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화
무흔의 처소에 난데없이 들이닥친 이는 효명성 병사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가 쥔 검에 피가 흥건히 묻은 것을 보자마자, 무흔은 발이 불편한 와중에도 아이들을 보호하고자 앞으로 나섰다.
“누구냐? 넌 오늘 감시병이 아닌데?”
사람을 죽이러 온 자가 통성명 따위 할 리 없었다. 그는 무흔의 손발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단번에 파악하고는 아이들을 먼저 목표로 삼았다.
“아악!”
제일 가까이에 있던 재랑은 살수가 저를 향해 칼을 치켜들자 비명을 내지르고 반사적으로 두 손을 뻗었다. 위기의 상황, 이능력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쳇, 이능력자였나!”
전각의 기둥에서 가지들이 솟아 나와 살수의 몸을 휘감으려 들었다. 한쪽 팔다리가 가지에 얽히는 순간, 그는 현란한 검술로 간단히 나뭇가지를 베어 버렸다.
“재랑한테서 떨어져!”
설하는 꼭 쥐고 있던 물건을 떨어뜨린 것도 모른 채,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다음에 일어날 일이 너무 뻔히 예상되는 바, 무흔은 재랑을 보호하기 위해 초인적인 힘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발에 족쇄가 늘어져 있음에도 좁은 보폭으로 종종거리며 달려가 재랑을 꽉 끌어안았다.
“헉! 으아아악!”
설하는 윤과 피를 나눈 사이였다. 열한 살 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위력의 불꽃이 터져 나오더니만, 이내 화염이 되어 살수의 몸을 삼키기 시작했다.
사람의 몸이 불타는 것은 아이들에게도 무흔에게도 공포였다. 무흔은 등 뒤에서 열기가 너무 가까이 느껴지자 재랑을 끌어안고 밖으로 향했다.
문제는 설하였다. 모두를 지키려 당차게 불을 쏜 것까지는 좋았는데, 당황해서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계속해서 그를 향해 불을 쏴대고 있었다.
“꺅! 어떡해! 아아악!”
“설하야, 그만해!”
“몰라, 안 멈춰져!”
“뭐?”
우선 재랑을 바깥으로 피하게 한 무흔은 설하와 강문에게로 향했다.
“나가자! 어서!”
“설하가 못 멈추고 있어요. 어떡하죠? 선발대로 돌아온 흑성부대원 중에 물을 다루는 사람은 없는데!”
“뭐?”
“제가 사람을 불러올 테니 은증왕께서 설하 옆에 있어주세요.”
“네가 있잖아! 흙으로 불을 덮어!”
“아!”
강문은 온 힘을 쏟아내서 문밖의 흙을 설하의 손을 향해 날렸다. 그가 셋 중에 그래도 맏이는 맏이였다. 그 와중에도 침착하게, 보드랍고 고운 흙으로 설하의 손을 과할 정도로 그득히 뒤덮었다.
“됐다! 효과가 있어! 불이 잡혔어!”
“으아아앙!”
설하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울음을 터뜨렸다. 무흔은 아이의 어깨를 꼭 붙들었다.
“나가자! 여긴 위험해!”
이미 전각의 내부는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불타올랐다. 설하와 강문을 먼저 내보내고, 무흔도 밖으로 나왔다.
매캐한 연기가 치솟고 어느새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창문과 출입문 바깥의 칼을 맞고 쓰러진 병사들의 시신부터 급히 수습했다.
강문이 어떻게든 불을 꺼 보려 마당의 흙을 전각 안으로 쏟아부어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제는 바깥쪽도 타오르기 시작했다. 소년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고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무흔은 그 곁에 서서 안절부절못하며 수갑 아래 제 장갑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이 아이가 위험에 처하기 전에 제 비밀이고 뭐고, 아이를 구하겠다 그리 결심을 한 순간이었다.
그때 이환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왔다. 그는 강문의 양어깨를 꾹 붙들었다.
“문아, 그만해. 전각은 그냥 타게 두자.”
“하지만 불을 꺼야 하잖아요.”
“괜찮아. 다른 건물로 옮겨붙지 않을 거야. 그 전에 어른들이 물을 길어 올 거고. 그만. 이제 그만해도 돼.”
“이게 불타 버리면 은증왕께선 잘 곳이 없어요.”
“아이고 착해라. 아니야, 은증왕께선 다른 곳에서 주무실 거야. 효명성에 남는 방이 얼마나 많은데.”
힘을 멈추기 무섭게 강문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흙투성이에, 이제는 그을음까지 뒤집어쓴 설하가 달려와 이환을 꼭 껴안고 엉엉 울었다.
무흔은 활활 타오르고 있는 제 처소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의 그 살수는 분명 자신을 노린 것일 텐데. 누가 저를 죽이려 했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괴물 취급받는 것은 평생을 두고 겪어온 일이었으나, 저를 죽이려 하는 자와 마주친 것은 처음이었다. 옥에 잠시 갇혔을 때, 그 괴연향 사건과는 충격의 정도가 달랐다.
심장이 이상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주변의 소리가 다 멍하게 들렸다.
“나령 형이 왔다!”
재랑의 목소리가 무흔의 귓가에 먹먹하게 울렸다. 다급히 도착한 나령이 강문을 먼저 살피고 지인을 해 주는 것을 무흔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실신할 것만 같던 아이가 기력을 되찾고 있었다.
‘나를 위해 아이들이 저리된 건데, 나는 정작 쓸모라고는 하나 없이… 이렇게 지켜만 봐야 하는가.’
우울감이 마음을 집어삼켰다.
“족쇄만 아니었어도….”
사슬에 묶인 손발을 내려다보며 그리 중얼거리던 무흔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손발이 자유로웠다면 과연 검을 든 살수를 제압할 수 있었을까. 아이들을 지킬 수 있었을까. 아니, 검조차 없었는데. 이런 일이 또 닥치면 방어는커녕 도망은 칠 수 있나?
안 될 것이다. 아이들이 같이 있지 않았더라면 분명 죽음을 맞이했으리라.
덜컥 겁이 났다. 뒤늦게 두려움이 폭풍처럼 밀려들었다.
손이 달달 떨리고 다리에 힘이 풀리는 순간, 무흔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은증왕! 괜찮으십니까?”
반사신경이 빠른 이환이 단숨에 뛰어 무흔의 곁으로 왔다.
“다치셨습니까? 제가 업어서 의원으로 모시겠습니다.”
“괜찮아. 그저 힘이 빠졌어.”
“아이들에게 들었습니다. 살수를 맞닥뜨리셨으니 많이 놀라신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하온을 데려올게요.”
“저기, 이환.”
무흔은 막 일어나려는 이환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나에게 검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오늘 일로 인해 호신을 하고자 하십니까?”
“응.”
“주군께서 곧 도착하실 것이니 여쭤보겠습니다.”
무흔은 체념의 미소를 짓고 고개를 떨구었다. 새로 몸을 의탁하게 된 이 효명성이라는 곳은 무엇 하나 그 잘난 주 국공에게 허락을 받지 않고는 이루어지는 것이 없는 세상이었다.
“그날 밤, 서문 앞에서 검으로 병사들을 상대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본이 없지는 않으시니 금방 익히실 것입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이환이 위로를 건넸지만, 무흔의 걱정은 그런 게 아니었다.
과연 윤이 허락할 것인지. 손발에 이런 걸 주렁주렁 달아놓고 목검 하나 제대로 들 수는 있을지.
내놓고 한탄하기에는 너무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 주군께서 오십니다!”
힐끗. 윤이 눈동자만 살짝 아래로 굴려 바닥에 주저앉은 무흔을 바라보고서는 그를 지나쳐 설하에게로 향했다.
“오라버니! 으아앙.”
윤을 보자마자 설하가 기껏 멈췄던 울음을 다시 터뜨렸다.
그가 사촌 동생을 꼭 끌어안아 달래주는 동안 무흔은 그의 매정한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렇게 등을 돌린 채로, 윤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불타오르는 전각으로 향했다.
“제가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무흔을 보고 시원하게 미소를 날린 이환이 냉큼 윤에게로 향했다.
둘이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것 같더니, 그 결과는 무흔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오르십시오.”
잠시 후, 무흔 앞에 의자 하나로 이루어진 작고 간편한 가마 하나가 놓였다. 호위하는 병사가 전후좌우로 열둘이었다.
“검을 쥐게 해 줄 생각은 없나 보군.”
무흔은 체념 그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행선지조차 묻지 않고 눈앞의 가마에 올랐다.
주 국공, 이런 피도 눈물도 없는 악귀 같은 자를 봤나. 괜찮냐는 말 한마디 정도는 건네봄직도 한데.
여전히 등을 돌리고 서서 제 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윤에게 울화통이 치밀어올랐다.
가라는 대로 오라는 대로,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이 새삼 죽도록 싫어졌다.
*
무흔은 새로운 처소를 배정받았다.
물샐 틈 없는 완벽한 경호를 위함이라는 명목으로, 무흔이 안내된 곳은 성주의 침소와 뒷마당을 공유하고 있는 아담한 전각이었다. 본관에 딸린 별채로 보였다.
“이렇게까지 콕 틀어박힌 곳이니, 대단히 안전하기는 하겠네.”
무흔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다시 벽제성의 냉궁에 갇혀 살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살해 위협에, 화재까지, 게다가 검 연습을 하게 해 달라는 청까지 넣었는데도 윤은 여전히 코빼기도 안 비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것이 대단히 신경 쓰였다.
“마침 여기 제대로 청소를 해 둔 터라 정말 다행이에요.”
무흔이 입을 옷가지와 물건들을 새로 나르던 여종 하나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성주의 처소 정리를 전담하는 시녀였다.
“마침?”
“예. 저번에 은증왕께서 성주님 방에서 잠드셨을 때, 성주님께서 이곳에서 주무셨지요. 들어가 보세요.”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별채의 주인이 대단한 심미안의 소유자였음이 분명했다. 무흔은 감탄을 하며 가구와 수집품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여기는 성주님의 모친께서 쓰시던 곳이에요. 하나도 손대지 않고 처음 그대로 보전해두었답니다. 성주님 명으로 주기적으로 관리를 하기 때문에 상태가 완벽하죠.”
무흔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름다운 무늬가 그려진 천장을 올려다봤다. 창 너머의 풍경마저 감탄이 나왔다.
“돌아가신 마님께서 취미 생활을 하시던 곳이라고 합니다. 소문에 의하면 가끔 부부싸움을 하셨을 때도 여기서 주무셨다고 해요. 호호호.”
“그러한가.”
“성주님께서 그 누구에게도 내어주시지 않는 별채를 은증왕께 주셨어요. 정말 지극히 아끼시는 게 분명합니다.”
지극히 아끼시는 놈이 이리 손발에 돌덩이보다 무거운 황금으로 족쇄를 채워 놓을까. 무흔은 맞받아치는 대신 어색한 웃음으로 답했다.
“아하하하….”
이상하게 시종들마다 저를 보면 어떻게든 윤과 엮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구니. 그럴 리야 없겠지만, 윤에게서 혹 무슨 언질이 있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모든 것이 성주님께는 소중한 유품이에요. 하지만 은증왕께서 원하시면 악기를 모두 다루셔도 된다고 하셨어요.”
“고맙다 전해주시오.”
진정으로 고맙다 여기는 건 아니었다. 고맙긴. 허, 손목 발목 이리 채워 놓고 무슨 연주를 하라는 건지.
그런데도 무흔은 여종들이 떠나고 혼자 남게 되자마자 흑단으로 된 금(琴, 거문고)을 손끝으로 살며시 만져보았다.
제대로 앉아 연주해보고 싶지만 괜히 그리했다가는 곱고 아름다운 까만 악기에 금 사슬로 흠을 내게 될 것이 분명했다.
무흔은 유품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내 노리개는 찾아봤는지 물어볼걸.”
노리개를 잃어버린 이후로 모든 일이 엉망이 된 것만 같았다. 탈출 실패, 그리고 암살 미수 사건을 떠올리는 것보다도 모친의 유품을 잃은 것으로 인해 속이 상하고 초조해졌다.
그 노리개에 달려 있던 둥근 백옥과 똑같은 빛깔의 옥피리가 눈에 띄었다. 무흔은 그 앞으로 다가섰다.
“황제가 하사하였다는 그 옥피리가 이것인가 보네.”
불어 볼까 말까 고민이 되었다. 피리라면 수갑을 차고 있어도 가능했으니. 무흔이 손을 뻗으려는데, 마당 쪽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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