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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51화 (51/85)

#051화

“은증왕! 소식을 전하러 왔습니다!”

모습을 채 드러내기도 전에 목소리부터 높이며 성주 처소의 뒷마당을 가로지르는 자는 이환이었다.

무흔은 씩씩한 발걸음 소리에서부터 이미 그가 누구인지를 짐작하고 있었다. 전한다는 소식은 분명 윤으로부터일 것이었다.

혹 검을 배우도록 허락해 준 것인가?

무흔의 가슴이 콩닥콩닥 두근거렸다.

“별당은 좀 둘러보셨나요?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불편하지.”

무흔이 수갑에 엮인 두 손을 들어 보이자 이환이 껄껄 웃었다.

“주 국공이 뭐라던가?”

기대감에 넘치는 자색 눈동자가 형용할 수 없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무흔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뻔히 짐작 가는 바, 이환은 설레발을 치며 들어왔던 방금의 자신을 후회했다.

“그것이… 그저 소식입니다. 주군께서 전해 드리라 명하셔서 이리 급히 들었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삽시간에 무흔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한가득 내려앉았다. 이환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도학 선생이 유람을 마치고 방금 효명성에 돌아오, 헉! 도, 돌아오셨습니다.”

아래로 축 처져 있던 무흔의 눈이 희번득할 정도로 번쩍 열리는 통에 이환은 당황했다. 보라색 구슬 같은 커다란 눈동자가 바깥으로 툭 쏟아질 것만 같다는 착각마저 일었다.

“도학 선생이 드디어! 하온 말로는 언제 돌아오실지 기약이 없다 하던데.”

“그렇습니까? 흠… 하온이 잘못 알았나 봅니다. 이맘때쯤 오신다고 연통이 미리 왔었는데요?”

이환이 갸웃하면서 말을 계속 이었다.

“도학 선생의 수레가 성문 앞에 당도하였다는 말을 듣자마자 주군께서 저를 이리로 보내셨습니다. 은증왕께서 도학 선생을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지인의 제어, 그것을 도학 선생에게 비밀리에 배우기로 진작에 윤과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무흔은 설레는 마음을 감추고 최대한 평범한 표정을 내려 애썼다.

“물론 기다렸지. 도학 선생의 저서를 매우 감명 깊게 읽어 내 일전에 주 국공에게 꼭 만나보고 싶다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걸 기억하였나 보군. 의외야.”

“의외라니요. 주군께서 은증왕을 대하시는 모든 순간이 진심이십니다. 지금이야 일시적으로 화가 많이 나셔서 그렇지, 시간이 지나면 풀릴 테니 심려치 마십시오.”

그대가 어제 그 눈빛을 못 봐서 그래. 무흔은 그렇게 속으로 투덜대며 흠칫 떨었다.

우선 제일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그래서, 내가 검을 배우는 건 끝까지 허락 못 하겠다 하던가?”

“그것에 대해서는 주군께 제가 재차 여쭈어보았으나, 가타부타 뭐라 말씀이 없으십니다. 못 들은 척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 하지만 절대, 무시하는 분위기는 아니셨습니다.”

“그럼 내 백옥 노리개에 대해서는?”

“그것은 주군께서 진작 명을 내리셨지요. 아직 소식이 들어온 것은 없습니다.”

무흔의 얼굴에 다시 그늘이 졌다. 이환이 그 변화무쌍한 표정의 변화를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애써 기분을 끌어올리려는 듯이 무흔이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지인을 잘 받았나?”

“물론입니다. 하하, 나령 그 녀석이 오히려 셋을 연달아 치유하느라 탈진했다며 보양식을 실컷 먹고 있습니다. 다만 설하 아가씨가 너무 엉엉 우시는 바람에 뭐라 하시는지 하나도 알아듣질 못했습니다.”

“저런, 많이 놀랐나 보군. 그럴 만도 하지.”

“강문 말로는 애들이 찾은 것을 은증왕께 못 보여드리고 난리통에 잃어버려 속상해 그렇답니다.”

“하필 그때 살수가 나타나서 보지 못하였어. 아이고, 다들 아직 아기들이네. 그런 게 뭐가 중해. 다들 안 다쳤으니 천만다행이야.”

“살수와 관련하여 말입니다. 혹 짚이는 자가 있으신지요? 희로국에 계실 때 원한을 사셨다거나….”

“글쎄. 누굴 만나기라도 해야 원한을 사지 않겠어?”

“그도 그렇겠군요. 사평 형님이 열심히 추적 중이니 어떻게든 답이 나올 겁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쉬시지요.”

이환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무흔은 수족갑 탓에 낑낑대며 그를 따라 일어났다.

“그냥 앉아 계십시오. 배웅나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야. 겸사겸사 나도 마당 산책을 하려고. 도학 선생은 그럼 내가 언제쯤 만나볼 수 있을까?”

“어르신이 여독을 풀기 위해 오늘은 하룻밤 푹 주무실 거고, 아마도 내일이겠지요?”

이환의 짐작은 근소한 차이로 빗나갔다.

무흔이 도학 선생과 만나게 된 것은 그날 밤이었다.

*

해시(亥時), 하현으로 이지러지기 시작한 달이 휘영청 뜬 밤, 무흔은 서늘한 바람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일부러 창을 반쯤 열어놓고 앉아 옥피리를 불었다.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함은 아니었다. 바로 건너편, 눈앞에 보이는 전각이 윤의 처소라. 잠도 안 오니 겸사겸사 요란한 곡조로 상대의 단잠이나 훼방 놓을 심산이었다.

윤이 도학 선생과 함께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어느덧 제 음률에 취해 호흡과 감정을 한껏 피리에 쏟아붓던 무흔은 기척도 없이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이를 보고서는 화들짝 놀랐다.

“어어… 어우, 안에 들면 든다 크게 고하기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황금으로 된 관을 쓰고, 새카만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채 위아래로 온통 시커먼 옷을 입고 나타난 윤의 모습은 서늘한 사신을 방불케 했다. 적어도 무흔에겐 그랬다.

“이쪽은 도학 선생이오. 도학 선생, 이쪽은 은증왕. 그럼, 얘기들 나누시오.”

윤은 무흔의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않은 채 제 할 말만 늘어놓고는 뒤로 휙 돌아섰다.

그 행동에 무흔뿐만 아니라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도학 선생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무흔은 건원국 황제의 하사품으로 추정되는 귀하디 귀한 옥피리를 지팡이 삼아 바닥을 꾹 짚어 몸을 지탱해서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님을 모셔놓고 무례하긴. 성주에 국공씩이나 되는 자는 눈에 뵈는 게 없으신가?”

무흔의 비아냥대는 목소리에 도학 선생은 2차로 당황했다. 주름진 눈을 번쩍 뜨고서는 놀라서 윤과 무흔을 번갈아 보았다.

이내 혀를 차며, 그가 들고 있던 지팡이로 윤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윽! 선생! 이 무슨 짓이오!”

“업고 다녀도 모자랄 판에, 평생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귀인의 속을 긁어놓으셔서 어쩔 셈입니까, 쯧쯧.”

도학 선생은 무흔 앞으로 한 발 나와 섰다. 백발의 긴 머리는 세상만사 귀찮다는 듯 뒤로 하여 하나로 질끈 묶여 있었고, 담백한 하얀 옷에는 장식 하나 달리지 않았다.

보통의 노인이라면 주름의 깊이로 나이를 가늠해볼 수도 있다 할 것이나, 도학 선생은 아니었다. 안광(眼光)부터가 예사 사람과 달랐다.

“의원 도학이라 합니다. 이리 만나 뵙게 되어 참으로 기쁩니다.”

“은증왕 무흔입니다. 선생의 책을 모두 읽었어요. 몇 번을 읽고 또 읽었는지…. 살면서 선생을 이리 만나 뵙게 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영광입니다.”

첫인상의 날카로운 눈매와는 달리 그는 무흔에게 푸근한 미소를 건네며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러더니만, 손목의 사슬을 덥석 움켜쥐고는 윤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포로가 도주를 하려 하였다고 아까 말하였잖소. 그를 감독해야 하는 책임자로서 응당 마땅한 처분을 내린 것이지.”

“두 분 다 이리 와 보십시오.”

무흔은 웃음이 났다. 숙영부인 앞에 있을 때처럼 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꼴을 보는 것이 내심 통쾌했다.

셋은 자개로 화려하게 장식된 중앙의 둥근 탁자에 둘러앉았다.

“국공과 하온에게 대략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제가 맥을 짚어보아도 되겠습니까?”

도학의 말에 무흔은 선뜻 손목을 내밀었다.

어쩐지 긴장이 되었다. 맥이 뛰는 자리에 손가락이 올라가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의원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으나 딱히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설마 이 정도 치유자는 얼마든지 다시 구할 수 있습니다, 하는 결론을 내는 건 아니겠지? 주 국공이 그래도 한때나마 내게 목을 매었으니, 제법 쓸 만할 것 같은데….’

무흔이 슬슬 초조해질 때쯤, 의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윤을 향해 몸을 틀었다.

“두 분이 손을 한 번 잡아보시겠습니까?”

무흔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어떻게든 살을 맞대어 지인의 맛을 상기시키려 했던 작전이 참으로 막막하다 싶었는데, 이렇게나 빨리 기회가 찾아올 줄이야.

반대로 윤은 떨떠름한 얼굴로 오히려 자신의 두 팔을 가슴 앞에서 엮어 팔짱을 껴 버렸다.

“손은 왜 잡으라 하는 것이오?”

“지인을 받을 때 맥의 변화를 감지하고자 함입니다.”

윤이 마지못해 손을 대충 내밀자, 무흔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윤이 내민 손을 빤히 바라만 보았다.

도학 선생은 눈알을 좌우로 굴렸다. 자존심 싸움에서 비롯된 기묘한 침묵이 둘 사이에 감도는 것을 대번에 파악했다.

“은증왕께서 손목이 묶이시어 거동이 불편하시니, 국공께서 이리 가까이 앉으셔서 손을 잡아주심이 옳겠습니다.”

무흔의 한쪽 손목은 의원에게 잡혀 있었으니, 그것이 당연했다.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상황이 되지 못함을 깨달은 윤은 어색하게 무흔 곁으로 붙어 앉아 남은 무흔의 한쪽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잡고 싶다. 잡지 않기로 했는데, 잡고 싶어. 저 손을 잡으면 얼마나 좋을지 안다. 잡으라 했으니 어쩔 수 없지.’

윤이 무흔의 손을 잡았다. 처음 잡는 것도 아닌데 뭐가 이리 떨리는지. 생각해보니 누군가 보는 앞에서 무흔에게 지인을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떨리는 것이라, 그리 여기기로 했다.

무흔은 제 손을 살그머니 잡고 있는 윤의 손을 더 꽉 움켜쥐었다. 아직 지인의 제어는 할 줄 모르나 반대로 방출이라면 해 본 적이 있으니까.

왼손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힘을 내보냈다. 상대가 홀딱 넘어오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 요망한 바람이 먹혔다.

윤은 제 오른손을 타고 일렁일렁 넘어오던 무흔의 기가 울컥 쏟아져 들어오자 아주 잠깐이지만, 전율을 느꼈다.

‘아… 이거다. 진짜 좋아.’

윤은 취할 듯한 기분이 일었다. 딱히 정화가 필요한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무흔에게서 지인을 받을 때면 매번 그 이상에 대한 욕망이 솟았다.

그러다 문득, 보드라운 손의 감촉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예전에도 내가 이랬나? 손을 잡는 것뿐인데, 뺨에 열기가 오르는 것 같잖아.’

그러한 윤의 반응을 무흔은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어쩐지 작전이 통한 것 같은 느낌이라, 겉으로는 태연한 척 내적으로 춤판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윤의 반대쪽 손목이 도학 선생에게 턱 붙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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