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화
무흔은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좌절감에 이어, 이상하게도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솟았다.
잡힌다 하더라도 목이 달아나거나 신체에 위협이 가해질 리는 없다는 확실한 믿음. 그리 확신이 들자, 이리 죽어라 달리는 것이 조금은 재밌어졌다.
냉궁의 마당에서 춤을 추다 땀을 낸 적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런 건 처음이었다.
끝도 없이 내달리며 이마에 땀이 맺히고 바람을 맞아가며 앞으로만 나아간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무흔은 난생 처음으로 그 쾌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은증왕! 항복하십시오!”
소식을 듣고 서쪽 성문 앞에 와 있던 사평의 목소리가 밤하늘에 날카롭게 울렸다.
이제 더는 나아갈 곳이 없었다.
무장한 병사들이 가로막자, 무흔은 펄럭이는 두봉 아래에 숨겼던 검을 뽑아 들었다.
“포위하라! 은증왕께서 다치시는 일이 있어선 절대로 아니된다!”
사평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병사들이 무흔과 검을 맞대지 않고 숫자를 늘려 조심스레 주위를 에워쌌다.
무흔은 더 이상 빠져나갈 곳이 없음을 알았지만, 그렇다 하여 이대로 포기하고 주저앉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검무와는 달리, 상대와 검을 맞대어 대련하는 것 또한 난생 처음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커다란 보름달이 뜬 하늘 아래, 서쪽 성문 앞에는 셀 수도 없는 횃불이 모여들었다. 마치 석양이 지는 때를 방불케 했다.
새하얀 머리카락에 보랏빛 눈을 한 자가 유려한 몸동작으로 검을 다루기 시작했다. 그것이 마치 검무를 추는 듯하여, 일순간 모두가 홀린 듯이 무흔을 바라보았다.
“은증왕, 제발 검을 내려놓으십시오.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사평의 설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흔은 제 앞을 가로막고 선 자들에게 검을 마구 휘둘렀다.
상대가 섣불리 맞대응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며 방어만 하는 것은 무흔의 검술이 빼어나서가 아니었다. 다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황홀할 정도로 신비롭고 아름다운 탓이었다.
그때였다.
둥둥둥둥.
무흔의 머리 위쪽, 성벽에서 북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흑성부대의 귀환입니다! 성주님께서 오십니다!”
서문 망루를 지키는 병사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주 국공이? 벌써?”
무흔은 당황했다. 뭐라 변명을 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탈주가 성공하여 무사히 빠져나갔더라면 변명할 일이 애초에 없었을 터였다. 반대로 실패한다면 처소든 옥에든 갇힌 채로 만나게 될 것이니 그저 미안하다 싹싹 빌 생각이었는데.
하필 난동을 부리는 와중에 나타날 건 뭐람.
어깨에서부터 손끝까지, 힘이 쭉 빠져나갔다.
“과하게 진압할 필요 없다. 은증왕께서 지치면, 그때 탈 없이 생포할 것이니 방어만으로 대응하라.”
사평의 명이 떨어졌다.
그것이 너무도 제 상태의 정곡을 찌른지라, 무흔은 숨을 몰아쉬며 그를 노려보았다.
“은증왕께서 검을 놓으시면 끝날 일입니다. 우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들어가 쉬시지요. 성주님께는 제가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사평이 간곡한 어조로 무흔을 설득했다.
그제야 무흔은 제 온몸이 땀으로 뒤덮인 것을 깨달았다. 이마와 뺨에는 머리카락이 들러붙어 있었다. 이를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죽어라 검을 휘둘러 댄 것이었다.
끼이이익.
등 뒤로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리는 소리가 울렸다.
무흔은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오기라 해도 하는 수 없었다. 초라하게 붙들린 꼴을 윤에게 보이긴 싫었다.
검을 고쳐잡고, 눈빛에 더 날을 세우고, 그리고 땅을 딛고 선 두 발에 힘을 주었다.
“으아아아!”
기합을 내지르며, 무흔은 제일 가까이 서 있는 병사를 향해 검을 쥔 팔을 뻗었다.
챙, 날카로운 금속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성문을 향하여 쏠려있던 모두의 눈이 다시 무흔에게로 향했다.
그 시선들 중, 인파에 숨은 살수의 눈에 형형한 기가 솟았다.
성문이 서서히 열리는 것을 힐끗 살핀 살수는 품에서 독을 묻힌 단도를 꺼냈다. 효명성주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일을 처리해야만 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남았는지 무흔은 검을 들고 아까보다 더 이리저리 날뛰고 있었다. 따라서 그를 막아내기 위한 병사들의 움직임도 같이 늘었다.
살수 입장에서는 목표물을 정확하게 겨냥하는 데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숨을 멈추고 완벽한 단 한 번의 기회를 노렸다. 무흔이 검을 치켜든 채로 몸을 돌려 뒤쪽을 막던 그 순간, 틈이 생긴 무흔의 상반신을 향해 살수가 칼을 날렸다.
휘익.
단검은 살수의 손끝에서 매서운 속도로 떠났다. 그와 동시에, 휙휙거리는 소리가 허공을 가르며 거칠게 울렸다.
“헉! 검이 모두 공중으로 솟았어!”
“성주님의 힘이다!”
“주군께서 돌아오셨다!”
몰려든 이들이 너도나도 웅성대었다. 무흔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은 방금까지 쥐고 있던 검이 사라진 빈손에 당황하다, 이내 자신들의 주군을 발견하고서는 안도했다.
*
윤의 일행이 효명성에 도착한 것은 보름달이 남쪽 하늘 가장 높은 지점에 이르렀을 즈음이었다.
태고산맥 정기 순찰은 최소 한 달 가량 걸리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성주가 끊임없이 진행을 채근하는 통에 결국 선발대를 꾸려 최소 인원이 먼저 하산하게 된 것이었다.
산을 내려와 말을 매어놓은 초소에 이르렀다.
“주군, 어찌 그리 조급해하십니까?”
직설적으로 꽂히는 천홍의 질문에 그 뒤를 따르던 이들이 흠칫 놀랐다.
“내가? 그리 보이더냐?”
윤은 내심 뜨끔했으나 우선 잡아떼었다. 이환이 쫓아와 천홍의 옆구리를 찔렀으나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재차 캐물었다.
“대장님께 전부 맡기고 급히 돌아가시다니요. 결계는 하나하나 직접 확인하셔야 직성이 풀리시지 않으셨습니까?”
“흠, 이제 대장이 전담할 때도 되었지. 다음 정찰부터 나는 동행하지 않을 생각이다.”
“아! 그리 깊은 뜻이 있는 줄도 모르고… 전 또, 은증왕을 뵈러 가시기 위함인 줄로만 알았….”
놀란 이환이 냉큼 천홍의 팔을 붙들어 뒤로 끌어당겼다. 말들 사이사이를 피해 끌고 나가 윤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속삭였다.
“이놈이, 미쳤느냐? 보는 눈이 몇이고 듣는 귀가 몇이야. 그런 뻔한 것을 입에 올리면, 주군께서 냉큼 그렇다 하시겠다?”
“아니, 다들 아는 것 아닙니까? 성에 도착하자마자 합방을 하실 거란 게 저희들의 예상입니다만.”
“허, 어찌 감히 작당을 지어 주군을 두고 뒷말들을 하는가.”
“형님께서도 분명 그리 말씀하셨잖습니까. 주군께서 멍하게 계실 때는 보통 은증왕 생각을 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낮추거라!”
이환은 으름장을 놓고는 슬쩍 주군 옆으로 되돌아왔다. 눈치를 살폈으나, 윤의 표정에는 뻔뻔할 정도로 아무런 변화가 드러나지 않았다.
출발하여 달리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던 윤이 잠시 말을 쉬게 해 주려 속도를 줄이자마자 이환이 곁으로 다가왔다.
“주군, 어제 말씀하신 것 말입니다. 염록왕 전하의 귀환에 대한….”
“그래, 네 생각엔 어떠하냐. 가능할까?”
“당장은 힘들 것입니다. 벽제성 함락 이후 희로국의 병력이 전보다 더 수도 쪽에 집결되어 있다 하지 않습니까. 하경의 첩보가 도착할 때가 되었으니 조금 더 기다려 보시지요.”
“진작 희로국 수도과 국경에 거점을 더 마련했어야 했어. 내가 안일하였다.”
“너무 급히 간자들을 심다가는 꼬리가 밟힌다 하셨잖습니까.”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진다면 좋을 텐데.”
윤이 고민하는 그 신념의 문제를 이환은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지만 짝사랑 전문가의 입장에서 볼 때, 이건 그저 눈 딱 감고 한 번 저지르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과감하게 흑성부대를 투입하시지요. 주군께서 직접 가시면 더 소수의 인원으로 빠르게, 가능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정인을 곁에 둘 수 있다면야 얼마든지… 어?”
효명성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달의 위치를 보니 자정에 가까운 듯한데, 서쪽 성벽 위로 불빛이 유독 많이 어른거렸다.
“주군, 평소보다 과하게 밝은 것이 맞지요?”
“서쪽이 유독 그러하구나.”
“무슨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귀환을 미리 알리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맞이하려 이 오밤중에 불을 밝히고 깨어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윤의 마음에 불안과 초조가 일었다. 그가 팔에 얹은 매를 높이 날리자, 매는 서문 위의 초소로 향했다. 이어 이환이 약속된 신호탄을 쏘았다.
이하 전원, 그들의 주군을 따라 전속력으로 말을 달렸다.
서문 망루에서 주군의 귀환을 기다리던 병사는 크게 외치고 북을 울렸다.
“흑성부대의 귀환입니다! 성주님께서 오십니다!”
거대한 성문이 열렸다. 윤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이는 무흔이었다. 이 시각, 이 장소에 절대 있을 리 없는 자.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보라색 눈동자가 있었다.
그가 울 것 같다. 윤은 그러한 생각부터 대번에 들었다.
무흔을 둘러싼 병사들, 그 너머로 시야를 가득 메우는 인파가 눈에 들어왔다.
포로의 탈출, 그 정황을 윤은 단번에 눈치채었다.
윤은 손목을 가볍게 위로 휘저었다.
그와 동시에 허공을 가르는, 휙휙거리는 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무흔을 중심으로 하여 일정 반경 내에 있던 검들이 모조리 치솟아 허공에 머물렀다. 무흔은 제 손을 떠난 검을 올려다보고, 윤을 바라보고,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서쪽 성문 앞에 빽빽하게 들어찬 병사들은 모두 윤을 향하여 인사를 올렸다.
“주군, 오셨습니까!”
“지금 이게 무슨 난리인가.”
윤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깔렸다. 이어 허공을 향해 거칠게 손짓을 했다.
슈욱, 푹.
허공에 떠 있던 검들이 무서운 속도로 땅에 내리꽂혔다.
“악!”
무흔은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무흔이 선 자리를 중심으로 검의 원이 둘러쳐졌다. 동시에 칼날이 갈라낸 공기와 흙이 사방으로 솟구쳤다.
무흔의 주변에 있던 병사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윤이 무흔에게로 다가왔다.
무흔은 숨만 가쁘게 내쉴 뿐, 저를 둘러싼 검들만을 멍하게 바라보던 중이었다. 땅에 처박힐 때의 충격으로 인해, 긴 쇳덩이들은 여전히 징징 울림을 내며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휘익.
바닥에 박힌 검 중 하나가 뽑혀 튀어 올라서는 무흔의 목에 날의 끝을 들이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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