이었다.
아까 윤이 도학 선생에게 막대기로 무려 엉덩이를 맞는 순간 알았다. 숙영부인 때와 마찬가지로, 윤은 도학 선생에게 꼼짝도 못 한다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윤은 새카맣게 광택이 나는 옷자락의 끄트머리를 초조하게 꼬아대고 있었다.
도학 선생이 윤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몇 달 전, 이 늙은이가 노쇠해진 몸을 굳이 이끌고 유람을 떠나면서 국공께 올린 당부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기억하오. 하지만, 나 하나 살고자 하는 문제보다 나랏일이 중요한 것은 당연지사. 충의로 받들어야 하는 황제의 명에 기꺼이 따르고자 함이니 선생이 이해하시오.”
“쯧쯧, 우리 국공께선 열일곱 아이 같으시구먼.”
“뭐요?”
“안 보는 사이에 10년이나 회춘하셨어. 자, 은증왕. 이제 연구를 해 보십시다.”
도학 선생은 휙 몸을 틀어 윤에게 등을 지고 앉았다. 그 입가에는 결국 다 참지 못한 웃음이 슬그머니 배어 나오고 있었다.
낮에 효명성에 도착하여 채 반 절도 지나지 않아 그는 온갖 소식들을 접했다.
그중 가장 많은 것은 무흔에 대한 것이요, 그다음으로 놀라운 이야기는 윤에 대한 것이었다. 출처도 다양했다. 이환과 사평, 그리고 효명성 제일가는 호사가 천홍으로부터였다.
애증에 휘청이는 북방의 성주! 라는 요란한 수식어로 천홍이 말을 마무리 지었던 것을 떠올리며 도학 선생은 웃음을 억눌렀다.
“하온이 말하길, 은증왕께선 발현 시기를 확실히 알지 못하신다고요.”
“주 국공이 회룬석 목걸이를 제거하자 바로 힘이 튀어나왔으니,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없습니다.”
“회룬석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기억하십니까?”
“이 정도… 되는 것들로… 이렇게, 열두 개가 황금으로 엮여서 목에 둘려 있었지요.”
무흔은 손을 동그랗게 쥐어 목걸이의 돌 크기와 형태를 설명했다.
“그렇게나! 그것을 지금 좀 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아마 주 국공이 다 가져간 것으로 아는데….”
도학 선생과 무흔은 동시에 윤을 바라보았다.
“지금 가져다 드리지.”
윤으로서는 불편한 자리를 잠깐이나마 뜰 수 있는 기회였다. 그가 벌떡 일어나 무흔의 처소를 나섰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사라져가기 무섭게 도학은 무흔의 두 손을 꼭 붙잡았다.
“저 멍청하기 짝이 없는 주윤을 버리고 본국으로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무흔은 당황하여 눈만 커다랗게 뜬 채로 깜빡거렸다.
“사평에게 들었습니다. 은증왕께서도 이곳에 머물고 싶어 하신다고. 방책은 어떻게든 마련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마음을 굳건히 해 주시지요.”
“저야 도학 선생의 도움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다만 주 국공이 큰 결심을 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하하, 염려 마시지요. 세상 그 누구보다 몸이 달았을 것이니.”
바깥쪽에 다시 인기척이 일자, 싱글벙글하던 도학은 냉큼 입을 다물었다.
“이것이 은증왕이 착용하고 있던 회룬석이오.”
안으로 성큼 들어선 윤은 하얀 천에 싼 것을 품에서 꺼내놓았다.
“아니! 이렇게 큼직한 것을 얼마나 오래 걸고 있었단 말입니까?”
“태어나서 하나, 한 돌에 둘, 두 살 때는 세 개, 그렇게 한 해 지날 때마다 하나씩 돌이 늘어났고, 11세 되던 해에 12개를 달고 그렇게 평생을 살아왔지요.”
바다색에 금빛 가루가 별처럼 박혀 있는 보석이 촛불에 비쳐 기묘한 빛을 일렁이고 있었다. 도학은 그것을 하나 집어 들어 꾹 쥐어보았다.
“이거 하나만으로도 특상등급 이능력자나 치유자의 힘을 봉인할 수 있습니다. 12개를 합친 정도라면 마물이 나오는 혈을 막고도 남지요.”
“아….”
“이걸 평생 차고 계셨으니 발현이 언제인지 모르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가 말을 멈추고는 진중한 표정으로 한참 회룬석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일순간에 깨달음을 얻은 듯 무릎을 탁 치고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라면 이해가 가지. 가능해! 허허. 이런 식으로 힘을 늘릴 수 있을 줄이야.”
무흔과 윤은 그가 하는 소리를 조금도 알아듣지 못하고 이어질 풀이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근본적으로 이능력자들은 지인의 힘을 빨아들이려는 습성이 있고, 반대로 치유자들은 방출하려는 성향이 있지요. 그것은 두 분 다 알고 계실 겁니다.”
둘이 똑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능력의 크기와 강도는 타고나는 것에서 변함이 없으나, 치유자의 능력은 그와는 달리 타고나는 것에서 훈련을 더해 발전할 여지가 있습니다.”
“아, 하온이 훈련에 대해 얘기해준 적이 있었어요.”
“평생 이것을 목에 걸고 계셨으니 강도 높은 훈련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몸 밖으로 나가려는 지인의 힘이 회룬석에 가로막히자 더 더, 더 많은 힘으로 더 세게, 그리 저항하였겠지요. 숨을 쉬는 매 순간이 곧 훈련이었을 것입니다.”
또 둘이 똑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학 선생은 눈앞에 흑백으로 반반 나뉜 젊은이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지인의 힘은 본디 포기를 모릅니다. 긴 세월 고요하게 갇혀 끊임없이 방출을 시도하였겠지요. 특상등급 치유자의 능력치를 기준으로 추정해본다면, 적어도 12년 이상은 그리해 오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무흔은 12년 전의 자신을 그려보았다. 늘 외로웠던 어린아이는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과연 어찌하였을까. 그리 감상적인 생각에 젖다 말고, 불현듯 떠오른 실리를 외쳤다.
“제게 지인의 제어를 가르쳐 주십시오!”
“물론이지요. 그리하겠습니다.”
무흔은 윤을 돌아보았다. 정말 하온의 말대로, 지인의 제어를 익히는 것을 그가 싫어할까?
아니었다.
윤이 저를 보고 고개를 끄덕여줬다. 정말 잘됐다는 표정으로, 따뜻하게.
무흔은 그것이 의외인지라, 고개를 틀고 눈을 크게 떠서 물었다.
“괜찮은… 게… 맞아?”
“아닐 이유는 뭔데? 처음부터 도학 선생을 모시고 배우게 해 주겠다 내 약조를 하였잖나.”
“약조야 뭐… 지키지 않은 것도 있으니.”
무흔은 입을 살짝 내밀었다. 불평을 늘어놓아도 윤이 들어줄 리 없는 약조, 산(山).
어차피 제 쪽에서 먼저 도주로 신의를 깨 버렸으니 할 말이 없었다.
“일정이 나오면, 마지막으로 그 소원 한 번 정도는 들어 드리지.”
윤의 말에 무흔은 발끈했다. 그가 말하는 일정이라는 것은 포로의 교환, 본국으로의 송환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
“허, 내가 사형 선고를 앞둔 죄수라도 되나?”
말끝이 흔들림과 동시에 무흔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게 누가 내 등에 칼을 꽂으라 하던가!”
“감히, 라는 말도 집어넣으셔야지.”
벌컥 성이 오른 윤이 지지 않고 맞서자 무흔은 비아냥으로 받아쳤다.
보다 못한 도학 선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둘 사이를 끊어냈다.
“오늘은 밤이 깊었으니 이만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지요. 내일 아침, 제가 찾아뵙고 지인의 제어법을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무흔은 손목에 얽힌 사슬을 꽉 쥐고서는 애써 분을 삼켰다.
‘고작 도망 한 번 치려다 실패한 것을 두고 대체 주 국공은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야 하는데?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벌을 주면 되잖아. 왜 희로국으로 돌려보내겠다 저렇게 극단적인 패를 내는 거지? 처음엔 어떻게든 날 곁에 두려 했으면서.’
생각을 아무리 거듭해 보아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무흔이 헤아려 보기에, 윤의 이러한 결정을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뿐이었다.
속이 좁아서.
“옹졸한 놈.”
무흔은 멀어져가는 윤의 시커먼 뒷모습을 가만히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다음 날 아침, 설렘에 가득 차 반가이 도학 선생을 맞이하던 무흔은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입을 삐죽이며 마루에 섰다.
“주 국공은 또 왜 같이 오셨어?”
눈까지 가느다랗게 찢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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