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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35화 (35/85)

#035화

하온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미건조했다.

기껏 다 낫게 해 놨더니만 왜 그새를 못 참고 빨빨거리고 돌아다녀서 엄한 통증을 불러일으키느냐 잔소리를 할 법도 했으나, 그는 말없이 침을 놓고 온찜질을 준비했다.

“미안하게 되었네.”

“아닙니다. 은증왕 전속으로 배정된 덕분에 저는 이번 정찰대에 합류하지 않아 오히려 편하고 좋습니다.”

“어차피 이능력자들이 다치면 치유자들이 낫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귀하디 귀한 치유자들이 다치면 의원이 낫게 해야 하니까요.”

“아….”

“그리고 저 지팡이는 쓰지 마십시오.”

“응? 어째서?”

“형태가 효율적이지 못해 몸에 더 무리가 갈 겁니다.”

아이들이 만들어준 것인데 쓰지 않기가 어쩐지 좀 미안했다. 그런 이유로 축 처져 있는 무흔의 표정이 하온에겐 산책에 대한 아쉬움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아까 사평 장사의 지시로 견습생이 목발을 가지러 갔는데… 창고를 헤매고 있나 봅니다. 오늘 내로는 가지고 오겠지요.”

“목발이 무엇인가?”

“하반신의 부상이나 통증으로 인해 걷기 힘든 사람들에게 효과가 좋습니다. 가지고 오면 설명을 드리지요.”

하온이 침대 앞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았다.

“진맥을 한 번 더 하겠습니다.”

하온이 무흔의 손목에 손가락을 대었다. 눈을 감은 채로 고요하게 앉아 맥에만 집중하는 그 모습을 무흔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옥에 갇혀 있을 때도 느꼈지만, 이 의원은 정말 믿을 수 없으리만치 자신이 알던 이와 빼다 박은 듯이 꼭 닮았다. 그것이 여전히 신기했다.

하온이 문득 입을 열었다.

“참으로 신기합니다.”

묵묵히 진맥하던 하온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무흔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도 특상등급의 치유자로 태어나셨겠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후천적인 훈련으로 지인의 힘을 늘릴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이리 측정 불능의 정도에까지 이른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습니다. 강도 높은 훈련을 20년가량 하셨으면 모를까.”

“훈련 같은 건 해본 적이 없는데.”

“발현은 언제셨습니까?”

“모르겠어.”

“혹 어릴 때라 기억이 나질 않으시는 겁니까?”

“실은… 내가 치유자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벽제성에서 효명성으로 오는 길에서야.”

하온의 표정이 어리둥절하니 점점 더 미궁에 빠져 들어가는 듯 보였다. 무흔이 지금껏 본 이 의원의 모습 중 가장 인간적인 면모였다.

“그때 발현을 하셨다고요?”

“그것이, 어, 정확히 그런 게 아니라… 내가 회룬석 목걸이를 하고 있었는데, 주 국공이 그걸 제거하자 그때까지 억눌려있던 힘이 드러난 모양이야.”

하온은 연구에 대한 열망이 마구 치밀어올랐다. 회룬석이 원인일 것이 분명했다. 도학 선생이 곧 돌아올 테니, 그때 물어보아야겠다 다짐했다.

“성주님께서는 은증왕으로부터 지인을 많이 받으셨습니까?”

“어휴, 말도 마.”

어쩐지. 그렇게 말하려던 것을 하온은 꾹 삼켰다. 성주가 벽제성에서 힘을 많이 썼다 들었거늘, 치유자들을 가까이 두지 않으시는 것이 이상했다. 평소의 성주라면 이환의 성화에 못 이겨 귀환 후에도 매일같이 치유자들을 달고 살았을 텐데.

그러고 보니 성주가 귀환 후 이상할 정도로 매일 기분이 좋은 것에도 이유가 있었다. 마음에 드는 자를 품을 생각에 들뜬 것이 아니라, 성주에게 꼭 맞는 치유자를 찾아 기혈이 완벽하게 정화된 덕이었다.

그리 결론짓던 하온은 문득 그 지인이 이루어진 방법이 무엇이었는지를 두고 신경이 곤두섰다.

“그럼 그로부터 몇 번이나 더 접촉을 하셨습니까?”

“그것은 잘 모르겠는데?”

딱 셀 수 없을 정도로 횟수가 많다는 소리인 것이 분명했다. 마차에서 성주와 은증왕이 관계를 가졌다 아니다로 내기가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하온은 조금 더 캐 보기로 했다. 은증왕이 저리 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을 보면 그를 구워삶을 수도 있을 듯했다.

“지인을 과도하게 하면 그것이 환자의 몸에 영향을 미칩니다. 혹 몸이 좋지 않을 때 성주님과 접촉을 하여 기를 정화한 일이 있습니까?”

“아팠을 때?”

무흔의 머릿속에서 윤과의 자잘한 접촉들이 스쳐 지나갔다.

열이 내려 기력이 쇠했을 때 그가 면포로 몸을 닦아주었고, 그때 당연히 제어할 수 없는 힘이 빠져나가기는 했다.

주한모에게 맞고 돌아와 혼절했던 밤에는 만지고 싶다며 여기저기 지분거리고 물을 먹여준답시고 입을 맞추었고.

순간 귀가 다 화끈거렸다. 모두 지금의 이 침대에서 이루어졌던 일이었다.

“주 국공은 내가 치유자란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는 사람이 변하기라도 한 듯이 날 계속 찾더군. 뭐… 심히 아플 땐 아니었고, 몸이 힘든 시기를 지났을 때? 그땐 그랬지.”

“하아, 이능력자들이란.”

한심하다는 식으로, 하온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무흔의 편을 드는 듯한 기세로 말을 이었다.

“이능력자들의 지인에 대한 욕망, 갈급함이라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은증왕께선 지금은 모르시겠지만, 그들의 집착은 무섭습니다.”

감정이 없는 평소의 하온 목소리와는 달리, 어찌 보면 성이 난 듯한 어조가 무흔의 귀에 쏙 들어와 박혔다.

“늘 경계하시고 자신의 몸은 자신이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능력자들은 위급한 상황에 눈이 돌아가면….”

하온이 뒷말에 뜸을 들이자 절로 긴장이 일었다. 무흔은 침을 꼴깍 삼켰다.

“다른 사람이 억지로 떼어낼 때까지 치유자들의 몸을 놓지 않으니까요.”

몸을 지키라는 그 말이 잠시 잊고 있던 무흔의 두려움을 툭 건드렸다.

손 좀 잡자며 이글이글 불타던 윤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때 등에서 난 따끔한 느낌에 무흔은 움찔했다. 하온이 둔부와 등허리에 꽂힌 침을 뽑아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정화의 제어를 배우시는 것이 시급합니다.”

“그래야지.”

“성주님께서는 그에 대해 뭐라 하셨습니까?”

“조만간 도학 선생이 유람에서 돌아온다며, 그때 배우면 된다던데.”

“흠….”

대놓고 애매모호한 하온의 반응에 무흔은 고개를 틀어 그를 바라보았다.

“왜?”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주님이 그렇다 하셨으면 응당 그런 것이겠지요.”

하온은 따뜻한 온기가 도는 약재 주머니를 보드라운 면포로 감싸 무흔의 허리와 엉덩이 위에 하나씩 얹어 두었다.

“온도는 괜찮으십니까?”

“따끈하고 좋아.”

“제가 자주 들러 온찜질을 계속해 드리겠습니다.”

“고마워. 그런데 말이야… 아까, 그… 도학 선생 얘기가 나왔을 때,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

“아….”

하온으로부터 답이 대번에 나오질 않고 있었다. 엎드린 무흔은 최대한 고개를 틀어 하온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난감한 표정으로 우물쭈물했다.

“부탁하네.”

하온이 이불을 가져다 무흔의 몸 위에 조심스레 덮어주었다. 혹 경비병들에게 들릴까 염려가 되는지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사실… 도학 선생께서 돌아오시는 날은 기약이 없습니다.”

“주 국공 말로는 서신을 받았다는데?”

“아마도 은증왕께서 마음을 놓길 의도하셨겠지요.”

무흔은 고개를 갸웃했다.

주 국공이 자신을 속일 이유가 어디에 있어서? 기껏해야 제어를 배우지 못하는 것밖에 없지 않은가.

생각에 잠긴 무흔의 눈치를 보며 하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어떻습니까. 이능력자의 손끝만 스쳐도 힘이 질질 새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아….”

“어쩌면 성주께선 은증왕이 제어를 익히지 않길 원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온의 음성이 무흔의 귀에 뱀처럼 감겨들기 시작했지만, 무흔의 경계가 완전히 풀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무흔은 윤과 하온, 둘 중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그 근본적인 문제를 짚어보기로 했다.

“자네가 성주의 뜻에 반하여 내게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흔의 목소리에는 확연한 의심이 묻어났다.

한 박자 뜸을 든 후에야 하온의 입에서 말이 이어졌다.

“은증왕을 뵈면 제 소중한 사람이 생각납니다.”

하온의 표정이 한없이 무거워졌다.

“제겐 형이 하나 있습니다.”

죽었다고 들었다. 무흔은 무슨 말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그저 가만히 엎드려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대외적으로는 죽은 것으로 되어있으나, 그는 현재 희로국에 첩자로 들어가 있습니다.”

지금 하온이 말하고 있는 것은 군사적 기밀임에 분명했다. 무흔은 너무 놀라 그저 눈만 깜빡였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되는 것인지,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일전에 은증왕께서 저와 꼭 닮았다던 희로국 화공의 이야기를 하셨지요. 화공 루경. 본명은 하경으로, 저와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 형입니다.”

이번에는 놀람 그 이상, 충격이 덮쳐왔다. 벌떡 몸을 일으키던 무흔은 순간 이는 통증에 엉덩이로 손을 가져갔다.

“으윽….”

“누우십시오. 아직 찜질을 더 해야 합니다.”

“내 기억의 화공과 정말 똑같이 생겼다 그리 여겼었는데, 그와 쌍생아었어!”

“이리 적국에 홀로 계신 은증왕을 뵐 때마다 저는 형이 생각납니다. 은증왕께도 저와 마찬가지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 흠, 바라는 사람이 계시지… 않겠습니까.”

하온이 목이 메는 듯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이어 옆으로 슬며시 돌아서서는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던 무흔의 마음이 같이 울적해졌다. 누가 저렇게 저를 그리워해 주며, 누가 저를 위하여 무탈함을 빌어줄지. 자신에게는 하온과 같은 이가 없었다.

‘하필… 왜 지금… 주 국공이 생각나지?’

무흔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엎드려 눈을 꼭 감았다. 어쩐지 속눈썹 사이로 눈물이 배어 나올 것만 같아,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심호흡을 했다.

“제가 형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아무에게도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성주님과, 이환 종사관, 사평 장사, 그리고 저만 알고 있는 극비이니까요. 형의 안위가 달려 있습니다.”

“물론이야.”

“혹 훗날 희로국에 돌아시게 될 때… 저의 형을 고발하지 마시고 부디 잘 지내도록 돌봐주시겠습니까?”

“자네와 하경 모두 나에게는 고마운 사람 아닌가. 고발이라니 당치않아. 헌데… 잘 지내도록 돌봐주는 일은 불가능해. 유폐된 황자는 무력하니까.”

무흔은 엎드린 채로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본심이 흘러나왔다.

“나는 자네의 형과는 입장이 다르지. 하아… 돌아가고 싶지 않아.”

“이곳이 그리 좋으십니까?”

무흔은 기운이 쏙 빠진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곳이야 좋지. 헌데 어느 정도로 좋은지는 아직 모르겠어. 아마 다른 곳도 좋을 거야. 희로국만 아니면. 발 닿는 모든 곳이 다 거기보다는 좋을 거야.”

“아… 희로국이 싫으신 것이군요?”

깨달음과 놀라움이 하온에게 동시에 들이닥쳤다. 그런 것이라면, 성주에게서 은증왕을 충분히 떼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무흔의 손을 꼭 잡았다.

“비밀리에 도움이 필요하시거든, 언제든 청하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웃는 하온의 표정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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