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화
갑옷을 풀어 벗던 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만 절레 가로저었다.
무흔은 초조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내가 방을 나설 때 그가 정신을 잃었었는데….”
“내 어찌 알겠는가? 누워 쉬고 있다니 곧 낫겠지.”
“그대 휘하의 의원이 다쳤는데, 신경이 쓰이지 않아?”
“내 휘하의 참모와 병사들이 고작 이리 비리비리한 포로 하나를 놓쳐 온통 성을 들쑤시고 다닌 것에 신경이 더 쓰이네만.”
비리비리? 무흔은 갑옷을 벗고 있는 윤을 노려보았다.
빈정대는 어투로 쏟아놓는 말도 듣기 싫었고, 무엇보다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것도 화가 나고. 심지어 저 커다란 몸에서 떨어져나온 시커먼 갑주 아래, 대단히 잘난 윤의 몸뚱이조차 거슬리고 불쾌했다.
“내 성의 기강을 이리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것은 대체 무슨 재주야?”
윤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듬뿍 묻어났다.
그가 의자 앞으로 바짝 다가오자 무흔은 긴장했다. 눈을 내리깔고 최대한 턱을 당겼다.
그것이 오히려 역효과였는지, 윤이 무흔의 턱과 뺨을 한 손에 움켜쥐었다.
“윽!”
얼굴이 억지로 들리고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상대의 손아귀로 무흔의 힘이 뽑혀나가기 시작했다.
“저주를 품은 이라 하더니, 정말 그러한가 보군.”
“그대가 매번 이렇듯 내 몸에 멋대로 손을 대니, 저주는 주 국공 홀로 뒤집어쓰는 것이지.”
무흔은 눈동자를 아래로 굴려 제 얼굴을 붙든 커다란 손을 노려보며 비아냥댔다.
가뜩이나 몸이 지치는데, 강제로 지인이라니. 머리가 핑 돌았다.
“나를 믿고 기다려줄 수는 없었는가!”
“믿음을 논하려면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뭔가가 있어야지. 나를 바보로 알아? 입만 살아서는… 지인이고 뭐고, 그쪽은 자기 목숨보다 신념이 중요하잖아?”
“그래서 도망쳤다?”
“실제로, 주 국공께선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잖소!”
윤의 눈동자가 움찔하자 무흔은 코웃음을 쳤다. 사평에게 염록왕 구출 실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하온에게 구체적으로 확인까지 한 터였다.
“나는 그대를 믿어 보려 했어. 콧노래나 부르고 산책이나 하며 대접받는 포로로 머무는 것이 어찌 보면 참으로 편한 삶이지. 헌데 시간은 하루하루 흐르고… 아무리 계산을 해 봐도 주 국공에겐 뾰족한 수가 없겠더이다. 하여 내 길을 찾으려 한 것인데?”
“칭찬이라도 해 줘야 하나?”
“주 국공께서 버림받은 아이같이 화난 표정을 짓고 계시니 하는 소리요.”
윤이 일순간 움찔했다. 정곡을 찔린 그가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미간을 더 험하게 찌푸렸다.
“주 국공, 나는 그 난리를 자초한 탓에 지금 몸이 너무 힘들어. 얼굴은 좀 놓아주면 안 될까?”
무흔은 윤에게 꽉 붙들린 턱을 위로 치켜들고 좌우로 한 번씩 흔들었다.
치유의 힘이 쉴 새 없이 새어 나가는 중이었다. 몸이 불쾌하게 나른해졌다. 의자에 묶인 상태가 아니었더라면 이대로 옆으로 푹 쓰러져 드러누웠을 게 분명했다.
“나를 배신한 것에 대한 미안함은 없는가.”
“서로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지가 중요해. 내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은 당신이오. 내가 원하는 것은 희로국으로 돌아가지 않는 거고.”
“허, 애초에 대등한 입장이 아닌데 대등한 거래를 논한다?”
윤이 내던지듯 무흔의 턱을 거칠게 놓아 버렸다. 그 반동에 무흔의 고개가 옆으로 틀어졌다.
“희로국이든 유곽이든, 가라면 가야 하는 것이 은증왕 당신의 상황이요. 본인의 처지부터 자각하시오.”
무흔은 발끈하여 윤을 쏘아보았다. 자색의 눈동자에 원망이 그득히 어렸다.
“성주인 내가 포로에게 지인을 원한다 하면 내놓아야 할 것이고, 몸을 취하겠다 하여도… 그 또한 마찬가지.”
윤이 몸을 숙여 의자에 묶인 무흔에게로 점점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 무슨….”
또 입맞춤인가 싶어 무흔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흐읏!”
윤의 입술이 제 목덜미에 닿자 무흔은 기겁을 하고 눈을 크게 열었다.
윤의 손이 무흔의 뺨과 턱을 다시 움켜쥐었다. 다른 한 손은 무흔의 옷깃을 찢을 듯이 열어젖혔다.
윤의 입술이 머무른 곳은 무흔의 쇄골 위, 목덜미의 맥이 뛰는 자리였다.
혀와 입술이 질척하게 닿았다. 무흔의 팔뚝에 소름이 오스스 솟구치는 순간, 피를 빨아 삼킬 듯한 짙고 강렬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허억!”
무흔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윤의 입술이 닿은 지점에서 정화의 기운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뽑혀 나가고 있었다. 질척한 혀가 살결을 탐하더니만, 이빨이 목덜미에 박혔다.
“악!”
현기증이 솟고 눈앞이 아찔했다.
“흐… 읏, 그만! 하으….”
어느새 양쪽의 옷깃을 움켜쥔 윤의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부욱, 하고 천이 찢겨나가는 소리가 울렸다. 몸통에 칭칭 감긴 밧줄의 위쪽으로 어깨와 가슴의 허연 속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능력자가 마음먹고 치유자에게 이리하면 정기가 다 뽑혀나가 결국엔 죽게 된다 했어!’
두려움이 솟구쳤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피해 보려 무흔은 의자에 묶인 채 몸을 뒤흔들었으나, 그리할수록 윤의 입술은 더 집요하게 목덜미에 머물렀고 커다란 두 손과 긴 손가락은 드러난 살결을 거침없이 탐했다.
“제발… 으으, 하아… 흐… 하아….”
무흔의 입에서 더는 소리가 아닌, 무력한 숨결만이 튀어나올 정도가 되어서야 윤의 손과 입술이 몸에서 떨어졌다.
“내가 그대를 얼마나….”
현기증이 도는 와중에, 무흔은 제 귓가에 울리는 나지막한 음성의 반밖에 듣지 못했다. 지금은 당장 그 내용을 되물을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하얗게 드러난 어깨를 축 늘어뜨린 무흔의 목엔 선명하게 붉은 자국이 새겨졌다.
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쪽에 줄지어 장식되어 있는 검을 하나 골라 잡았다. 장검도 단검도 아닌, 중간 길이의 검을 들어 무흔의 양 발목에 묶인 줄부터 끊어내었다.
“더 이상, 당신으로부터 지인은 받지 않겠소. 비밀은 끝까지 지켜 드릴 테니 염려 마시고. 허나 손목과 발목에 사슬을 채울 것이며, 처소 밖으로는 한 발짝도 못 나가.”
“뭐? 하아… 외출을… 불허한다고? 하아….”
무흔은 가쁜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도 눈을 부릅뜨려 애쓰며 외출을 챙겼다. 제 유일한 낙을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도망을 치려 한 자에게 산책 따위 어불성설이지.”
“산책은 약조요. 그것을, 하아… 하아… 어길 셈이오?”
윤은 검을 들어 무흔의 몸통을 칭칭 감고 있는 밧줄을 끊어내었다.
“포로 교환 성사 전까지, 은증왕께선 평생 살아오신 것처럼 그저 조용히 머무시다 가시오. 서책은 원하시는 대로 가져다드릴 터이니 편히 읽으시고.”
“이런 법이 어딨어!”
“허면, 감옥으로 다시 보내드리리까?”
매몰차게 쏘아붙이고 돌아선 윤이 문갑을 열었다. 패물함 옆, 묵직한 금괴 두 덩이를 통째로 꺼내 들었다.
그가 무흔에게로 돌아와 그 앞에 자리를 잡고 한쪽 무릎을 접어 앉았다.
윤이 슬쩍 눈만 들어 시선을 맞추는 순간, 무흔은 혼란스러웠다.
서늘한 분노가 그득할 줄 알았건만. 상대가 급히 눈을 다시 깔았으나 그 짙은 눈동자에 드러난 기색은 서글픈 아쉬움에 가까웠다.
“수갑을 만들어 드려야지. 귀한 황자께 아무거나 채워드릴 수 있나.”
사과를 반으로 툭 자르듯, 윤은 금괴의 양쪽을 손에 쥐고 이를 가볍게 반으로 나누었다. 하나를 내려놓고 다른 하나를 양손에 쥐어 길게 늘이자, 노랗게 반짝거리는 금덩이는 사슬로 빚어졌다.
“주 국공, 진정 이리하고 싶은 건 아닐 거야. 내 여기 있는 동안에 지인을 원하는 만큼 제공한다 했잖아?”
“필요 없어. 그러고 보니 그대가 효명성에서도 궤짝에 숨었었지. 한 번 도망쳤던 자에게 두 번은 없을까. 내 그리 생각하고 경계를 강화했어야 했는데. 방심한 나의 잘못도 있어.”
나머지 금 반 덩이로, 잠금장치조차 없는 묵직한 족갑이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윤은 그것을 무흔의 양 발목에 채워 놓았다. 늘어진 금사슬이 그나마 여유 있게 바닥에 끌렸다.
“무거워 보행이 힘드실 것이야. 처소에서 가만히 쉬시기에 적합하겠지.”
윤은 칼을 허공에 띄워서는 무흔의 손목 위로 감긴 밧줄을 단번에 끊어내었다.
허공에 휘젓는 그 손놀림이 너무도 빠르고 매정한 터라, 무흔은 제 손목이 잘릴 듯한 불안함에 눈을 꾹 감아 버렸다.
“손을 이리.”
“싫어.”
무흔은 팔을 앞으로 내밀기는커녕, 의자 뒤로 두 손을 꼭 맞잡았다.
“주 국공, 내가 잘못했어. 그만 화를 풀고… 두 번 다시 탈주니 도망이니 하는 생각은 안 할 테니, 전처럼 즐겁게 지내는 것이 어떨까?”
“어차피 떠날 텐데. 포로로 와 있는 적국의 황자와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 나에게 무슨 득이 되겠는가.”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내리깐 채, 윤이 무흔의 손을 붙들어 끌어당겼다.
그 반동에 무흔의 몸이 앞으로 휘청였으나 윤은 이를 받아주지 아니하고 어깨를 거세게 밀어내어 의자에 바로 앉혔다.
“윽!”
무흔은 얼굴을 찡그렸다.
윤은 내심 움찔했으나 못 본 척, 아랑곳하지 않고 또 하나의 금덩이로 손목에 묵직한 황금 수갑을 채워 놓았다.
매끈하게 빛나는 금사슬이 일렁이는 촛불을 따라 찰랑였다. 그것이 절대로 황홀한 반짝임은 아니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지.”
“못 일어나겠어.”
“뭐라?”
“아까의 그 더러운 지인 때문에 진이 빠져서 거동이 힘들어. 일어나고 싶어도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 성질내지 말라고.”
무흔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아주 천천히, 힘겹게 되받아쳤다.
손목 발목에 쇳덩이보다 무거운 황금으로 수갑을 엮어 두었으니, 가뜩이나 천근만근인 몸이 이를 버겁게 느끼는 것이 사실이었다.
“후우….”
숨을 들이켰다 길게 내쉬고, 무흔은 애써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켜 보려 했으나 허사였다.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는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윽!”
이미 문을 활짝 열어놓고 기다리던 윤은 팔짱을 낀 채로 무흔을 지켜보던 중이었다.
무흔이 쓰러지는 줄 알고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윤은 오히려 화를 내며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갔다.
“아주 가지가지 하는군.”
윤은 답답하다는 듯 일부러 모난 말을 내뱉으며 무흔의 몸을 번쩍 들어 안았다.
“내려줘!”
당황한 무흔은 꽉 잠겨 갈라지는 목소리로 있는 힘을 다 짜내 저항했지만 허사였다. 막상 뜨끈한 체온이 제 온몸을 감싸자 삽시간에 몸이 노곤해졌다. 애써 붙들고 있던 긴장이 툭 끊겨 버렸다.
“나는 이만 쉬어야겠으니 당신을 내보내려는 것뿐이….”
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흔의 팔다리가 축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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