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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48화 (48/85)

#048화

바구니 위를 덮은 보자기를 들추자 동물의 보드라운 털가죽이 그득히 나타났다.

“이른 아침부터 성주님이 저를 불러들여 명을 내리시지 뭡니까. 비밀로 하라 그리 당부를 하셨는데, 나처럼 노인네가 되면 입이 근질근질한 것을 참기 힘들거든.”

숙영부인은 바구니 안에 든 하얀 토끼털과 짙은 갈색의 담비털을 무흔의 손목에 감긴 황금 수갑에 번갈아 대어보며 길이와 폭을 재었다.

“이리 쇠고랑을, 아니 황금고랑을 내내 차고 있으면 은증왕의 손목이 시리고 또 피부가 붉게 상할까 성주께서 염려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수갑 안쪽으로 털을 덧대어주라 이르시더군요.”

무흔은 그저 듣고만 있었다. 고맙다는 말을 할 기분은 아니었으니. 고양이 쥐 생각하는 격. 병 주고 약 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거리였다.

“살갗에 닿는 느낌은 둘 중 어느 쪽이 마음에 드십니까?”

“이쪽이….”

“잘 고르셨습니다. 어울리실 것입니다.”

무흔에게 차를 따라준 푸근한 여종은 바구니에서 반짇고리를 꺼내어 하얀 토끼털에 바느질을 시작했다. 그리 오래지 않아 양 손목과 발목, 총 네 군데에 보드랍고 폭신한 토끼털이 수갑을 감싸 둥글게 원을 그렸다.

“불편함이 좀 덜 하신지요?”

“그러하오. 고맙네. 헌데… 좀 우스꽝스럽지는 않나?”

“아닙니다. 무척 사랑스러우십니다.”

“응?”

“어느 누가 보아도 애틋한 마음이 들 것입니다.”

“애틋이라….”

다른 누구의 애틋함도 필요 없었다. 주 국공이 저를 애틋하게 여겨 주어야 여기에 남을 수 있을 터인데. 무흔은 한숨을 가까스로 참았다.

숙영부인 일행이 떠난 후, 홀로 남은 무흔은 폭신폭신한 토끼털이 둘린 수갑을 한참이나 멍하게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이야. 애틋은커녕… 하아….”

그래도 손목과 발목이 포근하며 따뜻하기는 했다. 그것이 살갗에 닿는 느낌 그대로 다정하다 느껴졌으면 좋았을 것을. 아침에 눈 뜨자마자 무흔이 접한 소식은 포로 교환 전까지 처소에 감금된다는 내용이었다.

서글픔이 눈물로 맺혀 뺨 위로 툭 떨어져 내렸다.

“아, 씨!”

무흔은 벌떡 일어나 눈물을 훔쳤다. 이리 처량 맞은 감상에 젖는 건 성미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무의미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평생을 어떻게 살았는데! 고작 이 따위 일로! 망할 주 국공 새끼.”

최악의 경우는 역시 본국 송환. 윤이 그리하겠다 선언을 했으니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마음이 답답하니 하늘이라도 보고 바깥 공기라도 마실 생각이었다.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익숙하지 않은 보폭으로 힘겹게 걸어가 창을 열었건만. 그 자리에는 추가된 감시병이 둘이나 서 있었다.

“은증왕을 뵙습니다. 오늘부터 창밖 호위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호위? 감시겠지. 무흔은 입이 이만큼 나와서는 다시 창을 닫아버렸다.

다른 쪽 창도 상황은 똑같을 터였다. 무흔은 침대에 누워 묵직한 양손을 가슴 위에 얹은 채, 손가락을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첫째, 이제 도주는 불가능하다.

둘째, 최악의 경우는 본국으로의 송환.

셋째, 여기 남기 위해서는 주 국공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

넷째, 그의 마음에 드는 방법이란 뭘까. 치유자. 지인. 그것이 거부당했으니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다른 방법이라… 그런 게 있을 리 있나.”

금사슬 탓에 가슴이 짓눌렸다. 옆으로 돌아누운 무흔은 마지막 손가락을 접어 주먹을 꽉 쥐었다.

“수적천석(水滴穿石)이라. 작은 물방울이 끊임없이 떨어지면 결국엔 바위를 뚫는다지.”

기회가 닿을 때마다 만지고 또 살이 닿으면 결국엔 주 국공이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쪽은 지인에 절실하니. 이미 한 번 맛본 것을 끊기는 힘들 것이 분명했다.

*

잠에서 깨어 몸을 일으켜 앉은 하온은 뒤통수에 맺힌 혹을 만지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곁에서 꾸벅꾸벅 졸던 의원 보조 아이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간밤의 일을 소상히 고했다.

은증왕이 분명 성주에게 미움을 샀을 거라 여겼는데, 무려 같이 목욕을 했다니.

뺨에 멍이 들고 머리에 혹이 난 보람이 없었다.

하온이 아이를 내쫓고 짜증스레 한숨을 내뱉는 차에, 바깥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냉큼 자리에 다시 누워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렸다.

병문안 겸사겸사, 그를 찾아온 이는 이환이었다.

“몸은 좀 어때?”

“괜찮습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아플 텐데….”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하온이 깍듯이 예의를 차리며 드러내놓고 거리감을 두고 있었다. 이환은 그것이 못내 서운했지만, 한두 번도 아닌 만큼 딱히 마음에 두지 않았다.

“괜찮다니 다행이다. 지금 상단을 통해 하경의 그림이 도착하였는데, 갈 수 있는 상태인지 물어보러 왔어.”

“물론, 갈 수 있습니다.”

하온의 눈에 생기가 반짝 돌았다. 반색을 하는 그 표정이 그저 예뻐, 이환은 배시시 웃었다. 부축해주려 이환이 손을 뻗었으나 하온은 그것을 모르는 척 스스로 몸을 일으켜 나왔다.

“가자.”

이환은 민망한 기색 하나 없이 여전히 웃으며 문을 열었다. 하온에게 반갑고 기쁜 소식을 전한 것에 만족하며 함께 성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중앙의 커다란 탁자 위에는 커다란 족자 두 개가 나란히 길게 펼쳐져 있었다. 윤과 사평은 왼쪽 그림에 숨겨진 암호를 해독하는 중이었다.

“황금빛 모란이 시들고 붉은 모란의 봉오리가 맺혔습니다. 희로국 황제의 병이 악화되고 태자가 부상하는 모양입니다. 이쪽 아래, 4황자를 상징하는 소나무의 가지는 아예 부러져 있습니다.”

“결국 4황자가 태자에게 밀렸군.”

“초가집이 한 채, 저번보다 줄었군요. 희로국의 작황이 엉망인가 봅니다. 군량미 조달은 어림도 없겠네요. 산봉우리의 크기와 수로 미루어 보아 잔여 병력의 수가 저희의 예상보다도 더 적은 것 같습니다.”

“우리 군이 슬슬 최종 진격을 하여도 될 듯한데… 염록왕 전하께서 억류되어 계시니 우리 황제께서 섣불리 결단을 못 내리시….”

하온이 도착했다. 윤과 사평은 입을 다물고 일단 그를 반갑게 맞았다.

사평이 얼른 하온의 뒤통수를 만져보았다.

“혹이 크게 났는데? 머리가 어지럽지는 않으냐?”

“괜찮습니다.”

“그래도 당분간 거동을 조심하거라. 자, 네 형의 그림은 이쪽이다.”

하온은 정보를 담은 그림 따윈 안중에도 없이 그 옆에 놓인 붉은 매화 그림으로 시선을 옮겼다. 형이 주군을 생각하며 꽃잎 하나하나 정성 들여 채색한 티가 역력했다.

“하경은 매번 어김없이 매화 그림을 보내주는구나. 성주님, 이것은 어디에 거시겠습니까.”

사평이 활짝 웃으며 윤의 의견을 물었다.

“이번 그림 또한 매우 훌륭하구나. 흠… 어디에 걸어둔다… 하온, 네가 가져가겠느냐?”

“예?”

“형의 그림이니 하나쯤 갖고 싶을 테지. 이것을 가져가면 되겠구나.”

하온은 억지로 기쁜 표정을 만들어냈다. 형을 칭찬하는 것에 혹했던 것도 찰나, 성주가 제 형의 그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하여 마음이 상했다.

“감사합니다.”

사평은 바로 족자를 둘둘 말아 하온에게 건네었다.

그것을 받아드는 하온에게서 묘하게 어색한 분위기가 풍겨나왔다. 윤은 눈치채지 못했으나 사평은 달랐다.

“더 할 말이 있구나?”

사평의 눈치를 보며 망설이던 하온은 윤을 향해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실은… 지금 성주님의 침소에 걸린 매화 또한 제 형의 그림입니다. 그것은 오래되었으니 이것으로 바꾸어 걸으시고 예전 것을 제게 주심이 어떨지요?”

“뭐, 그리하거라.”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윤은 웃으며 하온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집무실을 나서려다 말고, 고개를 돌려 다시 하온을 향했다.

“은증왕에게 원기를 돋우는 탕약을 매일 가져다줘라. 지금 상태가 말이 아닐 것이야.”

“예.”

“또한 수갑 안쪽 손목 발목에 생채기가 나지 않았는지 살펴주고.”

“그리하겠습니다.”

“혹시라도 그가 또 네 머리를 칠지 모르니, 이환이 동행하거라.”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이환을 뒤에 호위로 세워놓고, 은증왕에게 사과를 제대로 받도록 해라. 앞으로도 그의 건강은 계속 네가 전담으로 살펴야 할 테니.”

집무실 창가에 걸터앉아 하온을 훔쳐보고 있던 이환은 벌떡 일어나 윤에게 인사를 올렸다.

“예, 주군! 감사합니다.”

“네가 감사할 것은 또 무엇이냐?”

“헤헤, 의원의 안위는 염려 마십시오.”

이환은 하온과 동행하여 무흔의 처소로 향했다.

싱글벙글한 그와는 달리 하온의 표정은 음울했다. 윤이 제 형의 그림을 홀대하고 은증왕의 건강만을 챙기는 것만 같아, 그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제 은증왕과 그리 일이 있었는데, 오늘 다시 보는 것이 불편하지 않아?”

“어젯밤에도 침을 놓지 않았습니까.”

“그땐 은증왕이 혼절하였으니 너랑 얼굴 마주할 일이 없었지.”

옆에서 종알종알 말을 거는 이환이 귀찮았다. 그가 제게 호감을 품었음을 눈치채었으나 하온은 그걸 안다는 기색조차 드러낸 적이 없었다. 타지에서 고생하는 형이 돌아올 때까지, 달콤한 모든 것이 제겐 사치일 뿐이었다.

하온은 네, 아니요, 로 일관하며 무흔의 처소에 도착했다.

꺄르륵, 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안쪽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환은 문을 지키고 선 두 병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송구합니다. 설하 아가씨가 주군의 통행패를 들이미시는 바람에….”

“됐다. 은증왕이 아이들을 해할 리 있나.”

이환은 문을 빼꼼히 열어 내부의 상황부터 살폈다.

아이 셋이 은증왕 앞에 옹기종기 모여 황금의 사슬을 구경 중이었다.

“우와, 정말 멋져요. 이렇게 멋진 것 처음 봐요.”

“재랑, 이 바보 같은 녀석! 이건 멋으로 하는 게 아니야.”

“흥, 멋진 걸 멋지다고 하는 게 뭐가 바보야? 이런 황금이야말로 은증왕께 어울리는데? 다 멋지다구!”

남자아이들이 티격태격하는 동안, 설하는 장갑을 낀 무흔의 손목 위로 둘린 토끼털을 만지작댔다.

“귀여워라. 머리색과 꼭 같아요. 은증왕께서도 토끼같이 예쁘세요.”

“이런… 내가 토끼한테 미안해지는구나. 이리 털도 훔치고.”

“유모한테 들었는데, 간밤에 고생을 많이 하셨다면서요? 어떡해….”

설하의 고사리 같은 두 손이 무흔의 얼굴로 향했다. 이환의 어깨 너머, 하온의 시야에 그 모습이 들어왔다.

찰나, 하온은 머리를 굴렸다. 아직 제어를 습득하지 못한 치유자를 이능력자가 만지게 놓아둘 것인지. 비밀을 만천하에 저리 드러나게 하는 것이 제게 이득인지 아닌지.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고운 뺨이 폭 꺼졌어요.”

방심한 무흔은 순간 당황하여 얼어붙었다. 코앞까지 설하의 손이 바짝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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