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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37화 (37/85)

#037화

눈이 마주치는 순간, 무흔은 저를 꿰뚫어 보는 듯한 사평의 시선을 이겨낼 수 있을지 염려가 덜컥 들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맨 처음 성주께서 은증왕과 만나셨을 때는 분위기가 상당히 험악하였다 들었습니다. 헌데 어찌 그리 가까워지셨는지 궁금해지더군요.”

“아하하, 뭘 그런 것을 다 알고자 하시오. 부끄럽게.”

전혀 부끄럽지 않은 표정에 연극 같은 손사래 두 번이 더해졌다.

“더군다나 은증왕께서는 희로국 사람이 아니십니까. 사내를 친밀하게 대하는 것이 기껍지 아니하셨을 터인데 말입니다.”

“주 국공은 그런 걸 뛰어넘는 매력이 있으니… 하하, 이제 그만 물으시오. 이런 이야기는 영 부끄럽기도 하고… 내 마음이 마구 흐르는 이유를 어찌 설명하겠는가.”

무흔은 뻔뻔하게 답을 지어 건네고는 환히 웃었다. 냉큼 찻잔을 비우고, 이어 양팔을 가슴 앞으로 교차하여 팔뚝을 위아래로 쓸어 만졌다.

“가을이라 그러한가, 대낮에도 바람이 찬 것 같네.”

“따뜻한 차를 한 잔 더 하시지요. 몸을 녹여줄 것입니다.”

“아니, 아무래도 으슬으슬한 것이… 그만 들어가 보아야겠소.”

태고행기를 돌려받기는커녕 가져간 이유를 제대로 캐묻지도 못했지만, 그보다는 당장 사평을 피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 섰다. 거짓말은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괜히 주 국공도 없는데 불편할 상황이라도 생기면 내 손해지. 사평은 무려 성주의 직인을 대리하여 찍을 수 있는 자인데, 자칫 잘못했다간 처소에 구금될 거야.’

지금 무흔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산책이었다. 밥을 먹다가도 자려고 누웠다가도 바깥을 여기저기 돌아다닐 생각만 하면 마음이 붕 뜨고 얼굴에 웃음이 절로 번질 정도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려 다리에 힘을 주던 무흔은 아직 살짝 남은 둔부의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사평은 눈치 빠르게 다가와 무흔의 몸을 부축해주었다.

“아직 이리 다니시기에 회복이 덜 되신 것은 아닌지요?”

사평이 걱정스레 묻자, 무흔은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혹 나다니지 말고 쉬라 명을 내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얼른 양손을 내저었다.

“아니, 절대 아니오. 앉았다 일어나는 게 아직 좀 그러할 뿐, 이리 목발도 있으니 걷는 것에는 아아아무런 문제가 없지. 아하하….”

“그것은 다행입니다. 허나 무리하시면 아니됩니다.”

“물론이오. 그럼 이만, 다음에 또 봅시다.”

무흔은 목발로 땅을 짚어나가는 폭을 최대한 넓게 하여 풀쩍풀쩍, 땅을 박차고 나가듯이 빠르게 도망쳤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사평이 귀엽다며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은 알지 못했다.

처소에 도착하고 나서야 사평에게 물어보려 했던 것이 뒤늦게 생각났다.

“아! 출입 불가 지역! 응방과 배추밭이 왜 더해졌는지 물어봤어야 했는데….”

그 답은 시침을 위해 무흔을 찾아온 하온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성주께서 적어주신 목록에 사평 장사께서 응방과 배추밭을 추가로 기재하셨다는 말이지요?”

“이상하지 않아? 응방은 그렇다 치고, 배추밭이라니.”

“응방은 북서문, 배추밭은 동남문입니다.”

“응?”

“북서문이라 부르기엔 너무 거창하긴 하나… 응방 바로 뒷길에는 사용인들이 성을 드나들 때 이용하는 작은 쪽문이 하나 있습니다. 배추밭 너머에도 마찬가지이고요.”

“아….”

“이걸 적어두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내가 탈출이라도 할 거라 여기는 걸까?”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니, 장사께서 그리 생각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또한… 은증왕께선 이미 탈주의 전적이 있다 들었습니다.”

궤짝에 숨었다가 되려 죄인이 타는 수레에 올라 이동하게 되었던 그 사건. 무흔은 어찌 알았냐 물으려다가 그저 허허 웃어 버렸다. 긴 시간 알고 지낸 것은 아니나, 흑성부대에는 입이 한없이 가벼운 존재가 있었으니.

“사평 또한 그 사건을 알고 있겠군. 그래서 나에게서 태고행기를 빼앗아 간 거였어…. 그것을 자료 삼아 도망칠까 봐.”

“도망을 치시고자 한다면, 굳이 태고행기가 필요하겠습니까? 지도만 있으면 충분하지요.”

“아닐세! 무슨 소릴 하는 것인가! 도망이라니!”

어디까지나 희로국으로 끌려갈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지 진짜 도망을 치려던 것은 아니었다. 무흔은 퍼뜩 놀라 고개를 좌우로 도리질 쳤다.

그 모습에 하온은 웃음을 터뜨리며 침통을 꺼냈다.

“옷을 내리고 엎드리십시오.”

무흔의 뽀얀 엉덩이와 허리에 침을 놓고 기다리며, 하온은 침대 머리맡에 가만히 앉아 하얗게 빛나는 무흔의 탐스럽고 신비한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이어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도망이라? 하온은 새로운 선택지를 발견했다.

성주는 은증왕이 치유자이기 때문에 곁에 둔다 했지만, 그것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었다. 신체 접촉이 과연 지인만을 위해서일까? 성주의 최측근인 이환을 비롯하여 병사들이 내기까지 할 정도라면 그 이상의 무언가에 대한 가능성이 있었다.

잘만 된다면 은증왕이 떠날 것이고, 도주에 실패한다 해도 은증왕은 성주의 미움을 살 터였다.

“낮에 사평 장사와는 재밌는 이야기는 많이 나누셨습니까?”

“내게 주 국공에 대해 묻더군. 어쩌다 둘 사이가 그렇게 되었냐고.”

“무어라 대답하셨나요.”

“뭘, 그냥 마음 가는 대로라 둘러댔지.”

“마음 가는 대로… 헌데 말입니다. 지인을 이유로 신체의 접촉을 빈번히 하다 보면 정말로 마음이 가기도 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딱히. 나는 근본적으로 사내에 마음이 동하는 부류가 아니라서.”

무흔의 대답이 칼같이 나왔으나 하온은 마음을 놓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하여 나중에라도 그리되지 않으리란 법은 없으니.

“허면 여인을 보고 동한 적은 있으십니까?”

“하하, 효명성에 와서 지금껏 본 여인들이 내 평생의 전부나 다름없는데?”

“희로국에서는 그럼….”

“부황은 혹여나 내가 후사를 보면 백자가 태어나 저주가 더해질까 두려웠던 모양이야. 모후를 알현할 때 만났던 궁인들 몇을 제외하고, 내가 만나는 모든 이들은 전부 사내였네.”

무흔이 엎드려 있었으니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 목소리에서 뚝뚝 묻어나는 분위기가 하온은 어쩐지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런 이를 상대로 썩 곱지 못한 마음을 품은 자신이 솔직히 혐오스러웠다.

“건원국에서는 사내도 사내에게 연정을 품습니다.”

“알고 있어.”

“저희 성주께서도 혹 은증왕께 그런 마음을 품으시지 않으셨을까요?”

무흔은 피식 웃었다. 저만 보면 지인에 환장한 인간인데, 그럴 리가.

“나를 놀리는 것인가?”

“입맞춤을 나누셨다 들었습니다.”

“그것은 어휴, 맨 처음이야. 내가 치유자임을 알고 놀라서는 확인을 하겠답시고 그런 것이지, 입맞춤이 아니라.”

“그것 말고도, 잘해주지 않으셨습니까?”

“글쎄. 내가 보기엔 사람이 근본적으로 다정한 모양이던데? 첫인상이 좀 더러웠지.”

하온이 알고자 하는 것은 그 대답으로 충분했다.

효명성주 국공 주윤이 근본적으로 모진 이가 아닌 것은 옳았으나, 표현은 다른 문제였다. 늘 기혈이 오염된 상태로 20년의 세월을 예민하게 살아온 그가 누군가에게 다정한 행동을 취한다? 지금껏 없던 일이었다.

성주는 이 특별한 치유자에게 이미 집착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온은 제 눈앞에 엎드린 길고 아름다운 육체를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가느다랗게 낭창한 허리 아래, 봉긋하고 탱탱하게 솟은 엉덩이가 참으로 탐스러웠다. 거칠게 움켜쥔다면 분명 야릇하기 그지없는 신음을 토해낼 것이었다. 말도 안 되게 하얗고 길게 뻗은 저 탄탄한 허벅지가 몸에 감기면, 성주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게 당연했다.

‘포로 교환만 성사되면, 그다음엔 희로국 정복 전쟁이 마무리되겠지. 형이 돌아오는 건 시간 문제다. 이건 다 형을 위해서야.’

은증왕에게는 미안하게 되었지만, 성주의 마음을 그가 차지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오늘은 어디어디 다니시며 구경을 하셨습니까?”

오늘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또 냄새를 맡았던 경험. 그 모든 것이 무흔에게는 팔딱거리는 생명력 그 자체였다. 무흔은 다시금 신이 나서 오늘 겪은 일을 죄다 하온에게 쏟아놓았다.

“가지 말라 한 곳들이 더욱 궁금하진 않으십니까?”

“말이라고. 미치게 궁금해. 새로 들어온 공성 무기가 있다며 아이들이 내게 그것을 보여주려 했는데, 무기고를 지키는 병사들은 이미 사평에게 공문을 받았다더군. 내 출입을 금한다고.”

“아… 너무나도 아쉽군요. 망루나 성벽도 가지 못하시지요?”

“응. 산 다음으로는 망루에 꼭 올라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저기, 저쪽에 보면 주 국공이 적어준 문서가 있어.”

하온은 일어나 둘둘 말린 권자본을 길게 펼쳐 들었다.

눈으로 빠르게 목록을 훑으며 이 중 탈주 경로에 적합한 곳들은 어디인지, 그것부터 확인했다. 동시에 은증왕이 탈주를 갈망할 수 있는 풍경은 무엇일지 떠올렸다.

“출입 불가 구역이라 지정되어 있기는 하나, 제법 가까이에서 그곳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들도 있습니다. 내일은 제가 동행하여 구경을 시켜드릴까요?”

“정말? 그렇게 해주겠는가?”

“물론입니다. 저에게도 즐거울 일인 것을요.”

그로부터 사흘 내내, 무흔은 하온과 더불어 성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이능력자 아이들이 종종 동행하기도 했으나 혹여라도 신체 접촉이 있을 듯하면 하온이 미리 나섰다. 아이들이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재주 좋게 거리를 두게 만들어 무흔을 안심시켰다.

감시하는 병사들이야말로 의원의 동행이 참으로 편했다. 은증왕이 목발을 마구 짚어 다급하게 전진하다 혹 다쳐도 염려할 필요 없고. 하온은 특히 윤과 사평의 신뢰를 받는 자이니 잠시 긴장을 풀어도 되고.

무흔과 하온은 눈에 띄게 가까워졌다. 둘이 속닥속닥 밀담을 나누는 일도 잦아졌다. 그 모든 것은 병사들을 통해 사평에게 전달되었다.

“밀담이라?”

“예. 은증왕과 하온이 서로 귓속말을 나누는 횟수가 확실히 늘었습니다.”

두 사람이 딱히 손을 잡는 등의 신체 접촉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귓속말의 빈도가 확연히 늘었다는 보고였다.

그 말속에는 두 사람이 정분이 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의 뜻이 엿보였다.

사평은 턱을 쓰다듬었다.

하온은 그의 쌍둥이 형 하경과는 달리 사람들에게 살갑게 구는 편이 아니었다. 말수도 적고 웃는 얼굴을 본 기억조차 없었다. 그저 의원으로서의 일에만 몰두하고 약초를 캐며 그리고 연구하는 일에만 흥미를 보이는 자였다.

환자들을 대할 때도 뚱한 표정으로 병에 대한 이야기만 할 뿐, 익히 아는 사이에도 안부를 묻는다거나 걱정 어린 말 한 번 해 주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렇다 하여 하온에게 나쁜 뜻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이제 모두가 겪어 알고 있기는 했다.

그런 그가 난데없이 은증왕과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흥미가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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