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44화 (44/85)

#044화

아직 무흔의 눈이 감긴 것은 아니었다.

“은증왕!”

“대충 아무 데나 내려놔. 하아… 더는 못 버티겠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오늘의 소란은, 하아… 이 사람이 사과하리다. 하아… 지인을 과도하게 하니 이렇….”

무흔의 눈이 감김과 동시에 고개가 뒤로 꺾였다. 당황한 윤은 안고 있는 몸을 얼른 다시 추슬러 보았지만 무흔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은증왕! 눈을 떠 봐, 은증왕!”

무흔은 잠이 든 것인지 혼절을 한 것인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대로 늘어져 버렸다.

제 품에 안긴 그 모습을 윤은 한참이나 빤히 내려다보다 두 팔에 꾹 힘을 주었다. 무흔의 머리가 제 심장 위로 툭 떨어지기 무섭게 제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포로가 도망을 치다 활에 맞아 죽었다 공표할까.”

윤의 입술 사이로 부질없는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죽음을 가장한 후 이대로 제 처소에 가두어두고 죽는 날까지 곁에 두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

묘책인지 망책인지, 정신이 나간 것인지.

“내가 대체 어디까지, 허….”

기가 차서 웃음이 터졌건만, 이어 한숨이 튀어나왔다. 지인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뒤엉킨 제 속내가 한심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무흔을 안아 들고 바깥으로 나서려던 윤은 문 앞에 선 채로 한 번 더 망설였다.

이러한 와중에도 살살 새어 나와 제 기혈을 맑게 해 주는 상대의 지인이 한없이 달콤하게 느껴졌다.

제 품에 가득한 온기가 싫지 않다 느껴진 덕일까. 날뛰던 분노가 이제는 한풀 꺾였다.

걸음을 돌린 윤은 무흔을 자신의 침대 위에 조심스레 눕혔다.

하얗게 찰랑이는 긴 머리카락이 베개 위로 흩어졌다.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어쩐지 안쓰러웠다. 이제 더는 낯설지 않은, 이질적인 그 보랏빛 눈동자가 가려진 탓이라 윤은 그리 여겼다.

“당신이 옳아. 내가 그 처지였다 해도 똑같이 했겠지. 탈주는 좋은 판단이야. 기회도 잘 잡았어. 다만 계책이 미흡했을 뿐.”

윤은 한참을 그저 멍하게 앉아 무흔을 내려다보았다. 화가 나는 이유를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포로를 제대로 관리해야 하는 책임자로서의 분노라면 이렇게까지 속이 뒤집힐 이유는 없었다.

“내 곁에 머무는 것이 그리 싫었나. 이리 멍청한 탈주를 시도할 정도로….”

진짜 이유를 깨닫는 순간, 뒤늦게 사평의 조언이 떠올랐다.

곁에 두실 것이라면 옥에 가두지 마시라고.

게다가 자신은 연회장에서 숙부가 그를 욕보이도록 내버려 두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차곡차곡 쌓인 그 모든 기억들이 한꺼번에 후회로 밀려들었다.

“자업자득이로구나.”

화가 가라앉았다. 적막 속에서, 제 심장이 박동이 귓가에 울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상의를 벗고, 윤은 무흔의 몸 위로 올랐다. 목덜미에 새겨진 입맞춤의 흔적을 매만지다 손끝으로 쇄골을 훑었다. 분노가 가라앉은 자리에 미안함이 솟고,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애틋함이 들어찼다.

단단하게 틀어 올렸던 머리를 풀어내리고 무흔에게로 몸을 숙이자, 깊은 밤의 색을 한 그의 머리카락이 새하얀 몸을 뒤덮었다. 찢긴 옷 사이로 드러난 하얀 가슴에 입술을 갖다 대자 다시금 정화의 기운이 울컥 밀려들었다.

“이리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서야. 내 입으로 끝이라 하였거늘.”

과도한 지인으로 쓰러진 치유자에게 더 이상의 방출은 위험했다. 윤은 베개 위로 흩어진 새하얀 머리카락 끝자락만을 가만히 쥐어보았다.

윤은 진퇴양난의 덫에 걸려 버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무흔의 곁에 가만히 누워 수갑이 걸린 손목의 맥을 짚었다.

“젠장.”

윤은 한숨부터 내뱉었다. 그가 비록 의원은 아니었으나, 치유자들의 맥에 대해서는 제법 아는 바가 있었다.

북방의 성주이자 국공의 작위를 가진 대륙 최강의 이능력자에게 지인을 행할 때면, 대부분의 치유자들은 몸을 사리지 않고 기운을 내어주는 경향이 있었다.

치유자들의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윤은 매번 그들의 맥을 짚어 상태를 파악하곤 했으니, 이제는 제법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지금 무흔의 맥은 그저 휴식만으로는 부족한 상태였다. 의원이 필요했다.

윤이 밖으로 막 나오자마자, 숙영부인 아래 일하는 시종들이 2인분의 옷가지와 면포를 들고 나타나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냐?”

“목욕물이 준비되었습니다. 두 분이 함께 들어가시면 됩니다.”

“허, 거 참. 하아….”

고작 한 시진 사이에 한숨을 몇 번이나 쉬는 것인지. 윤은 그들에게 대충 손짓을 했다.

“알았으니 가 봐. 아, 하온은 깼나?”

“그렇다고 합니다.”

“당장 이리로 데려와.”

밤이 어둑했음에도 그들이 주저하는 표정이 윤에 눈에 대번에 들었다.

“왜.”

“그는 아직 회복이… 다른 의원을 부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하온과 친분이 있는 여종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냈다.

머리를 맞고 기절했을 하온의 상태를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윤은 무흔의 맥을 다른 의원로 하여금 짚게 할 수가 없었다.

보초를 서는 병사들 쪽으로 돌아서서, 명을 내렸다.

“가서 이환을 찾아. 하온을 들어 안아서 당장 내 처소로 데려오라고 해. 침통도 챙기라 하고.”

“예, 주군.”

그리 오래지 않아 정말로 이환이 하온을 품에 곱게 떠받들어 안은 채로 나타났다.

하온의 표정에 못마땅한 기색이 그득한 것은 맞은 머리통이 편치 않아서가 아니었다. 굳이 성주의 명대로 저를 안아 들고 온 이환에 대한 불만이었다.

“멀쩡히 걸을 수 있다니까요. 정 불안하면 가마를 타도 될 것을. 왜 굳이 이리 안겨 와야 합니까?”

“편히, 조속히 왔으면 됐지 뭘. 하하. 자, 들어가 봐라. 주군께서 ‘당장’이라고 두 번이나 강조하셨다고 하잖아?”

이환은 하온을 들여보내고 기척을 지우고서는 방문 앞에 가 섰다. 빼꼼히 열린 틈으로 안의 사정을 들여다보았다.

“하온, 네 몸은 좀 어떠하냐?”

“괜찮습니다.”

“얼굴에 멍이 들겠구나. 뒷머리에는 혹이 났을 테고.”

“아… 예.”

“진료를 볼 수 있겠느냐. 혹 무리가 되거든 이야기하거라.”

“그저 타박상일 뿐입니다. 괜찮습니다.”

걱정이 듬뿍 배어나는 윤의 목소리에 하온은 자신의 광대뼈를 어루만졌다. 시킨 대로 무흔이 아주 잘 때려주었다.

“은증왕은 어쩌다 이리 혼절을 한 것입니까?”

맥을 짚은 하온은 윤에게서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상황을 파악했다. 무흔의 목덜미가 울긋불긋했다.

윤을 힐끗 돌아보고서는 침통에서 장비를 꺼내 침대 위에 길게 펼쳐두었다.

“오면서 이환 종사관에게 듣자 하니, 성주님께서 이능력을 아주 많이 소모하셨다지요.”

“그러….”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하온은 벌떡 일어나 방문으로 향했다.

드르륵.

문이 열렸다. 문에 귀를 대고 있던 이환이 퍼뜩 놀라 하온과 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어 꾸벅 허리 숙여 윤에게 사죄부터 올렸다.

“죄송합니다. 걱정이 되는 터라….”

“은증왕에 대해 자네가 걱정할 게 뭐 있나. 의원이 이리 왔는데.”

“하하, 예. 그럼요. 물론입니다.”

윤의 무심한 답변에 이환은 아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은증왕이 아니라 하온의 몸 상태가 걱정되는 것이라 고쳐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환이 고개를 드는 순간, 하온의 어깨 너머로 무흔의 몸이 시야에 꽉 차게 들어왔다. 번쩍거리는 수갑과 족갑을 차고, 허연 속살을 다 드러낸 채 침대에 널브러진 몸.

이환은 경악에 찬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그… 그럼, 저는 이만… 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그가 마당으로 나간 것을 확인한 후에야 하온은 침을 놓기 시작했다.

“네게 몹쓸 짓을 한 자를 이리 돌봐달라 하여 미안하구나.”

“저는 의원입니다. 그런 것은 개의치 않습니다.”

몇 발짝 뒤에 물러서 있던 윤은 하온의 무덤덤한 표정을 눈에 담았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하온이라면 정말로 사사로운 감정과 무관하게 진료를 해 줄 것이 분명했다.

“은증왕의 상태는 어떠하냐? 혹 내가 그의 기를 상하게 한 것인가?”

“그 정도는 아닙니다. 도주로 인해 기력을 소진하여 몸의 피로도가 무척이나 높은 상태였는데, 지인이 너무 짧은 시간에 또한 너무 과하게 행하여진 터라 정신을 잃은 정도입니다.”

윤이 눈에 띄게 안도하자, 하온은 불쾌한 표정을 감추려 방향을 바꾸는 척 고개를 돌리며 침을 놓았다.

“대체 어떤 식으로 기를 취하셨기에 은증왕이 이렇게까지… 동침도 하지 않으신 것 같은데요?”

“흠, 뭐… 딱히 그런 정도는 아니었는데… 은증왕이 도주를 하느라 체력이 많이 쇠하였던 모양이지.”

“상태를 보아하니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깨어나면 씻고 싶다 하겠군요.”

침대에 가까이 다가온 윤은 무흔의 이마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그 세심한 손길을 바라보는 하온의 눈이 썩 곱지 않았다.

“원하신다면 지금 포로를 깨우겠습니다.”

“침으로?”

“예.”

“됐다. 그냥 쉬라 해.”

“하지만 성주님의 방 아닙니까. 침을 다 맞고 나면 은증왕이 여길 떠나야 성주님께서 쉬시지요.”

“내가 다른 데서 자면 되지 않겠느냐. 너도 침을 다 놓거든 깨어나는 것을 기다리지 말고 얼른 가서 쉬거라.”

윤은 하온의 어깨를 두드려주고서는 처소를 나섰다. 마당에서 서성이던 이환이 얼른 다가왔다.

“아직 안 갔느냐?”

“하온이 일을 마치면 데려다주려고 합니다.”

“뭐, 그리하거라. 들어가 봐. 은증왕은 굳이 깨우지 말고.”

“예. 헌데… 그….”

“왜?”

“주군께서 지인을 받으셔야지요. 나령을 부를까요?”

“됐어.”

“하오나….”

“내일, 내일 부르자. 난 좀 쉬어야겠다. 은증왕은 내일 날이 밝으면 처소로 옮기라 해.”

윤은 말을 빠르게 쏟아내고서는 휙 돌아 걸어 나갔다.

살면서 오늘처럼 온갖 감정들이 휘몰아친 적은 없는 듯했다. 정말로 쉬고 싶어졌다.

*

무흔이 깨어났을 때, 하온은 쉬어야 한다는 이환의 성화로 이미 방을 뜬 지 오래였다.

방에 홀로 남은 무흔은 몸을 일으키다 말고 다시 푹 옆으로 쓰러졌다.

“아… 수갑을 차고 있었지.”

제 위에 포근히 덮여 있던 이불부터 옆으로 젖혔다. 몸을 한쪽으로 굴린 후, 힘을 주어 바로 앉은 무흔은 훤히 드러난 가슴팍을 보며 한숨부터 지었다.

“하아, 이걸 어떡하지, 아니, 수갑을 이렇게 채워 놓으면 옷은 어떻게 갈아입으라는 거야. 이래놓고 왜 아무도 없어?”

무흔은 금사슬로 엮인 두 발을 동시에 움직여 일단 침대에서 일어났다.

주인 없는 방.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아까 의자에 묶여 있는 동안 눈이 닿는 곳은 외우다시피 보았으니, 이제 그 나머지 부분을 탐색해 볼 생각이었다.

절그럭. 절그럭.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묵직한 사슬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울렸다.

무흔이 옆으로 꺾인 벽을 따라 막 몸을 튼 순간, 맞은 편에서 인영이 아른거렸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44)============================================================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