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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38화 (38/85)

#038화

*

이른 아침, 하온이 무흔을 찾았다.

“오, 왔는가! 이걸 좀 봐 줘.”

무흔은 하온을 반가이 맞으며 몇 점의 그림을 그에게 내보였다. 무흔의 처소에서부터 동서남북으로 이어지는 효명성의 지도였다.

“어때? 자네가 보기에 정확해? 틀린 곳은 없나?”

“상당히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대단합니다.”

“하루하루 참으로 즐거워. 오늘은 어딜 갈까?”

“저는 오늘 의원들과 마을에 다녀옵니다. 하여 오늘 산책은 동행하지 못하게 되어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아… 그러한가.”

무흔의 얼굴과 목소리에 아쉬움이 듬뿍 묻어났다.

“의원들이 마을에는 무슨 연유로?”

“얼마 전 마물들이 잔뜩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보통 그런 경우, 근방에 새로운 치유자의 기운이 돌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하여 간밤에 사평 장사께서 다녀오라 명을 내린 것이지요.”

“혹… 나… 때문인가?”

“그럴 겁니다. 그 덕에 저는 모르는 척 집집마다 다니면서 진맥을 하게 생겼습니다.”

“미안.”

“미안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하온이 웃으며 답했다. 그러더니만 퍼뜩, 생각이 난 것처럼 말을 이었다.

“아! 어제 장사께 여쭈어보았습니다. 은증왕께서 망루에 올라가도 되느냐고.”

“무어라 하던가?”

“성주께서 불허하신 것을 어찌 자신이 허하겠느냐며, 안 된다 하였습니다.”

기대에 차 반짝거리던 무흔은 삽시간에 풀이 죽었다.

“그래… 그렇겠지….”

“이것은 제 짐작이긴 한데, 사평 장사는 은증왕께서 도망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진 것 같습니다.”

“아니, 왜?”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있으신 것 같다며, 그리 해석하시더군요. 얽매는 것이 없어야만 진정한 자유니까요.”

얽매는 것. 무흔은 그 말 한 마디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성 안에서 만끽할 수 있는 자유로 정말 충분한지, 생각해보십시오.”

무흔의 낯빛 또한 어두워지자 하온이 다가와 그의 손을 꼭 쥐었다.

“그리 속상하신 얼굴을 뵈려 드린 말씀이 아닌데… 죄송합니다.”

하온의 손에서는 따뜻한 온기가 묻어났다. 무흔은 그에게 애써 웃어 보였다.

“출발 때가 되어 그만 가 봐야겠습니다. 은증왕께서 저와 마을에, 또 번화가에 같이 가신다면 무척 재밌는 구경을 많이 하실 텐데요. 아쉽습니다. 오늘은 편히 쉬십시오.”

하온이 굳이 장갑을 챙겨주며 인사를 건네고 문을 나섰다.

그가 남기고 간 말이 무흔의 마음을 마구 휘저어댔다. 홀로 남아 멍하니 선 채로 자유를 생각했다.

무흔은 윤이 써 준 문서를 펼쳐 그 위에 까맣게 적힌 글자들을 하나하나 손끝으로 훑어 내려갔다.

“운 좋게 포로 교환이 성사되지 않는다 하여도… 여전히 나는 매여 있겠지. 그래, 유폐의 물리적인 범위가 조금 더 넓어지는 것뿐이야.”

속이 쓰리고 입이 썼다. 윤이 주었던 하나 남은 사탕은 품에 고이 간직한 채, 설하가 새로 가져다준 사탕을 하나 입에 물었다.

“자유라….”

무흔의 손에는 사탕과 함께 딸려 나온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산(山)이라 툭 하나 적힌 그 글자를 바라보며 산뜻한 웃음을 터뜨렸다.

“자유는 나중에 생각하고, 그 전에 주 국공 따라서 산에는 한 번 올라가 봐야지.”

무흔은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 하온과 함께 상쾌한 향이 그득한 풀밭에 누웠을 때는 하늘이 눈을 가득 채웠었다.

“그때… 매가 날았지….”

응방이 궁금해졌다. 그 뒷길로 나 있다는 북서문 또한 마찬가지, 가지 말라니 더 가고 싶어졌다.

무흔은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았다.

“처소 문밖만 나서도 이렇게 다른데… 성 바깥은 어떨까.”

온종일 무흔은 감시병들을 끌고 성내를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멀리 솟은 성벽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하온이 지피고 간 작은 불씨가 점점 커져만 갔다.

*

하온이 마을에 내려가 종일 소득 없는 진맥을 하고 온 날 밤, 무흔은 자다가 다리에 쥐가 나고 발도 퉁퉁 부었다. 제지하는 이 없이 지나치게 많이 걸어 다닌 탓이었다.

다음 날 아침, 하온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무흔을 찾아왔다.

“아니 어찌 저보다 더 발이 엉망이십니까?”

“그러게나 말이야.”

“어제는 족욕을 안 하신 겁니까?”

“자네도 없고… 뭐… 너무 피곤하여 쓰러져 잠이 들었지.”

“당장 안마사를 불러올 터이니 좀 누워 계십시오.”

하온이 데리고 온 사내는 산적으로 오인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우락부락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은증왕이 아프다는 소식에 사평까지 들이닥쳤다.

무흔을 침대에 앉힌 안마사는 바닥에 주저앉아 허옇고 긴 다리와 붉게 부은 발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흐읏… 하아… 으응… 너무 좋구나.”

난생 처음 받아보는 안마의 쾌감에 무흔이 축 늘어져 버렸다.

사평은 이번에도 역시 웃음을 참았고, 하온은 무려 색기가 어린 무흔의 신음에 기겁을 했다. 성주가 이 소리를 들었다간 저번처럼 당장 전부 나가라 하고 은증왕의 옷을 벗겨 버릴 것만 같았다.

“성주께 안마를 배우시라 권해드려야 할 것 같은데?”

사평의 농담에 처음으로 무흔은 뺨을 붉혔다. 그것을 본 하온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정찰을 나간 흑성부대가 돌아오려면 아직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으나 일을 처리하는 것은 빠를수록 좋았다. 무흔이 성을 빠져나가는 데 성공한다면, 성주가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돌아와서일 테니.

사평과 안마사가 무흔의 처소를 떠난 후, 하온은 따뜻한 물을 준비해 와 무흔의 발 앞에 앉았다.

“지금 족욕을 하시고, 이따 밤에 또 족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발이 이래서야… 오늘은 밖으로 다니지 마시고 푹 쉬십시오. 그래야 내일 더 편히 걸으십니다.”

무흔은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률을 좋아하신다 들었습니다. 무료하시다면 악기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악공과 무희를 불러들일 수도 있었으나 하온은 그 선택지를 아예 제시하지 않았다. 발 상태가 도저히 도주에 걸맞지 않은지라 안마사를 부르기는 했으나, 무흔이 이곳에서 만족스러워하는 요소가 더 이상 늘어나선 곤란했다.

하온은 무흔이 발을 담그고 있는 통에 향유를 몇 방울 떨어뜨렸다. 이어 바깥에 감시병이 있을 방향을 일부러 힐끗 쳐다보고는 비밀 이야기라도 나누듯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었다.

“포로 교환 말입니다. 성사되지 않는다면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본래 무흔이 염두에 뒀던 것은 기회를 봐서 도주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혹 몰래 도주를 생각하십니까?”

하온의 질문에 무흔은 당황하여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기껏 입을 열었는데 말이 엉켰다.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허면 지도는 왜 그리 열심히 그리시는 것입니까?”

“그저 다녀온 길이 기억나 그린 것뿐인데 뭘.”

절대 길을 외우고자 함은 아니고. 그리 덧붙였다가는 오히려 더 큰 오해를 살 것 같아, 무흔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내가 희로국에 끌려가지 않을 방도를 생각해봤어. 포로 교환 전에 염록왕이 귀환할 가능성이 있겠는가? 수차례 실패했다 들었는데.”

“3년 전 거의 탈출 직전에까지 성공하였었지요. 염록왕께서는 제 형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그를 살리시고 첩자 위장을 숨겨주시기 위해 스스로 다시 잡혀들어가셨습니다.”

“어찌 그런….”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저 또한 그분을 모셔올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것이나, 하아… 방도가 없습니다.”

무흔의 표정이 무겁게, 또 음울하게 변했다. 희망이 사라진 자리가 더 단단히 굳어 버렸다.

‘염록왕이 포로 교환 전에 돌아올 가능성은 아예 없다 치자. 그럼 주 국공을 믿는 수밖에 없나? 그가 사평의 묘책을 다 거절했는데?’

막막했다. 정말로 울고 싶은 기분이 되어 버려 고개를 푹 수그리는데, 손이 따뜻했다. 무흔은 얼른 고개를 들었다.

“제가 힘이 되어드리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도주를 고려하신다면 성주께서 안 계시는 지금이 기회입니다.”

무흔의 심장이 빠르게 박동했다. 성의 지리에 빠삭하고 사평의 신뢰를 받는 이 의원의 도움이라면, 어쩌면 효명성을 빠져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산책 따위가 아닌, 진짜 자유였다.

새로운 희망과 동시에 두려움이 덜컥 솟았다. 저를 여기까지 데려온 윤을 과연 등질 수 있을지, 무흔은 고민에 휩싸였다.

*

건원국의 수도 중경, 그곳에서 가장 웅대한 모습을 자랑하는 건축물은 단연 황궁이었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해월산이 뒤로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으며, 이능력자들을 동원하여 올린 성벽의 높이는 차마 아무나 범접 못 할 위압감을 내뿜고 있었다.

그 거대한 문의 중앙으로 유독 화려한 가마가 들었다.

북부에서 막 돌아온 예부상서 주한모가 사치스러운 마차에서 내리자 내관 하나가 재빨리 그에게로 다가가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궁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속삭였다.

“현비와 정귀비의 궁녀 간에 다툼이 일었는데, 아무래도 조귀비 쪽에서 장난질을 치는 것 같습니다. 금위군의 수장은 형부의 말단 관리 하나와 정을 통하였고, 황제께서는 아직 모르십니다.”

“수고하였네. 역시 자네뿐이야.”

황홀한 표정으로 칭찬을 듣는 내관에게 주한모는 은자를 하나 쥐여 주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세 번째 문을 지나 아름다운 정원을 가로지르는데, 이번에는 황후의 궁녀 하나가 스치듯이 다가와 속삭였다.

“4황자께서 대전 내관의 양자와 종종 침소에 드십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들키지 않게 은자를 넘겨받은 궁녀는 순식간에 자리를 떴다.

한모가 태자궁에 발을 들이자 미리 연통을 받은 이들이 모두 머리를 숙였다. 지독하게도 잘난 그의 얼굴을 훔쳐보는 궁녀들의 뺨이 하나같이 붉게 물들었다.

“태자께서는 어디 계신가?”

“목욕 중이십니다.”

“내 이리로 온다 미리 소식을 넣었거늘?”

조용하기는 하나 날이 선 목소리에 모두가 움찔했다. 궁녀 하나가 욕실에서 황급히 나와 태자의 명을 전했다.

“전하께서 안으로 들라 하십니다.”

일부러 태자가 물에 몸을 담그고 저를 기다린 것이 분명했다. 한모는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목욕은 다 마치셨느냐.”

“거의 끝나갑니다.”

“모두 나가 있으라 하라.”

“예, 상서 어른.”

수증기가 자욱한 욕실 중앙에는 거대한 나무 욕조가 놓여 있었다. 한모는 다가가 욕조의 턱에 걸터앉았다.

태자의 머리카락을 막 다 감긴 궁녀들은 허리를 깊이 숙이고서는 뒷걸음질로 자리를 떴다.

“왔는가.”

“예, 태자 전하.”

“은증왕은 그 건에 대해 아는 눈치던가?”

“아는 듯도 하고, 모르는 듯도 하고. 중요하지 않습니다.”

“뭐라?”

태자가 의아한 급히 몸을 돌려 벌떡 일어나자, 한모는 색기 넘치는 웃음을 머금고 태자에게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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