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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36화 (36/85)
  • #036화

    *

    다음 날 이른 아침, 무흔은 의원 견습생이라는 아이가 구해온 목발이라는 물건을 받았다. 꾸벅 인사를 올리고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나서는 모습이 영 못 미더웠다.

    “잘못 가져온 거 아니야?”

    길고 튼튼한 나무 지팡이의 중간 부근에는 손잡이가 달려 있었고, 끝부분에는 손바닥 길이 정도의 가로대가 있었다. 가로대는 솜이 듬뿍 들어간 천으로 감싸져 있었다.

    “이것은 무기인가? 창의 일종? 아니야, 그렇다면 여기가 이리 푹신할 이유가 없는데….”

    무흔은 장갑부터 착용했다.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언제 어디서고 사람을 만날 수 있으니까. 기분 좋은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는 목발의 툭 튀어나온 손잡이를 단단히 쥐고 솜을 덧댄 부분을 복부에 밀착시켰다.

    “이렇게, 세차게 흔들어? 다가오는 적을 물리치는 용도로 만든 것이려나?”

    벌컥.

    문이 열렸다. 이리 난데없이 들어올 수 있는 이는 두 부류였다. 성주, 아니면 아이들.

    설하와 강문, 재랑은 목발 한 짝을 배에 붙인 채 허리를 좌우로 돌리고 있는 무흔을 보고서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야말로 박장대소. 재랑은 웃다가 배를 움켜쥐고 바닥에 누웠고 설하는 아무 죄도 없는 강문의 팔뚝을 때려가며 웃고 있었다.

    “아… 하하… 하… 이리 쓰는 것이 아닌가 보구나.”

    강문이 얼른 설하를 피해 다가와 목발을 제대로 짚도록 도와주었다.

    “쿵 짚고 밀어서 몸을 앞으로, 쿵 짚고 밀어서 몸을 앞으로, 그렇게 나가시면 돼요.”

    “아! 이렇게!”

    “처음인데 엄청 잘하시네요? 저는 처음에 진짜 못했는데.”

    “내가 본디 몸으로 하는 건 다 잘하거든. 너도 그럼 이걸 쓸 만큼 맞은 적이 있느냐?”

    “아니요. 저는 작년에 발목을 다쳤거든요. 그때 써봤어요. 저도 다 낫고 나서 아까 은증왕 전하처럼 놀았다가, 목발 뺏겼어요.”

    “아하하하.”

    무흔은 호쾌하게 웃는 척 쓰린 속을 감췄다. 이제 겨우 열한 살 된 남자애랑 똑같은 수준이었다니.

    “우리 얼른 나가요!”

    “응? 지금?”

    “네! 지금 축사에서 소가 송아지를 낳는대요! 얼른 가요!”

    “잠시만.”

    무흔은 권자본을 펼쳤다. 문서에 축사가 적히지 않은 것을 확인한 그의 얼굴이 환하게 폈다. 이를 다시 둘둘 말아 품에 넣고 일어섰다.

    아이 셋, 감시병 넷, 그리고 목발을 짚은 그가 축사로 향했다.

    운 좋게도, 도착했을 때는 소가 막 송아지를 낳기 직전이었다. 아이들과 무흔은 울타리에 딱 붙어 선 채로 송아지가 태어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우와! 섰다!”

    “어머! 나오자마자 바로 일어나네?”

    “신기해!”

    아이들을 쉴 새 없이 종알거리며 감탄사를 내뱉었지만 무흔은 아니었다. 목발을 꽉 쥔 채로, 살면서 볼 일이 있을 거라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생명 탄생의 순간을 지켜보았다.

    심지어 동물을 장갑 벗은 손으로 만지게 해 주다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울컥 솟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송아지가 어미의 젖을 빠는 모습까지 지켜보고 나서야 일행은 축사를 나섰다.

    “우리 이제 응방에 가요!”

    “아… 거긴….”

    “설하가 새끼 매를 받았거든요. 엄청 작고 예뻐요. 구경하러 가요.”

    “응방엔 못 간단다.”

    “왜요?”

    세 아이가 무흔의 발밑에 옹기종기 모여 섰다. 고개를 위로 쳐든 동글동글한 얼굴 위로 의아함이 넘실대고 있었다.

    “나는 적국의 황자니까. 효명성 안에서 갈 수 있는 곳과 없는 곳이 정해져 있거든.”

    “왜 희로국 사람은 응방에 못 가요?”

    “음… 그것은 나도 모르겠구나. 어쩌면 매를 길들이는 기술을 빼앗기지 않고 싶은 걸지도?”

    무흔은 대충 둘러대었다. 포로라는 말을 아이들 앞에서 쓰기가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제 매는 아직 어려서 데리고 나올 수가 없다고 했어요. 힝… 보여드리고 싶은데….”

    설하가 아쉬움에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무흔 주변에 늘어선 네 명의 병사들을 하나씩 콕콕 찍어 바라보았다.

    병사들은 된다 안 된다 말조차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하고 눈치를 보았다. 사평에게 받은 출입 불가 지역 목록에 응방이 분명히 있기는 했으나, 그들이 헤아려 보기에도 응방 출입이 안 될 이유가 딱히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집무실에서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던 사평이 일행을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오래된 문서에서 나오는 다량의 먼지 때문에 창을 전부 활짝 열어둔 차에, 바람을 타고 아이들이 칭얼대는 소리가 희미하게 실려 들어왔다.

    휴식도 할 겸, 사평은 팔다리를 우스꽝스럽게 쭉쭉 펴며 창가로 향했다. 아이들은 북쪽을 가리키며 점점 더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이제는 병사들의 옷자락까지 끌어당길 기세였다.

    “저리 끈질기게 실랑이라… 은증왕에게 응방을 보여주고 싶은 모양이로군.”

    성주의 직인이 찍힌 문서에 응방은 안 된다 분명히 명시가 된 만큼, 병사들은 재고의 여지도 없이 무흔을 데리고 걸음을 돌릴 수 있었다. 그들이 그리하지 못하고 저리 우물쭈물하는 이유는 상대가 황제를 5촌 당숙으로 두고 있는 설하이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좀처럼 포기하지 않을 기세라, 결국 사평이 밖으로 나섰다.

    “산책을 나오셨군요.”

    사평의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아이들은 움찔했다. 그동안 겪어본 바, 특히 생글생글 웃는 사평은 도저히 당할 수가 없었다. 조르기가 더는 통하지 않을 것을 깨달은 아이들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좋은 구경은 많이 하셨습니까.”

    “아까 축사에서 송아지가 태어나는 것을 보았소. 참으로 신비해.”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때를 잘 맞추셨습니다.”

    “아이들이 데려가 준 덕분이지.”

    무흔은 제 곁에 착 달라붙어 있는 재랑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강문이 팔꿈치로 설하를 잽싸게 쿡 찔렀다. 설하는 알아들었다는 듯 강문과 눈빛을 교환하고서는 앞으로 한 발 나섰다.

    “사평, 은증왕을 모시고 응방에 가고 싶어요.”

    “응방은 아니됩니다. 이미 들어서 아실 것입니다.”

    “왜 안 되는데요? 응? 왜 안 되는데? 내 매를 응증왕께 보여드리고 싶단 말이야!”

    설하가 떼를 써봐도 소용없었다. 사평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너무 어린 새끼라 새장에 들여 옮기기는 무리입니다. 훈련이 끝나지 않았으니 밖으로 나왔다간 금세 도망가 버리겠지요.”

    “날아간다구?”

    “예.”

    “발목에 끈을 묶어야겠다. 그럼 되죠?”

    “매를 길들이는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일영(日影)을 아가씨의 매로 온전히 키우기 위해서는 참으셔야 할 부분도 있는 법입니다.”

    대화를 가만 듣던 무흔은 ‘일영’이라는 이름을 듣고 윤의 매를 떠올렸다. ‘월영’이라고 했었으니, 아마도 아이는 사촌 오라비의 매 이름을 본따서 제 매의 이름을 지은 듯했다. 그것이 귀여워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효명성의 응방은 건원 제일인걸요! 자랑하고 싶단 말이야.”

    “성주께서 오시면, 그때 논의드리지요. 이만 글공부를 하러 가실 시간입니다. 사실… 이미 늦으셨지요?”

    “윽!”

    “자수나 기악은 익히지 아니해도 좋으나 글공부만은 제대로 하라, 모친께서 명하지 아니하셨습니까? 월말에 시험을 준비하여 오신다 하셨습니다.”

    어머니의 범 같은 성정을 익히 아는 바, 설하는 삽시간에 시무룩해졌다. 터덜터덜 무흔에게 다가와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건네고는 목발을 쥐고 있는 무흔의 손을 꼭 잡았다.

    무흔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장갑을 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능력자가 제 손을 잡은 것에 긴장하여 심장이 미친 듯이 나댔다.

    “내 매가 조금만 더 크면 꼭 새장에 넣어서 데리고 나올게요.”

    “그래. 기대하고 있을게.”

    당연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무흔은 애써 표정관리를 해야만 했다. 방금 동요했던 걸 사평에게 들킨 게 아닐까. 안도의 한숨 한 번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은증왕께서는 산책을 더 하실 예정이십니까?”

    무흔은 고개를 들어 좌우로 뻗은 길을 보았다. 벽제성에서 나온 이후로 그에게 가장 특별한 것은 바로 길이었다. 제한은 있다고 하나, 적어도 발 닿는 대로 갈 수 있는 이 길이라는 것이 무흔의 가슴을 뛰게 했다.

    “들어가긴 아쉽지. 헌데 다리는 좀 쉬고 싶고, 그런 상태요.”

    “이쪽 길을 돌아 나가면 정자가 하나 있습니다. 제게 차 한 잔 대접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이환이나 천홍과는 달리, 무흔에게 사평은 무작정 편한 이가 아니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도 그렇고,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가느다란 두 눈도 어려웠다.

    제게 뚱하던 하온과의 관계도 좋아졌다. 이 사람이야말로 친해지면 큰 도움이 될 거란 확신에 무흔은 일단 그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와… 이런 곳이 다 있을 줄이야!”

    무흔은 목발을 내려놓고 난간을 짚어 발밑에 펼쳐진 경치를 눈에 담았다.

    좌측으로는 암벽 사이사이 울긋불긋한 단풍이 물들었고, 그 틈을 비집고 가느다란 물줄기가 앙증맞게 여러 갈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중앙으로는 성벽과 망루가 한눈에 보이고 우측으로는 병사들의 훈련이 이루어지는 연병장의 끄트머리가 펼쳐져 있었다.

    “차보다는 한 잔 술이 어울리는 곳이지요.”

    “그러하군. 와! 이 자리에서 보니 성벽의 웅장함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져!.”

    무흔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벽제성에 있던 시절, 나무에 올라 훔쳐보던 경치와는 차원이 달랐다.

    “태고행기에서 읽었는데, 저쪽은 마물의 침입에 대비하여 증축하였다지?”

    무흔은 일부러 태고행기 얘기를 꺼냈다. 제게서 책을 빼앗아간 이유를 정확히 알고 싶었다. 돌려받을 수 있으면 더 좋고.

    “그러합니다. 내용을 자세하게 기억하시는군요.”

    “아무래도 내가 효명성에 거하는 중이니 관련된 내용이 더 쏙쏙 들어오더군.”

    “어느 부분이 가장 인상 깊으셨습니까?”

    “물론, 산이지. 태고산맥의 산 중, 이곳 근방에 위치한 지양산, 천무산, 또 계령산에 대한 부분을 가장 흥미롭게 읽었소.”

    “산에 그렇게 가 보고 싶으십니까?”

    “주 국공이 돌아오는 대로 내게 뒷산을 구경시켜 준다 하였거든. 무척 기대하고 있소.”

    눈치 빠르고 발도 부지런한 시종이 가져다준 주전자를 막 받아든 사평이 놀란 기색을 드러내며 잔에 차를 따랐다.

    “성주께서 정말로 거길 데려 가신다 하셨습니까?”

    “어찌 그리 놀라? 가지 못할 곳인가?”

    “드시지요.”

    사평이 무흔에게 차를 권했다. 가을 바람이 서늘하게 느껴질 즈음, 차 한 모금의 적절한 따스함이 온기를 채워주었다.

    “입에 맞으십니까.”

    “차가 매우 훌륭하오. 헌데… 태고행기 제3장 효명성, 그 장에는 뒷산에 대한 내용이 없던데?”

    “왕유안 어른께서 일부러 누락하신 것입니다. 그곳이 성주님께 특별한 장소이기 때문이지요. 출입이 제한되어 있는 등산로가 있기도 하고.”

    의외의 정보였다. 무흔의 눈에 호기심이 그득 들어찼다.

    마찬가지로 사평 또한 알고 싶은 것이 많은 상대를 앞에 두고 눈을 빛내는 중이었다.

    “그런 곳에 은증왕을 데려가 주시겠다 하셨으니, 필시 두 분께선 특별한 관계인 모양입니다.”

    “뭐…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지.”

    인정을 하면서도 은증왕이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사평은 그것이 이상했다. 지금이 진상을 파고들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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