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화
무흔의 목에 닿을 듯 말 듯한 검이 서늘한 빛을 내고 있었다.
“윽!”
무흔은 꼼짝도 하지 못한 채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다가오는 윤을 그제야 바로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무흔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얼어붙었다.
저를 향한 시선이 꼭 처음 같았다. 맨 처음, 효명성에서 그가 저를 발견했을 때의 그 살기가 눈에 그득히 어려 있었다. 몸이 덜덜 떨렸다.
“감히, 탈주를 시도한 것인가?”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칼날이 당장이라도 들어와 박힐 것만 같아, 무흔은 간신히 숨만 쉬고 있었다.
“이 소란을 피우며 도망을 치려던 것이 맞냐 물었다.”
“하아… 보시는 바와 같이, 실패하였잖나.”
무흔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윤이 그러한 무흔을 한참이나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 침묵의 응시가 길어지고 주변의 웅성거림은 어느새 적막으로 잦아들었다.
무흔은 칼 때문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으며, 두려움에 시선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다.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헤아릴 기운조차 없었다.
“은증왕을 포박하라.”
윤의 명이 떨어졌고, 무흔의 목을 옥죄던 검은 바닥에 툭 떨어져 내렸다.
챙그랑.
그 소리에 무흔은 흠칫 놀라 몸을 움츠렸다.
“포로는 내 방에 데려다 놓거라. 사평, 집무실로 와.”
투옥도, 기존 거처에 구류하는 것도 아닌, 성주의 방으로 데려가라는 명이 떨어졌다. 모두의 예상 밖이었다.
윤의 처소로 끌려가는 무흔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는 이환 곁에 딱 붙어 서 있던 천홍 하나뿐이었다.
“형님, 내 뭐라 하였습니까. 분명 합방이라 하였지요?”
“이런 사리분별 안 되는 놈을 보았나. 은밀히 취조를 하시려는 것이겠지.”
“과연 그럴까요?”
“내가 모신 세월만 20년이 넘었느니라. 주군께선 지금 화가 많이 나셨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이환은 주군의 표정부터 살핀 후, 이어 그 곁에 선 사평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번 일은 절대로 주군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큰일이네요. 가뜩이나 주군께서 정찰 내내 이능력을 남발하셨잖아요. 지금은 기가 날뛰고 있을 때가 아닙니까?”
“그러게나 말이다. 치유자는 지금 성에 나령뿐인데.”
“에이, 나령이 백 명을 데려다 놔도 어림없어요. 다 벗겨서 쪽쪽 빨아 드셔도 요마아안큼 정화가 될까 말까일 걸요?”
“아이고, 천홍아. 주군께 그런 말을 쓰면 안 된다.”
“이환 형님! 나는 형님이 더 걱정됩니다. 주군께선 지인의 효율 때문에 금욕을 하지시만, 형님은 왜요? 도라도 닦으십니까? 금욕을 하면 검을 더 잘 쓰게 됩니까? 검기가 더 잘 통하나요? 그래서 북부에서 검술로는 형님을 따라올 자가 없는 겁니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환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온을 찾는 것이었다.
은증왕이 아까 풀썩 주저앉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몸 상태가 엉망일 듯했다. 칼부림이 났으니 어쩌면 상처를 입었을 수도 있고.
헌데 하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난리통에 구경을 나와보지 않는다는 것도 이상했다.
저 앞에 윤을 따르는 사평의 뒷모습을 찾아, 이환은 잽싸게 그리로 달려갔다.
“사평 형님, 은증왕이 다치지 않았을까요? 주군의 처소로 의원을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또 한 번 하온을 찾아가려는 속셈이었는데. 사평의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은증왕은 다친 곳이 없으니 신경 쓸 것 없네. 하온에게나 가 봐.”
사평은 눈짓을 보내며 이환을 버려두고서는 앞서나갔다. 왜 가 보라 하는지 이유를 몰라 갸웃하는 이환에게 병사 셋이 다가왔다.
“장군, 이런 것이 나왔습니다.”
그들이 이환에게 내민 것은 단검이었다.
“어디서 나왔기에?”
“아까 주군께서 허공으로 검을 전부 띄우셨다 다시 바닥으로 내리꽂지 않으셨습니까. 각자의 검을 회수하였는데, 이 단검만 주인이 없었습니다.”
병사는 흰 수건을 손바닥에 펼쳐 놓고 그 위에 검을 얹어 이환에게 내밀었다. 그가 덥석 집으려 하자 다급히 말렸다.
“날에 독이 묻어 있습니다. 이걸 처음 주운 녀석 손에 독이 퍼지는 바람에 급히 의원을 불렀어요.”
이환은 단검의 문양을 살폈다. 북부에서는 본 적 없는 세공법으로 손잡이가 장식되어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검을 천으로 잘 감싸 들고, 하온에게 가고픈 마음을 꾹 눌렀다.
다급한 걸음으로 집무실에 막 들어서려던 이환은 멈칫하여 몸을 숨겼다. 사평이 윤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래서, 하온은 지금 어찌하고 있나?”
“깨어나지 못하여 일단 처소에 눕혀두었습니다. 아마 지금쯤은 눈을 떴겠지요.”
바깥의 인기척을 눈치챈 윤은 사평을 일으켜 세웠다. 그런 후에, 손을 까딱여 이환을 안으로 들였다.
“왜.”
윤의 목소리는 까칠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환은 허리를 푹 숙여 인사를 올리고는 품에서 천에 쌓인 것을 꺼내 그에게 내어 보였다.
“주군, 일이 시급하여 이리 들었습니다. 날에 독이 묻은 단검이 아까 은증왕을 둘러싸고 있던 그 검들 사이에 섞여 있었습니다.”
“독? 이 틈을 타 누군가 은증왕을 시해하려 했단 말인가?”
“그런 듯싶습니다. 주군께서 도검류를 모두 위로 솟구치게 하셨을 때 섞여 들어갔겠지요.”
“검의 주인은?”
“은증왕을 포위했던 병사들 중엔 이 단검의 소유자가 없다 합니다. 손잡이의 문양 자체가 이 일대에서는 볼 수 없는 물건입니다.”
“두 번째 암살 시도라… 인질 교환이 성사되지 않기를 바라는 자. 염록왕 전하의 귀환이 두려운 자.”
윤이 중얼거리자 사평이 발빠르게 나섰다.
“몰래 숨어든 외부인, 혹은 사주를 받은 내부인이 있을 것입니다. 당장 성을 봉쇄하고 그자를 찾겠습니다.”
가뜩이나 무겁던 윤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통에 엄지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몸의 피로는 둘째치고, 뒤틀리는 기혈로 인한 불쾌함이 그득하게 솟구쳤다.
윤은 탁자를 짚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일은 둘이 책임지고 살수를 반드시 찾아내. 내 앞에 끌고 와.”
집무실을 나서는 윤의 발걸음이 한없이 무거웠다.
제 심중에 점점 또렷하게 떠오르는 감정의 정체는 배신감이었다.
‘은증왕 그자가 애초에 나와 무슨 관계라고 이런 마음이 드나. 신뢰? 허, 약조는커녕 마음을 나눈 사이도 아니잖아!’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무흔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지 참으로 다양한 상상을 해 보았었지만, 그중 도망의 경우는 없었다.
이런 사태를 기대하고 선발대까지 꾸려 급히 돌아온 것이 아닌데.
평소와는 달리 출몰한 마물들을 직접 나서 빠르게 처리하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얼굴은 무흔이었다. 돌아가 지인을 받을 것을 떠올리면 기혈이 뒤틀리는 것 따위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매번 이능력을 쓸 때면 그 하얀 얼굴이 생각났었건만. 자려고 누울 때조차 무흔의 얼굴이 떠올랐었다.
“하아… 당신에겐 내가 필요 없지.”
탄식이 밤하늘에 흩어졌다. 알고는 있었으나, 그것을 이리 절감하는 사건이 벌어질 줄이야.
윤은 자신의 처소에 들어섰다.
그 앞을 지키고 선 병사들이 각을 잡고 서서 그를 맞이했다.
“은증왕은 상태가 어떠하냐.”
“저항이 심하여 하는 수 없이 의자에 묶어 두었습니다.”
“잘하였다. 마당에서 대기하라.”
“예, 주군.”
드르륵. 턱.
미닫이문이 얌전히 열리는 소리는 확실히 아니었다.
무흔은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려 했으나 허사였다.
양손이 의자의 등받이 뒤로 포박되었으며, 의자 다리에는 발목이 묶였고, 심지어 몸통까지도 의자에 밧줄로 칭칭 감긴 상태였다.
‘정찰은 최소 한 달이라더니, 저 인간 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지? 어떻게 해야 주 국공의 분노에서 빠져나갈 수 있나….’
무흔은 잡혔던 순간부터 내내 고민하던 것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곱씹었다.
납작 엎드려 잘못했다 싹싹 빌까, 불쌍한 척을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웃는 낯에 침 못 뱉을 테니 헤헤 애교라도 떨어볼까.
윤이 눈앞에 와 앉았다. 침대에 털썩 걸터앉아서는 저를 빤히 바라보는 게 느껴지는데, 무흔은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런 사태를 기대하고 돌아왔던 게 아닌데.”
윤의 목소리에는 확실히 노기가 서려 있었다.
무흔은 입에서 뱅뱅 도는 미안하단 말을 결국 뱉지 못했다. 뻔뻔하게 미안하단 소리가 나오느냐는 타박이나 받겠지.
“허, 대체 무슨 생각이야. 이번에도 저번처럼 성공할 수 있을 거라 믿고 말도 안 되는 일을 지른 건가?”
“저번하곤 달랐어!”
무흔은 발끈하여 내뱉자마자 후회했다. 뭐가 달랐느냐 윤이 되물으면 할 이야기가 없었다. 의원 하온, 그 소중한 조력자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 생각이었으니까.
“뭐… 그저… 무지하고 치기 어린, 세상을 조금도 모르는 이 황자가 막연히 새장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 생각하시면 되겠소.”
무흔은 냉큼 말을 덧붙이고는 고개를 옆으로 홱 틀었다. 막상 윤을 눈앞에 두고 보니 미안함이 새삼 밀려들었다.
어색한 침묵이 한참이나 고였건만, 윤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질 않았다.
무흔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헉!’
저를 빤히 노려보고 있는 두 눈에 놀라 그만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제야 윤이 입을 열었다.
“은증왕께선 무엇이 그리 불만이셨는가.”
불만이 듬뿍 묻어나는 음성은 오히려 윤 쪽이었다.
“그저 내가 시도할 수 있는 것을 하였을 뿐이오.”
“고작 도주?”
“공행공반(空行空返), 행하는 것이 없으면 돌아오는 것도 없는 법이라. 성공의 가능성이 있다면 당연히 뛰어들어야지.”
윤의 눈매가 더 매섭게 가늘어졌다. 기가 차다는 듯이 헛웃음이 일었다. 이어 시비조의 질문이 튀어나왔다.
“대체 감시병들은 어찌 아프게 만들었는데?”
무흔은 이곳에 묶여 있던 동안 속으로 준비했던 거짓말을 둘러대었다. 하온을 덮어줘야만 했다.
“산책을 하다 독초를 발견했지. 그것을 차에 우려 주었어.”
“독초를 다 분간할 줄 아나?”
“며칠 전 하온과 산책을 하는데 그가 ‘저것은 독초이니 드시면 안 됩니다.’라 하기에, 뭐… 어제 몰래 뜯었소.”
“하온과 가까워졌다 들었는데, 그를 이용하기 위함이었나?”
“그에겐 미안하게 되었지만… 이용한 건 사실이야.”
무흔이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온의 머리였다. 뒤통수를 너무 세게 가격한 것은 아닌지, 아무래도 걱정이 되었다.
‘안면을 주먹으로 쳤을 때, 그가 소리도 내지 않고 아픈 걸 꾹 참았지. 뒤통수를 맞고는 진짜 기절할 줄이야. 이상이 있는 건 아닐까?’
무흔은 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의원은 좀 어떻소? 깨어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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