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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49화 (49/85)

#049화

“설하 아가씨!”

하온의 목소리가 다급히 울렸다. 설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며 무흔에게로 향하던 손을 멈추었다. 이환 또한 제 앞으로 성큼 나서는 하온으로 인해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이환!”

설하는 효명성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이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리로 조르르 달려가 그를 꼭 끌어안았다.

“이환, 오라버니께 말씀드려서 어떻게 좀 해 봐. 우린 은증왕께 성 구경시켜드리는 게 좋단 말이야.”

이환은 난감한 웃음으로 답을 얼버무렸다. 설하가 그의 몸통을 꼭 끌어안고 고개를 한껏 위로 쳐들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바라보고 있는데, 차마 안 된다는 말을 하기 힘들었다.

“뭐라고 말 좀 해 봐, 응? 은증왕께서 계속 울적하시단 말야. 이럴 땐 밖에서 놀아야 기분이 좋아진다고 유모가 그랬어.”

“그것이… 그… 은증왕께서는 일종의 벌을 받고 계시는 것이라 밖으로 나가실 수가 없습니다.”

“어른도 벌을 받아?”

끝이 안 날 듯한 문답이 이어지는 것을 외면하고, 하온은 무흔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먼저 수갑 안쪽의 양 손목을 살폈고, 그다음으로는 발목이었다.

생채기가 나기도 전에 이미 털로 보완을 한 상태였다. 굳이 상처가 있는지 살피라 한 윤에게 짜증이 솟았다.

무흔은 불편해 보이는 하온의 표정에 미안한 마음부터 들었다.

“간밤에,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에 살펴 주었다지. 그대 몸도 성치 않을 텐데… 맞은 곳은 좀 어때?”

무흔은 멀찍이 설하에게 붙들린 이환의 눈치를 보며 의원에게 넌지시 물었다.

“고작 타박상입니다. 괜찮습니다.”

“미안해. 내가 그대의 신의를 저버렸어. 사과할게.”

맥을 짚기 위해 하온은 무흔의 장갑을 막 벗긴 상태였다. 그는 손을 붙든 채로 일부러 고개를 돌려 이환과 눈을 맞췄다. 성주가 시킨 일이 잘 해결되었다는 신호였다.

“저는 딱히 마음 쓰지 않으니 은증왕께서도 괘념치 마십시오. 은증왕 입장에선 충분히 그러실 수 있습니다.”

“이해해줘서 고마워. 앞으로는 조용히 죽은 듯이 지낼게. 주 국공에게 꼭 그리 전해줘.”

하온은 둘만의 비밀이 무난하게 묻힌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무흔과 눈을 마주치고 미소를 머금었다.

“진맥하겠습니다.”

하온은 수갑을 피해 맥을 짚었다. 지난밤 성주의 침실에서 침을 놓은 이후로 대단한 차이랄 것이 없었다. 그것이 이상했다.

그 후에, 새벽에 둘이 함께 목욕하다 또 혼절했다 하던데. 지인을 또 과하게 행한 게 아닌 다음에야 혼절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하온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쩌면 그 소문이라는 것이 사실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성주도 굳이 원기를 돋우는 약을 먹이라 강조했고. 확인을 해야만 했다.

“평범하게 기력이 쇠하신 것 말고는 크게 문제 될 부분이 없습니다. 간밤에 무슨 일이 더 있으셨는지요?”

무흔은 몇 발짝 건너 자리한 이환을 의식했다. 치유자임이 들키지 않도록, 나름대로 어휘를 적당히 골라 답을 건네기로 했다.

“주 국공이 간밤에 이 사람을 묶어놓고 제멋대로 취하지 않았는가, 그러고 나서 욕탕에서 만났는….”

“은증왕!”

하온이 궁금해하던 말이 막 나올 차였는데, 이환의 목소리가 다급히 울렸다. 그가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며 설하의 귀부터 막고 있었다.

“흠, 은증왕. 아이들이 있는데 그런… 이야기는 좀… 그렇습니다.”

“아… 내가 생각이 짧았어. 나 또한 어제 일로 경황이 없는지라. 미안하오.”

기회를 놓친 하온이 이환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문을 가리켰다.

“종사관은 아가씨를 모시고 데리고 나가십시오. 은증왕께선 전신에 침을 맞으실 것입니다.”

투덜대는 아이들을 싹 데리고 이환이 밖으로 나갔다.

하온이 무흔을 눕히고 옷을 적당히 벗겨 침을 놓기 시작했다. 동시에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무흔에게 설명을 병행했다.

“은증왕께서 첫 혼절을 하셨을 때 제가 긴급하게 침을 놓아드렸습니다. 기혈이 많이 놀라 불안정했던 터라, 그것만 바로 잡았지요. 하아….”

하온이 길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무흔은 그것이 대체 무슨 연유인가 하여 불안해졌다. 몸에 무슨 큰 이상이라도 생긴 걸까.

“치유자가 혼절을 할 때까지 지인을 행하는 것은 금기입니다!”

“아….”

“성주님께서 그것을 뻔히 아시면서, 어찌 은증왕께 이리하실 수 있는지! 제가 다 화가 납니다.”

“하온.”

“그것도 사람을 묶어놓고 그리하시다니. 도대체 성주님께선 무슨 생각이셨답니까?”

“화가 많이 났으니 그랬을 거라 생각해. 눈이 돌아가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 같았어. 주 국공에게 그런 면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네.”

“그걸 이해해주시는 겁니까?”

“이해랄까… 뭐…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하겠지. 그게… 피차일반이라. 나도 열이 올라서 머리꼭지가 돌 지경이었거든.”

“어찌 그리 담담하게 말씀하십니까. 제가 그 밤에 맥을 짚어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은증왕께선 하마터면 돌아가실 뻔했습니다.”

“뭐?”

“침을 다 놓고. 그런 후에 설명 드리겠습니다.”

분을 내려놓고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척, 증상에 대해 거짓을 말한 하온이 심호흡을 깊이 하고서는 다시 고요하게 침을 놓기 시작했다.

무흔은 내내 불안한 심정으로 침을 맞았다. 도학 선생의 저서에서 과도한 지인으로 치유의 기를 이능력자에게 다 뺏긴 치유자에 대해 읽은 적이 있었다. 자신이 그런 경우였다니, 덜컥 겁이 났다.

침묵 속에 침을 다 놓기까지 어찌나 시간이 안 가는지.

하온이 정말 한참 만에 시침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목욕 중엔 별다른 일이 없으셨습니까?”

“주 국공이 발에 상처가 나서, 그걸 치유해줬어. 그것 말고는 딱히….”

무흔은 그 정도로 이야기를 끝냈다. 넘어지려 할 때 잡아준 정도의 접촉을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서로 다 벗고 밀착되었다 말하기도 부끄럽고.

“허면 혼절을 하신 원인은 무엇입니까?”

“탕에 제법 오래 앉아 있었는데, 나오려고 일어나는 순간 현기증으로 쓰러진 것까지 기억해. 정신이 들었을 때는 여기였어.”

가만히 누워 미동 없이 천장만 보고 있는 무흔은 하온이 안심하는 것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죽을 뻔했다는 건 무슨 소리야?”

“아… 어제 맥을 짚었을 때 정말 그리 느꼈습니다. 하여 뒤틀린 기혈을 바로잡는 침을 놓는 것만으로도 벅찰 지경이었지요.”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제 말을 뒷받침해줄 이도 부정할 이도 아무도 없는 만큼, 하온은 자신 있게 거짓을 늘어놓았다.

“두 번 다시 그런 식의 지인을 허락지 마십시오. 치유자들은 자신을 스스로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분노하셨다고는 하나, 성주님께서는 선을 넘으셨습니다. 은증왕을 대체 어찌 여기시는 건지!”

“앞으로는 내가 허락하고 말고 할 것도 없어. 그는 내게 지인을 받지 않겠다 했거든. 어제도 발에 피가 철철 나기에 내가 막무가내로 치유해 준 것이지, 그는 고집을 피우고 거부를 하더군.”

“왜 그러신답니까?”

“날 돌려보낼 거래.”

“아….”

내내 서 있던 하온은 그제야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이제 정말로 마음이 놓였다. 얼굴에 미소가 번져 광대가 위로 솟구치는 것이 느껴지는 통에 그는 슬그머니 고개를 옆으로 돌려야만 했다.

“대체로 소문이란 커지기 마련이잖아. 주 국공은 특이 체질이라 맞는 치유자가 없어 괴팍하게 죽음을 벗 삼아 살아간다 하더니만, 겪어보니 대단히 모난 자도 아니었어. 특이 체질 또한 마찬가지겠지. 내가 없더라도 살아가는 데 딱히 큰 지장이 없는 걸 거야.”

“그동안 저희 성주님께서는 잘 버텨 오셨으니까요.”

“응. 앞으로도 그리 살면 된다 여기는 거겠지.”

“또한 성주님께서 은증왕을 곁에 두시기에는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신념 말고, 또 무슨 문제?”

“정치적으로, 저희 성주님을 견제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니까요. 사실상 북쪽의 절대권력자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범접하기 힘든 수준의 이능력자. 꼬투리 하나라도 잡히면 물고 뜯으려 다들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특히 황명을 거스르는 문제에 대해서라면요.”

“아….”

“그걸 감수하실 수는 없겠지요. 성주님의 숙부로 있는 예부상서라는 작자는 겉만 번드르르하지 사실상 수도에서 방패막이 노릇이라고는 조금도 하지 않으니까요.”

예부상서를 저리 생각하고 있을 줄이야. 무흔에게 하온의 대답은 의외였다.

“우리 성주님은 고립무원이라고 형이 그리 말하곤 했습니다. 늘 홀로… 혼자이시고, 구원받을 곳이 없다고.”

우리 형은 성주밖에 모르는 바보 멍청이였지. 하온은 씁쓸한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성주의 방에 제 형의 그림이 걸릴 것을 떠올리며 기분을 끌어올렸다.

하온은 서랍에서 빗을 꺼내와 가만 누워 있는 무흔의 머리카락을 곱게 빗기 시작했다.

“은증왕께서 기력을 회복하시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일단 몸을 온전히 하는 것에 집중하시고 훗날은 나중에 도모하시지요.”

윤이 무흔을 보내버린다 했으니 이제 되었다, 그리 안심해도 될 일이었지만 하온은 끝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무흔의 속을 떠보려 함이었다.

“도모? 허, 이제 뭘 어쩌겠는가. 처소 바깥 감시도 이제 여섯이 되었네. 주 국공이 마음을 돌리지 않는 한 방법이 없지.”

“희망을 잃으시면 안 됩니다.”

하온의 위로도 소용없었다. 치료를 마치고 그가 돌아가고 난 후, 홀로 남은 무흔은 어쩐지 더 울적해졌다.

*

살수가 움직인 것은 밤이 아니라 낮이었다.

그가 날렸던 단검으로 인해 효명성의 출입자 검문이 강화된 터라 살수는 성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주한모의 선택을 받은 살수는 실력과 대담함, 판단력을 모두 갖춘 자였다. 최대한 빨리 맡은 바 임무를 다시 수행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은증왕의 처소에 경비가 늘었으나 그것은 문제 요소가 아니었다. 두 개의 창문과 한 개의 출입문에 각각 두 명씩. 고작 일반 병사 여섯을 소리 없이 처리하는 것은 간단했다. 벌건 대낮인데도, 그의 계획대로 되어 버렸다.

살수는 은증왕의 거처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흙투성이의 지저분한 아이들 셋이 들어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노비 아이들이야말로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상대인지라, 그는 거침없이 안으로 진입했다.

*

설하, 강문, 그리고 재랑은 진흙밭에서 구르기라도 한 모양새로 무흔의 처소에 나타났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이야? 다쳤니? 하온이 방금 돌아갔는데, 다시 부를까?”

“헤헤, 아니에요. 저희 때문에 새끼돼지가 우리를 탈출하는 바람에 그 녀석을 잡느라고 그만 이리되었어요.”

“이환은? 같이 있지 않았어?”

“성주님께서 찾으신다는 전령이 와서 먼저 갔어요.”

“여긴 날 보러 다시 온 거야?”

“네, 돼지를 잡다가 이걸 발견했거든요. 씻으러 가기 전에 얼른 보여드리려고 들렀어요.”

설하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꺼내는 것을 무흔이 들여다보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고 검을 든 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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