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화
무흔은 몸을 물 밖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앉은 채로 머리를 물속에 깊숙하게 밀어넣고 있었다.
왼쪽부터. 귀까지 푹 잠기게 넣고는 손가락으로 간신히 머리를 헹구고. 그것이 양에 차지 않았는지, 물속에서 머리를 요란하게 흔드는 것으로 헹굼을 추가하고 있었다.
그다음은 오른쪽으로 똑같이. 앞으로 푹 또 반복하고. 그 모양새를 보며 웃지 않을 이는 세상에 없었다.
그렇다 하여 윤의 화가 풀린 것은 아니었다.
무흔이 좋게 보일수록, 제 믿음을 내팽개치고 떠나려 했다는 그 사실이 매섭게 마음을 찔러댔다.
멀찍이 떨어져 팔짱을 낀 채로 윤은 무흔이 한참 동안이나 머리를 그리 우스꽝스럽게 감고 있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눈으로는 그랬으나, 속으로는 당장이라도 다가가 머리를 감겨주겠다 제안하고 싶은 충동이 수십 번도 더 일었다.
결국 무흔이 머리를 다 감을 때까지 윤은 행동하지 못했다.
그리 나무처럼 구석에 오도카니 서 있는 그을 보고, 무흔이 반색을 했다.
“내가 옷을 입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인가? 손목을 풀어주려고?”
일단 그렇다 치기로 했다.
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무흔의 얼굴에 드디어 웃음이 번졌다.
“다행이야. 내내 옷을 어떻게 갈아입어야 할지 걱정이었는데. 그럼, 다 씻었으니 나가지. 뒤로 돌아서 주겠는가.”
윤이 전혀 모르겠다는 듯 의아한 척, 고개를 살짝 옆으로 갸웃하며 물었다.
“왜?”
“왜냐니! 그….”
무흔은 이유를 설명하려다 말고 멈칫했다. 몸을 보이기 싫어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 굳이 일부러 묻는 것이 얄미운 데다, 전에도 비슷한 화제로 놀림을 당한 적이 있었으니.
“나온다며?”
“주 국공이 돌아서야 나갈 거야. 눈을 감든가. 아니, 눈을 몰래 뜰 수도 있으니 안돼. 돌아서.”
“내가 돌아서면 수갑을 어떻게 풀어주겠는가?”
“내가 손을 앞으로 내밀 테니 촉감으로 인지하여 풀면 되지 않나?”
“번거롭게. 그냥 나와. 나도 가서 좀 쉬게.”
평행선의 실랑이가 계속되었다. 탈출도 실패한 마당에 무흔은 이런 것에서까지 지고 싶지 않았고, 무흔이 저를 배신한 마당에 윤은 덥석덥석 상대의 요구를 다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몸 좀 보는 게 뭐 대수라고. 아까도 다 봤는데. 은증왕, 가서 눈 좀 붙입시다. 얼른 나와.”
결국 아쉬운 쪽에서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욕실에는 뽀얀 수증기가 가득한지라, 새하얗고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탕에서 일어난 희끄무레한 살결의 형체는 무척이나 신비로웠다. 적자색 눈동자가 화룡점정이라, 윤은 일순간 넋을 놓았다.
온천수에 한참이나 머물렀던 무흔의 몸은 뜨끈하게 열이 올랐고, 달처럼 흰 피부는 복숭아의 분홍빛을 머금고 있었다. 윤의 머릿속에 무흔을 만지고 싶다는 생각 하나만이 유일하게 솟구쳤다.
“하아….”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무흔은 손을 이마에 짚었다.
한 발짝 앞으로 내딛는 순간 앞이 캄캄해졌다. 입술 사이로 힘겨운 숨결이 흘러나오더니만, 무흔은 그대로 물속으로 고꾸라졌다.
도주로 인한 육체의 피로, 텅 비어 버린 위장, 그리고 과도한 지인으로 인해 가뜩이나 좋지 않던 상태였으니 긴 목욕이 무리인 것도 당연했다.
놀라고 당황한 윤은 갈아입은 옷이 젖는 것도 개의치 않고 얼른 물에 뛰어들어 무흔을 안아 올렸다.
“은증왕! 정신 차려!”
물에 젖어 축 늘어진 몸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윤은 일단 맑은 공기를 마시게 하는 게 급선무라 판단했다.
윤은 숙영부인이 준비해 둔 커다란 면포를 다급히 무흔의 몸에 둘렀다. 그대로 번쩍 들어 안고 나가려 팔을 뻗던 그가 순간 멈추고 손을 떨궜다.
“아….”
탄식이 튀어나왔다. 그저 기절한 것뿐이니 회복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나, 제 몸에 닿으면 분명 지인이 힘이 쏟아져나올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상태를 악화시킬 우려가 있었다.
“밖에, 있느냐.”
“예, 주군!”
“은증왕의 옷을 가지고 오너라.”
윤은 무흔의 손발에 묶인 사슬부터 끊었다.
이걸 어째, 하며 눈이 휘둥그레져 놀란 여종은 얼굴을 붉히지도 않고 침착하게 날랜 손놀림으로 무흔에게 옷을 입혔다.
무흔의 뺨은 어느덧 핏기가 싹 사라진 채였다. 윤은 축축하게 젖은 무흔의 머리카락을 면포로 꾹꾹 눌렀다.
“성주님, 모시고 가서 제가 하겠습니다.”
“그래, 그리하거라.”
“수갑을 다시 채우실 것입니까?”
여종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묻는 말에 윤은 바로 답을 주지 못했다.
내일, 날이 밝아 그를 마주했을 때의 상황을 떠올려보았다. 앞으로의 방향을 고려해야만 했다.
결국 윤은 무흔의 손과 발에 다시 족쇄를 채웠다.
하얀 손목이 유난히 안쓰러워 보였지만 하는 수 없었다. 성주는 내뱉은 말을 지켜야만 했으니. 또한 이리해 두지 않으면 제 마음이 흔들릴 게 분명했다.
“당분간 그를 볼 일이 없으니, 처소에 가두고 명이 있을 때까지 내보내지 마라.”
성에 도착하여 화가 미친 듯이 솟구친 이후로 고작 두 시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윤은 축 늘어져 업혀나가는 무흔의 뒷모습에 이미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
이른 새벽, 윤은 어김없이 산에 올랐다. 지난밤 과하게 취한 지인 덕에 몸의 상태는 완벽했으나 수련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마음이 어지럽고 생각이 복잡했다.
욕실 바닥에 떨어졌던 손수건을 품에서 꺼냈다. 자신이 적어둔 산(山)이라는 글자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번져 있었다. 어제 그 와중에도 산에 가고 싶단 속내를 비쳤던 무흔을 떠올리자 마음이 한없이 불편해졌다.
‘산에 오르고 싶다 하였고, 또 온천이 궁금하다 하였지. 사람이 어찌 그리 눈을 빛낼 수 있는지. 눈동자의 색채가 밝아 그러한가. 그런 것이겠지. 그런 이유일 것이다.’
사람을 홀리는 듯한 그 자색 눈동자가 선명하게 윤의 기억을 뚫고 나왔다. 눈을 감아도 마치 바로 앞에서 시선이 맞닿아 있는 듯, 그리 아른거렸다.
‘혼절을 두 번이나 했으니 기력이 쇠하였을 텐데. 탕약이라도 준비하라 이를 것을 그랬나.’
온탕과 냉탕이 나란히 자리한 자신만의 장소에 이르자마자, 윤은 옷을 벗고 폭포수 아래 머리를 갖다 대었다. 머리를 차갑게 식혀보려 했는데 효과가 없었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음양교차욕(陰陽交叉浴)은 본디 7온 8냉의 횟수를 채워야 하는 것이나, 윤은 결국 절반도 오가지 못하고 탕을 나왔다. 다시 무흔의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잠은 제대로 잤으려나. 지내는 동안 시중을 들 자를 붙여주어야 할까? 혼자서는 식사도 불편할 테고 옷도 갈아입기 힘들겠지.’
윤은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집무실로 숙영부인을 불러들였다.
“찾으셨습니까.”
“이미 들어 알겠지만, 은증왕이 어제의 불미스러운 일로 인하여 처소에만 머물게 되었네.”
“예, 성주께서 손과 발에 모두 족쇄를 채우셨다지요.”
숙영부인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혀를 끌끌 차고 싶은 것을 참는 것 같기도 하고. 윤은 저도 모르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애초에 그… 다들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한 것이야. 할멈, 내 입으로 그를 어찌하겠다 말한 적이 있던가?”
“성주께 아무도 무어라 하지 않았습니다.”
숙영부인은 은근히 둘의 관계에 기대를 하고 있던 만큼, 당연히 노기 어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간밤에 그가 기력이 쇠하여 혼절을 하였으니, 당분간 원기를 돋우는 음식으로 은증왕의 식사를 준비해주게.”
“간밤에, 기력이 쇠할 만도 하였겠지요. 성주님의 처소에서 그가 옷이 찢긴 채로 나왔으니.”
“아니야, 그것은 다른 이유일세.”
“어찌 상대가 혼절할 때까지 교접을 하신단 말입니까! 나면서부터 제가 성심성의껏 돌보아드리고 곧은 성정을 가지시도록 그렇게 애를 썼다 믿었거늘…. 하아, 우리 성주께서 숙부께 못된 것만 배우셨습니다.”
억측도 이런 억측이 없었다. 윤은 기가 막혀 입을 떡 벌리다 말고 버럭 소리를 높였다.
“할멈, 그런 것이 아니라니까!”
“육체의 합일이란 어느 한쪽에 고통이 되어서는 아니되는 법입니다. 이리 장성한 성주께 이 노인네가 그 기본부터 다시 가르쳐야 하겠습니까?”
“내 은증왕에게 아무 그… 아무 짓도 하지 아니하였어.”
“그것도 모자라, 욕탕에서까지 은증왕을 또 실신시키셨다 들었습니다. 아니, 어찌 한 번 쓰러진 자의 몸에 재차 무리가 가는 행위를 하신 겁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는 겐가. 내 처소에서도 욕실에서도 오해를 살 만한 소리 하나 새어 나간 것이 없을 터인데.”
“설마, 입을 틀어막은 건 아니시겠지요. 야만스럽게.”
“나 원… 이 얘기는 그만 접지. 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가 어찌 날 믿어주지 않는가.”
윤은 제게 도끼눈을 뜨고 있는 숙영부인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넌지시 청을 했다.
“부탁할 것이 하나 있는데… 은증왕의 수갑 말이야, 할멈이 수고를 좀 해 주어야겠어.”
민망해하더니만, 손짓까지 곁들인 윤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를 듣고 있는 숙영부인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퍼졌다.
*
분주한 아침이 지나고 나서야 효명성의 주방이 잠잠해졌다. 숙영부인은 커다란 바구니를 손에 들고, 쟁반을 든 시종 둘을 거느리고 무흔의 처소를 찾았다.
“식사를 거르셨다 들었습니다.”
침상에 여전히 웅크려 누워 있던 무흔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미안하오. 몸이 지쳐 영 식욕이 돌지 않아 말이야.”
“기가 허할수록 잘 드셔야지요. 죽을 준비하였으니 가볍게 몇 술만 드십시오.”
손과 발에 쇳덩이보다 무거운 금 사슬을 차고 있으니 움직임이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들고 온 쟁반을 탁자에 고이 내려놓은 시종들이 얼른 무흔의 양팔을 붙들어 몸을 일으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자리에 앉아 무거운 손목을 간신히 들어 숟가락을 쥐었다. 아무래도 먹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예의상 한 입 머금었으나 부드러운 죽이 입안에서 모래알처럼 까끌거렸다. 억지로 겨우 넘기고, 한 번 더 간신히 죽을 삼켰다.
“미안하오. 아무래도 식사는 힘들 것 같아.”
무흔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죄인도 아닌데 수갑이라니. 어쩐지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숙영부인의 지시에 따라, 온화한 인상의 여종이 따뜻한 차를 한 잔 곱게 우려내어 무흔 앞에 놓아주었다.
“어린 첫 번째 잎을 거두어 만든 우전입니다. 최상품이지요. 마음에 드실 것입니다.”
옅은 초록빛이 감도는 차를 흠향하고, 무흔은 이를 한 모금 들이켰다. 기분이 대단히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은 기분 정도는 들었다. 찻잔을 두 번이나 비워냈다.
“잘 마셨어. 고맙소.”
“양손을 탁자 위로 올려보시겠습니까.”
무흔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숙영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더 기다리지 않고 무흔의 두 손을 직접 붙들어 탁자 위에 얹었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수갑의 사슬이 딸려왔다.
“무엇을 하려고….”
이번에는 탁자 위에 큼지막한 대나무 바구니가 턱 하니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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