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45화 (45/85)

#045화

“거기 누구요?”

방이 어두웠다.

무흔은 근방에 놓인 촛대 하나를 집어 들고 맞은편의 상대에게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누구냐고!”

대답이 없고, 소리 또한 내지 않는 상대의 형체가 조금 더 커졌다.

한 걸음 가까이 갈 때마다 조금씩 더.

촛불 앞에서 제대로 된 형체를 드러낸 존재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이 아니었다.

무흔이 홀린 듯이 두 손을 뻗자 상대도 똑같이 그리했다. 똑같이 두 손에 황금 수갑을 차고 한 손에는 촛불을 들고 있었다.

“나?”

손끝에 닿는 촉감이 차갑고 매끈했다. 무흔의 머리에서 한 가닥의 지식이 뽑혀 나왔다.

“이것이 거울이란 말인가?”

과연 금속계 이능력자의 방에 놓인 거울다웠다. 거울이라 하면 얼굴이 들어갈 크기의 나무 경대 정도를 생각하기 마련인데, 이것은 윤의 키보다 길이가 길었고 가로의 폭 또한 그의 몸을 담기에 충분했다.

“내가 이렇게 생겼어….”

무흔과 거울 사이에 촛불 하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세안을 할 때 물에 비쳐 어렴풋하게 느꼈던 그 형체와는 확연히 달랐다. 이목구비가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게 드러났다.

붉은빛이 아른거리는 보라색 눈동자는 제게도 낯설었다. 새하얀 살빛과 머리카락은 매일 보는 것인데도 거울을 통해 바라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름답구나.”

그런데 왜. 라는 의문이 따라붙었다.

지금껏 살면서 얼굴을 마주한 이들의 수가 남들의 반의 반도 되지 않겠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만큼 아름다운 얼굴은 본 적 없었다. 제 모습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데, 아이들을 제외하고 제게 그리 말한 이가 있었던가.

“내 눈에만 예쁜가 보네.”

울적한 표정 위로 기운 하나 없는 미소가 번지다 사그라들었다.

동시에 자기연민이 일었다. 거울 속의 아름다운 사내는 옷이 찢긴 채로 상반신을 절반 이상이나 드러낸 상태였다.

“손이 이래서야 옷도 못 갈아입을 거고. 이대로 누가 보는 것도 싫은데….”

초를 거울 옆 선반에 올려둔 무흔은 근처에 곱게 개어진 윤의 옷을 집어다 일단 어깨에 둘러 보았다. 수갑 때문에 소매에 팔을 끼울 수는 없지만, 목 아래에서 손으로 붙들어 옷깃을 여미면 그럭저럭 몸을 가릴 수는 있었다.

무흔은 한참이나 그렇게 더 거울 앞에 머물렀다.

눈을 크게 떠 보기도 하고, 옆모습도 비춰보고,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면 똑같이 따라 하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자신의 온갖 표정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거울 앞에 코가 닿을 듯이 바짝 다가간 무흔은, 그제야 제게 당장 필요한 것이 목욕임을 깨달았다.

절그럭 절그럭 힘겹게 발을 옮겨 문 앞에 도달했다.

잠시 고민하다, 살그머니 문을 열어 고개를 밖으로 뺐다.

“저… 미안한데. 좀 씻을 수 있겠는가?”

무흔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병사들의 맞은편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여종 하나가 벌떡 일어나 섰다.

“이쪽입니다!”

“응?”

“숙영부인께서 씻을 물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이리 고마울 데가 있나. 헌데 내가 씻고 싶어 할 것을 어찌 알고?”

“숙영부인은 본디 모르는 일이 없으십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언제 졸았냐는 듯 또랑또랑한 눈빛과 목소리로, 그녀는 옆에 내려두었던 옷가지와 수건을 챙겨 들었다.

“아까 성주님께 목욕 얘길 드리니 알았다 하셨는데,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말이에요. 제가 따로 이리 기다리길 잘했네요. 숙영부인께서 말씀하시길, 언제나 능동적으로 할 일을 찾아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셨거든요.”

“좋은 가르침을 받았구나.”

무흔은 병사들의 도움으로 신발을 신고, 금사슬을 질질 끌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욕실에 당도했을 때, 그들은 예상치 못한 인물과 맞닥뜨렸다.

“주군을 뵙습니다!”

감시병 둘이 우렁차게 외치며 인사를 올렸다. 탕 안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곳곳에 밝은 등불이 타오르는 욕실 안에는 새카만 돌로 된 거대한 욕조가 놓여 있었다. 장정 다섯이 들어가 모두가 다리를 쭉 뻗고도 남을 정도의 크기였다.

“이 시간에? 날 찾아온 건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따끈한 탕에 윤이 몸을 푹 담근 채 미간을 찌푸리고서는 인사를 받았다. 왜 혼자 있는 시간을 방해하느냐는 듯한 어조가 강렬했다.

당황한 여종은 무흔의 옷을 꼭 끌어안은 채로 허리를 깊이 숙이고서는 상황을 고했다.

“계신 줄 몰랐습니다. 은증왕께서 목욕을 청하시어 이리로 모셨습니다.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

“잠깐. 어딜 물러간단 말이냐?”

윤이 모두를 멈춰 세웠다.

“본디 목욕 시중을 들려 하였습니다만, 숙영부인께서 말씀하시길 두 분이 같이 계실 때는 자리를 피해드리는 것이 최우선이라 하셨습니다.”

“다들 나가서 대기해. 난 다 씻었으니 그만 가 볼 거야. 은증왕은 알아서 씻고 오시오.”

병사들과 여종이 물러나는데도 무흔은 움직일 생각을 않았다.

“다들 나가라 한 말 못 들었나?”

“그대를 본 김에 해결해야 할 것이 있어서.”

“뭔데?”

“손에 발에 이리 수갑을 채워 놓은 터라… 내가 옷을 벗을 수가 없잖아.”

“왜 못 벗어?”

“못 벗지. 어찌어찌 벗은 다음엔 소맷부리에서부터 수갑에 턱 걸린다고. 어차피 윗옷은 망가졌으니 칼로 찢어 버린다 치고, 하의까지 버리는 것은 너무 아깝지 않겠는가?”

사람 하나 죽이고도 남을 눈빛으로 무흔을 응시하던 윤이 등을 뒤로 기댄 채 두 팔을 좌우로 벌려 욕조 턱에 걸치고 물었다.

“그래서?”

가슴에서 겨드랑이를 지나 어깨에까지 이르는 근육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 위로는 단단한 어깨와 굵직한 팔이 길게 뻗었다.

무흔은 제 시선이 그리로 향하는 것을 깨닫고는 놀라서 얼른 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일부러 더 목소리를 크게 질렀다.

“결자해지! 이리 묶어놓은 그대가 풀어야지. 씻는 동안만이라도.”

“그럼, 수갑을 다시 채우려면 그쪽이 다 씻을 때까지 나보고 기다리라는 건가.”

“뭐 오래 걸리기야 하겠어? 기다리는 게 내키지 않거든 내일 아침에 기상하여 다시 채워 놓으면 될 거고. 그 잠깐 내 손발 풀리는 것도 허락 못 하나?”

윤이 탕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서자, 무흔은 눈이 동그래져서는 어쩔 줄 모르고 고개를 옆으로 휙 돌려 버렸다. 너무 놀란 나머지 두 손으로 붙들고 있는 옷깃을 더 꽉 움켜쥐었다.

대체 방금 본 것이 무엇인지. 잘못 보았을 것이다, 설마, 어떻게 저런 게… 그리 생각하다가도 다시 눈을 돌려 확인을 해 보기는 아무래도 민망했다.

“가… 갑자기 그리 일어나면 어떡하나!”

“그게 무슨 상관인데?”

“얼른, 옷이나 걸치고, 조좆… 족쇄나 좀 풀어!”

“내가 내 성에서 내 몸 씻고 나오는데도 포로의 눈치를 봐야 하나?”

무흔은 윤의 말투에 부아가 치밀었다. 자신이 당황하는 것을 눈치채고 그가 일부러 더 저러는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눈을 피해 보려 해도 눈부실 정도로 잘나디 잘난 윤의 몸뚱이가 자꾸만 시야에 걸렸다.

윤은 벗어놓은 자신의 옷가지 옆에 놓인 허리띠를 집어 들었다. 그 아래 매달린 은장도를 뽑아 들고서는 다가와 거침없이 무흔의 상의를 찢어 내렸다.

“이게 무슨 짓이야!”

벌컥 화를 내면서도 무흔은 여전히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고 눈알을 굴렸다.

“어차피 망가진 옷이고, 나는 망아지처럼 설치고 다니는 포로의 수갑을 풀어줄 생각이 없으니. 그대가 씻으려면 옷을 뜯어버리는 수밖에.”

말투로 보나 표정으로 보나 또 이토록 무례한 행동으로 보나, 여전히 화가 난 게 분명했다. 그가 칼로 가른 옷을 벗겨내자, 무흔의 가슴 안쪽에 고이 보관하고 있던 손수건 하나가 팔랑이며 젖은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산(山).

윤의 필체로 적힌 그 글자 위로 물이 서서히 스며들었다.

“아….”

하필 이럴 때. 무흔은 먹이 번져나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간절히 원했던 산행이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덜컥 겁이 났다.

윤의 표정을 살폈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진정한 호의로 저것을 제게 남겼던 것이었으니.

이제 정말로 산행은 물 건너갔다는 우울한 생각이 무흔의 마음을 집어삼켰다. 그래도 혹시나,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무흔이 말을 건넨 순간이었다.

“주 국공, 그래도 산에는 데려… 헉!”

이번에는 바지였다.

무흔은 당황할 대로 당황한 데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칼날에 다리가 찔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비명만 한 번 내지른 채 그대로 얼어 있었다.

발밑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멍하게 바라보다, 퍼뜩 생각났다.

“내 노리개!”

“응?”

“백옥으로 된 노리개를 허리에 차고 있었는데, 어디 갔지?”

“못 봤는데.”

가뜩이나 좋지 못한 기분이 더 나락으로 가라앉았다. 유일하게 단 하나 간직하고 있는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무흔은 넋이 빠진 채, 금방이라도 울 기분이 되어 버렸다.

“주 국공, 찾아줄 수 있어?”

“도주 중에 줄이 끊어져 잃어버린 모양이군.”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 꼭 찾아줘. 나는… 어… 내 처소에서 나와 농기구 보관하는 쪽으로 난 길을 따라서 응방까지 쭉 갔어. 응방 옆 수레가 모여 있는 곳에서부터 서문까지 쭉 달렸으니 그 경로를 찾아보면 나오지 않을까?”

알아들은 건지 아닌지, 윤에게서는 아무런 답도 없었다. 냉담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무흔을 빤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 시선 덕에 무흔은 퍼뜩 깨달았다. 지금 저는 맨몸에, 손발에는 사슬만 차고 있는 치욕스러운 상태라는 것을. 다급히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시급했다.

발목에 엮인 사슬이 돌바닥에 마구 스치는 소리에 욕실이 쩌렁쩌렁 울렸다.

물에 몸을 푹 담그자마자 무흔은 제게서 휙 돌아선 윤에게 손바닥으로 물을 끼얹었다. 굵직한 허벅다리 위로 탄탄하게 솟은 엉덩이에 물세례가 매섭게 날아들었다.

“무슨 짓이오!”

“나를 진짜 희로국에 보낼 거야?”

“난 이제 당신한테 볼 일 없어. 성주와 포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난 볼 일이 있는데.”

“뭐가.”

“목욕을 마치면, 손발이 이래서야 옷을 입을 수가 없잖나.”

“그러든지 말든지. 포로 따위 만인 앞에 몸을 드러내든 말든 치욕을 겪든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욕조 바로 앞에서, 무흔에게 널따란 등을 보인 채 윤이 막 한 걸음을 내디디려던 찰나였다.

그의 등 뒤에서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거세게 일었다.

이어 윤의 입에서는 고통스런 신음이 터져나왔다.

“윽!”

욕조는 바닥보다 두 단이나 올린 자리에 놓였으니, 무흔이 벌떡 일어나 윤을 공격하기에 딱 좋은 높이였다.

무흔은 두 팔을 들어서는 손목에 걸린 사슬을 윤의 목에 확 걸어 버렸다. 그대로 이를 뒤로 당기자 윤의 목이 뒤로 딸려왔다. 무흔은 손목을 교차하여 있는 힘껏 목을 졸랐다.

“살고 싶거든, 나를 보내지 않겠다 약조해!”

“윽!”

“어서! 거부하면, 죽여 버릴 거야!”

“으….”

윤의 손이 뒤로 넘어와서는 무흔의 손목을 확 낚아채려 했으나, 무흔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이래도 되나? 이러다 이자가 정말 죽으면 어떡하지?

무흔은 덜컥 걱정이 스쳤지만 바로 떨쳐 버렸다. 눈을 부릅뜨고 사슬을 당겨 윤의 목을 바짝 졸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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