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화
무흔의 팔뚝을 붙든 윤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새하얀 살결에 붉은 손자국이 남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였다.
툭. 투둑.
무흔의 종아리가 잠긴 물 위로 금 사슬들이 부서져 내렸다. 수면에 닿아 찰방 찰방 소리를 내며 가라앉았다.
“헉!”
맞다. 저 인간은 금속계 이능력자잖아! 무흔은 방금의 제 충동적인 계획이 얼마나 허무하고 말도 안 되는 일인가를 한 대 맞은 듯이 깨달았다.
멍하니 선 채로 양 손목에 팔찌처럼 남은 금 수갑의 흔적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시선을 느꼈다.
무흔은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급히 들었다.
윤이 팔짱을 낀 채로 서서 제 몸을 위아래로 진득하게 훑어보고 있었다.
사내 둘이 홀딱 벗은 채로 서로 마주 보고 선 형국이라니! 그것도 심지어 젖은 채로.
무흔은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삽시간에 뺨을 빨갛게 물들였다.
“뭘 보는 거야!”
무흔은 물속에 그대로 철푸덕 주저앉으며 윤에게 요란하게 물을 튀겼다. 정작 물을 맞은 쪽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혼자 비명을 질렀다.
“아악! 아으… 아파, 윽….”
기껏 다 나은 엉덩이를 붙들고 물속에서 옆으로 쓰러졌다.
“왜? 다쳤나?”
지금껏 내내 먹구름이라도 머리에 띄운 듯이 찌푸리고 있던 윤이 거짓말처럼 화들짝 놀라서는 거대한 욕조 안으로 성큼 발을 디뎠다.
“윽… 이런.”
윤이 밟은 것은 무흔의 손목에서 떨어진 황금 조각이었다. 하필 너무도 깨끗하게 잘린 단면의 끝부분이라, 뾰족한 끝에 발바닥을 깊이 찔렸다.
발에서 피가 솟았다. 물이 아래쪽에서부터 붉게 물들어 오르자, 엉덩이의 통증이 좀 가신 무흔은 윤의 발에 상처가 났음을 눈치챘다.
“주 국공! 다쳤어?”
“그대야말로 다친 건 아니고?”
“나는 그저 조각에 부딪힌 모양이야. 피가 나지는 않는데… 발을 이리 내 봐.”
“왜.”
“왜냐니. 상처를 치유해야지?”
“그쪽으로부터 지인을 안 받겠다 했잖아. 나가서 의원에게 상처를 보이면 될 일이야.”
“아니,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데?”
물 밖으로 제 몸이 드러나지 않도록 웅크린 채, 무흔은 쪼그리고 앉아 윤에게로 향했다. 그렇게 물속에서 움찔움찔 두 걸음이나 움직였을까, 바닥에 깔린 조각을 밟고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렸다.
“윽! 어휴, 대체 사슬을 얼마나 잘게 잘라서 뿌려댄 거야?”
“움직이지 마. 다칠 수도 있어.”
“난 엉덩이랑 발이랑 피 안 났는데.”
“다음번 조각은 날카로울 수도 있잖나.”
무흔은 들은 척 만 척, 금 사슬 조각들이 떨어진 구역을 빙 돌아 윤에게로 다가갔다.
자신의 상처를 살피던 윤은 무흔이 코앞까지 온 것을 한발 늦게 발견하고는 당황하여 외쳤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있어야 내가 조각들을 치우지!”
“치료를 해 주겠다니까. 허, 말로만 안 받겠다 하지 본인도 물 밖으로 안 나가고 있으면서 뭘.”
무흔은 몸을 숙여 윤의 발을 덥석 잡아 버렸다. 당연하게도, 순식간에 상처가 아물었다.
“이제 됐지?”
이제나저제나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보고 싶었던 무흔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또다시 둘이 홀딱 벗고 있는 상황임을 깨달았다.
위급한 상황을 하나 넘기고 나니 낯뜨거움이 순식간에 밀려들었다.
무흔은 양 뺨과 귓불까지 빨갛게 물들어서는 양팔을 가슴 위에서 교차시켜 몸을 가렸다. 어깨를 움츠려 물에 한껏 잠긴 채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다른 데 신경을 팔다 뒤늦게 바닥의 금 조각을 발견하고 이를 피하려던 무흔은 몸의 중심을 잃었다.
“으아!”
턱.
윤의 팔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와 옆으로 휘청이는 무흔의 허리와 등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여긴 미끄러우니 조심해야 해.”
맞닿은 맨살의 면적만큼, 정화의 기운이 적나라하게 넘어갔다. 윤은 먹어서는 안 되는 사탕을 맛보았다 뱉어 버린 아이처럼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무흔을 놓아주며 중얼거렸다.
“어찌 그렇게까지 얼굴이 새빨개질 수 있나?”
“내가 뭘.”
“거울을 좀 가져다 드릴까? 하얀 피부가 아니라 붉은 피부라 해도 믿겠어.”
“헛소리 말고 저것들이나 치워.”
무흔은 얼른 등을 돌려서는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려 욕조의 반대쪽 끝으로 향했다. 돌벽에 등을 딱 붙이고 앉아 윤이 문제의 금조각들을 치우는 것을 바라보았다.
물속으로 손을 뻗은 그가 이능력을 사용하여 흩어진 것들을 한데 모아 둥글게 뭉쳤다. 순식간에 묵직한 구체를 갖춘 금덩어리에 무흔의 시선이 붙들렸다.
윤이 성큼성큼 걸어 무흔에게로 다가왔다. 무흔은 어렵게 구해 몰래 숨겨놓고 보던 서책의 삽화에 꼭 저런 몸을 한 사내가 등장했던 기억이 난데없이 떠올랐다.
‘왜 이리로 오는 거야! 쪼그리고 오면 좀 좋아? 왜 서서 오는 거지? 본인 몸에 달린 게 자랑스러운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내가 눈을 둘 곳이 없잖아!’
무흔은 더 도망갈 곳도 없이 욕조 끝에 매달려 고개만 옆으로 돌렸다. 등을 보였다간 험한 꼴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솟구친 탓이었다. 최소한의 방어를 위해 일단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까이 오지 마.”
“손 이리 내 봐.”
“싫어!”
무흔은 무릎이 가슴에 닿도록 웅크려 두 팔로 자신의 몸을 끌어안았다.
“내 몸을 취하려거든 우선 명줄을 끊어놓아야 할 것이야! 그런 후에, 내 사체를 욕보이든 말든 맘대로 해!”
고개를 있는 힘껏 쳐들어 윤을 노려보는 무흔의 눈에는 저항의 기색이 가득했다. 울분을 못 이겨 눈물이 고인 것인지, 아니면 물에 젖어서인지. 그 촉촉한 자색 눈동자가 윤의 심장을 두들겨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수갑을 원상태로 복구하려는 것뿐이야.”
“웃기고 있네. 그… 그게… 그 모양인데?”
“그게? 그 모양?”
무흔은 못 볼 걸 봤다는 듯이 몸서리를 치며 윤의 다리 사이로 손가락질을 했다. 두 눈은 질끈 감은 채였다.
“그거! 섰잖아! 나를 보고 발정한 게 아니면 대체 왜!”
윤은 그제야 제 상태를 깨달았다. 억누르지 못할 만큼 육욕이 인 것은 절대 아니었는데, 대체 언제부터 이리된 것인지. 아까 넘어지려는 무흔을 붙들었을 때, 살이 닿은 것이 원인이었는지 아니면 그 전에 무흔이 발을 만져주었을 때였는지.
시작은 분명치 않았으니 어찌 되었든 현재가 이러하니 뭐라 해명은 해야만 했다.
“흐흠, 원기 왕성한 건강한 사내는 간혹 이유 없이 이럴 때도 있는 법이야. 뭐… 딱히 그쪽 때문에 이런 게 아니라….”
윤이 슬그머니 두툼한 양다리를 접어 물속에 하반신을 담그고 앉아 버렸다.
“허, 누굴 바보로 아나. 이유 없이 아무 때나 그리된다? 그건 병이야. 의원에게 진찰이나 받아 봐.”
무흔은 여전히 자신의 몸을 꼭 끌어안은 채로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대는 나만큼 건강하지 않아서 모르는 거야. 흠, 뭐, 손을 내어주지 않겠다면 하는 수 없지.”
윤은 무흔 앞에 제대로 자리 잡고 마주 앉아 결국 무흔의 한쪽 손목을 잡아챘다.
“싫어! 이 파렴치….”
“아니라니까!”
윤은 버럭 성질을 내며 무흔의 손목에 기어이 사슬을 매달기 시작했다. 그의 오른손에 들린 금덩어리가 무흔 손목의 금팔찌에 들러붙어서는 사슬의 형체를 서서히 갖춰가기 시작했다.
“난 싫다는 놈 머리채 붙들어 엎어 놓고 쑤셔 박는 취미는 없어.”
오해를 받은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윤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표현이 구체적인 것이, 어째 있다는 소리로 들리네.”
무흔 또한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손목이 풀린 건 아주 잠깐이었다. 금세 이리 다시 족쇄가 채워진 것을 내려다보며 무흔은 불평을 얹었다.
“주 국공, 어째 아까보다 길이가 많이 짧아진 것 같은데? 손을 쓰기에 너무 불편하잖아.”
“그걸로 내 목을 졸라 죽이려 하지 않았는가, 적국의 황자가 내 감시병들을 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테니, 기장을 줄이고 그 대신 묵직하게 굵기를 늘렸지. 함부로 손을 놀린 대가요.”
“쪼잔하기는.”
무흔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구시렁대는 것을 들었지만, 윤은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탕에서 나가려는데, 무흔이 그를 붙들었다.
“아까 그 핏물이나 좀 퍼내고 가지?”
무흔은 단단히 묶인 손목을 동시에 앞으로 쭉 뻗어 윤이 피를 흘렸던 곳을 대충 가리켰다. 헌데 놀랍게도, 붉게 물들었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어… 어떻게 한 거야?”
윤이 대답 대신 한쪽 벽을 가리켰다.
바깥에서 작은 창을 통해 대나무 관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온천수가 욕조를 채우고, 반대쪽으로 난 작은 구멍으로 다시 같은 양의 물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핏물이 있던 곳은 바로 토출구 근방이었다.
“신기한 장치네. ‘산’에, 온천이 솟는다 하더니, 성안으로 다 끌어올 줄이야. ‘산’에 안 가도 온천수를 즐길 수 있다니… 참으로 대단해. ‘산’의 온천은 어떻게 다르려나?”
굳이 산을 강조하는 무흔의 독백을 윤은 못 들은 척 외면했다. 더는 말을 섞기도 싫다는 듯 입을 더 꾹 다물고 일부러 눈매를 무섭게 한 채로, 그가 먼저 탕을 나섰다.
무흔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물속에 턱 끝까지 폭 잠긴 채, 윤의 움직임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보송보송하고 도톰한 면포를 집어 든 윤이 몸의 물기부터 닦아내기 시작했다.
훔쳐보는 시선을 눈치채고 그가 뒤로 휙 고개를 돌리는 순간, 당황한 무흔은 허둥지둥 머리카락에 손을 댔다.
“머리를 좀 감아볼까.”
긴 머리카락을 주섬주섬 한쪽으로 모아 고개를 옆으로 틀어서는 일단 물에 푹 담갔다. 수갑으로 인해 불편한 두 손으로 어떻게든 머리를 감아보려 애쓰는 모습이 윤의 시야에 들어왔다.
윤은 일단 무흔에게 등을 보이고, 그런 후에 몰래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혹시나 들킬까 하여 얼른 다시 근엄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화가 풀렸기 때문은 아니었다. 무흔의 손짓 몸짓이 우스꽝스러웠던 터라, 그것이 어쩐지 귀여웠다.
‘귀엽다? 내가 저자에게 화를 더 내도 모자랄 판에, 귀엽다?’
순간 윤은 다시 처음처럼 오만상을 찌푸렸다. 무흔은 제게서 도망을 치려 한 자였다. 유일한 치유자가 될지도 모르는 그를 포기하기로 결심했는데, 난데없이 귀엽다니.
윤은 면포를 새카만 머리카락에 대고 마구 털었다. 잡념을 날려 버리기 위함이었다.
그런데도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순간, 그는 다급히 돌아서서 손에 쥔 면포를 입에 꽉 물고 웃음을 참았다.
무흔이 저 상황에서 결국 머리를 감기 위한 기묘한 해법을 찾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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