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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34화 (34/85)

#034화

배추밭은 그렇다 치고, 응방은 매를 키우고 관리하는 곳이다.

주 국공이 지나친 것을 어찌 책사가 아니된다 하였을까? 무흔은 그것도 의문이었다.

어쩌면 윤이 전서구를 관리하는 곳을 금지 구역으로 해 둔 것과 같은 맥락인지도 몰랐다. 적국의 황자가 매의 다리에 구조를 요청하는 서신이라도 묶어 날려 보낼 거란 의심을 하나?

가지 말라 하니 더욱 궁금증이 동했다. 이렇게까지 해 둔 것을 보면 문밖을 지키고 선 병사들 졸라봐도 데려가 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어찌한다… 지팡이가 오면 가까운 곳부터 돌아볼까.”

툭.

그때 작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응?”

툭.

한 번 더, 창문에 돌멩이 같은 것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무흔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창을 열자, 그 자리에는 작고 귀여운 얼굴 셋이 위를 향하고 있었다. 설하, 강문, 그리고 재랑이었다.

“저희 왔어요!”

무흔의 얼굴 위로 반가운 미소가 번졌다.

“어찌 문으로 오지 않고 이리 창문을 두드리느냐?”

“헤헤, 보고 싶어서요.”

“몰래 왔니?”

“예. 하지만 흑성부대 전원 출동하였으니 이능력 수업도 없는걸요.”

“그렇구나. 방문 허락을 받지 못하였나 했지.”

“실은… 받지 못했어요.”

아이들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설하는 속상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오라버니께 조금 더 졸라보려고 했는데, 제가 잠든 사이에 성을 나가 버렸어요.”

“나도 마찬가지란다. 아, 일단 안으로 들어오거라. 너희를 이리 밖에 세워두는 것이 너무 미안하구나.”

무흔은 창틀을 툭툭 치고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어주었다.

찰떡같이 눈치를 챈 아이들은 창문을 가뿐하게 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창문을 뛰어넘는 품새를 보니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설하가 허리에 묶은 것을 주섬주섬 풀어서는 무흔에게 내밀었다.

“다치셔서 걷는 게 불편하시다고 들었어요. 이거, 병문안 선물이에요.”

설하가 두 손으로 받쳐 내민 것은 알록달록한 꽃이 수 놓인 자그마한 비단 주머니였다.

“고맙구나. 이것이 무엇….”

주머니를 조물조물 만진 무흔은 손끝의 느낌으로 대번에 내용물을 알 수 있었다.

“사탕이로구나!”

“네. 오라버니 것도 준비했는데 갑자기 가 버려서 못 줬지 뭐예요? 매번 줬었는데….”

설하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흔은 윤이 제게 주었던 것을 떠올렸다. 안 어울리게 사탕을 지니고 있는 것이 이상했었는데. 사촌 동생에게 받았다는 말에 납득이 가긴 했었다. 그것이 바로 이렇게 매번 받는 사탕인 모양이었다.

감옥에서 한 알 한 알 까먹었던 소중한 사탕. 마물을 보고 토한 후에 처음 맛본 것이 사탕이었고, 이 사탕을 머금었을 때 입도 맞추었다. 그 기억이 떠오르자 순간 무흔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열이 나시나요? 얼굴이 붉으세요. 아직 아프신 것 같은데… 얼른 누우세요.”

무흔의 방을 기웃기웃 구경하던 강문이 다가와 그의 옷자락을 손끝으로 조심스레 쥐어 톡톡 흔들었다.

“아프지 않단다. 괜찮아. 아! 이런… 잠시만!”

그제야 무흔은 다급히 장갑을 찾아 착용했다. 만약에 방금 이 아이가 소심하게 옷깃을 잡는 대신 손을 붙들었더라면 영락없이 치유자임이 드러날 뻔했다.

“장갑은 왜 끼시나요? 아직 겨울은 아닌데, 추우세요?”

막내 재랑이 다가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무흔은 장갑 낀 손으로 아이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희로국 황족들의 풍습이랄까. 다른 사람과 함께일 때는 늘 장갑을 낀단다.”

아이들에게 저주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하긴 아무래도 좀 그랬다. 무흔은 찌푸리며 힘겹게 걸음을 옮겨서는 탁자 위에 놓인 찬합 뚜껑을 열었다.

“어제 받은 간식이야. 나눠 먹자.”

“다리를 다치셨나요? 걸을 때 아파 보이세요.”

“거의 다 나았어. 지팡이도 가져다준다 했으니, 그것을 받으면 바깥에 산책도 나갈 수 있지.”

그 말에 강문과 설하가 동시에 재랑을 쳐다보았다. 입에 한가득 과자를 넣고 우물대던 꼬마는 형과 누나의 시선에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을 뿐이었다.

“이 바보! 얼른 지팡이를 만들어드려야지 뭐해!”

“아이마 아우아 어으데….”

“뭐라구?”

무흔은 웃음을 터뜨리며 물을 따라 건넸다. 입안 가득한 것을 삼키고 난 재랑은 아까 한 말을 똑같이 반복했다.

“하지만 나무가 없는데….”

“이 안에 쓸 만한 게 있나 보자.”

설하가 방 구석구석을 살폈지만 지팡이로 쓸 만한 재료가 딱히 눈에 띄질 않았다. 들보나 기둥을 떼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강문이 냉큼 창문을 열어젖히고 가지가 유려하게 뻗은 나무 한 그루를 가리켰다.

“저기! 저 나무에서 가져오자!”

재랑은 과자를 하나 더 입에 물고 일어나더니 쪼르르 달려가 나무를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손에 쥐기 좋을 만한 굵기의 나뭇가지가 쭉쭉 길어지더니, 어느새 창문 안으로 쑥 뻗어 들어왔다.

“우와….”

아이들보다 더 눈을 반짝이며 감탄사를 내뱉은 무흔은 제 허리 높이에 이른 나뭇가지를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어… 이제 잘라야 하는데….”

재랑이 난감한 표정으로 쭈뼛거리자 설하가 단호하게 외쳤다.

“잘라!”

“살아 있는 나무를 자르는 건 한 번밖에 안 해 봐서… 전에 건 엄청 가느다란 줄기였어. 이번 건 얘가 아플 것 같아.”

“이렇게 쭉 늘어났을 때 이미 아팠을 거 같은데 뭘.”

설하의 말에 재랑이 울상을 짓자, 얼른 강문이 나섰다.

“일단 자르고, 그다음에 다시 싹이 나게 치료해주면 되지 않아?”

재랑이 눈을 꼭 감고 손을 휘젓자, 줄기가 툭 끊겨나갔다.

“와! 성공이다!”

재랑은 마음이 놓인다는 듯 활짝 웃으며 나무를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게 하는 데 힘을 쏟아부었다. 아이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야, 근데 좀 긴 것 같다….”

강문의 말이 사실이었다. 무흔이 지팡이를 쥐고 서자, 그 끝이 무흔의 머리 위로 치솟아 있었다. 줄였다 늘였다 해 가며 아이들은 제법 지팡이다운 모습을 갖출 때까지 재랑에게 주문을 해댔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선 무흔은 덜컥 걱정이 들었다.

흑성부대의 치유자들이 전원 정찰에 따라갔다면 이 아이들이 폭주 위험에 처했을 때 자신이 나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치유자임이 그렇게 발각되는 건 아닐까.

“이리 이능력을 많이 쓰면 지인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니야?”

“나령 형아가 성에 남았으니까, 이따 받으면 돼요.”

“다행이구나.”

무흔은 안도하며 활짝 웃었다.

“이제 우리 놀러 나가요? 어디부터 구경하실래요?”

강문이 신나서 말하자 설하가 팔꿈치로 그를 툭툭 치고는 문을 가리켰다.

“밖에서 지키잖아. 우리랑 같이 못 가실지도 몰라.”

과자를 한껏 먹고 있던 재랑의 얼굴에 속상함이 그득 고였다. 강문도 설하도 아쉬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무흔은 문 쪽을 바라보았다. 이리 목소리를 높여 떠들고 있는데 별 반응이 없는 것을 보니, 아마도 감시병들은 아이들이 몰래 숨어든 것을 알면서도 눈감아주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산책 또한 가능성이 있다.

“지팡이도 생겼겠다, 나는 잠시 후에 산책을 나가려 하는데, 전각 근처에서 너희들을 우연히 만나면 되겠구나?”

아이들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지금껏 실컷 떠들었으면서, 입을 두 손을 꼭 틀어막고 발뒤꿈치를 들어 살금살금 자리를 떴다.

그 모습에 무흔은 볼이 터질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이들이 빠져나간 후, 침대에 두었던 권자본을 둘둘 말아 감시병들에게로 향했다.

“산책을 나가려 하니, 이것을 봐 주시오.”

무흔이 내미는 것을 본 병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 품에서 똑같은 것을 하나씩 꺼내들었다.

“저희도 받았습니다. 이미 성의 모든 곳에 출입 가능 여부에 대한 지시가 전달되었다 하니 편히 가셔도 됩니다.”

“허, 어찌 그리 일사천리로….”

“사평 장사께서 워낙, 하하. 잠시 기다리십시오. 산책에 동행할 병사들을 불러오겠습니다.”

무흔은 아이들이 오래 기다릴 것이 염려되었다. 담벼락 뒤에 숨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겨워하는 것은 아닐지.

“어차피 내 몸이 불편하여 근방을 걷는 것이 고작일 터인데 그대들과 그냥 다니면 안 되나?”

“멀지 않으니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원칙을 중시하는 병사가 떠났다. 탁자 위에 뚜껑이 열린 채로 놓인 과자 찬합을 보고 있자니 무흔은 후회가 일었다. 아이들 손에 이거라도 들려 보내줄걸.

잠깐의 기다림이 천년 같았다.

병사들이 도착하기 무섭게 무흔은 벌떡 일어서다 지팡이를 꾹 짚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찌르르하게 지나가는 통증 따위, 산책에 대한 열망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디부터 가 보시겠습니까?”

“저쪽으로.”

무흔이 손가락이 향한 곳은 동쪽,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이었다. 채 열 걸음도 가지 않아 담벼락 너머로 아이들의 머리가 하나, 둘, 셋 올라왔다.

“어? 우리도 산책 중인데!”

“같이 산책하기를 청하옵니다.”

“저도 청하옵니다.”

쪼르르 달려나온 아이들은 제법 예를 갖추는 모양새를 내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은증왕은 기품이 있으며 무척이나 얌전한 포로였다. 이 정도 일로 의견을 듣자고 바쁜 사평을 찾아가기도 애매했다. 병사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고민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무흔은 드디어 담 너머에 발을 디뎠다. 걸음 하나하나마다 심장의 박동이 거세게 일렁였다.

매일 보는 하늘이 평소보다 더 높아 보였고, 뺨을 스치는 바람은 다른 세상의 바람인 것만 같았다.

공기가 달랐다.

그럴 리 없는데, 창문을 열고 들이켰던 것보다 지금의 공기가 더 상쾌하고 더 달았다.

나무는 그저 녹색이라 여겼거늘, 지금 눈에 닿는 한 그루 한 그루에 매달린 나뭇잎이 각기 다른 초록으로 햇살 아래 빛나고 있었다.

“은증왕 전하!”

강문이 그리 외치자 옆에 있던 설하는 움찔했다. 오라비에게 전하라는 호칭을 떼어야 한다는 지시를 받기는 했지만, 강문에게 그것을 지적하고 싶지도 않았고 저 또한 그리 부르고 싶었다. 내키는 대로, 설하는 활짝 웃으며 무흔에게 손을 흔들었다.

“전하! 강문이 토끼를 만들었어요! 이쪽이요!”

지팡이를 짚어 몸을 지탱하고 있기는 했으나 무흔의 걸음이 아이들만큼 빠를 수는 없었다. 고운 흙이 깔린 길 위로 재랑이 만든 작은 풀밭이 솟아나더니만, 강문이 흙으로 만들어낸 토끼가 그 위로 폴짝폴짝 뛰어올랐다.

토끼가 무흔의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재랑이 무흔의 발아래에 둥그렇게 풀밭의 융단을 깔고, 토끼에게 외쳤다.

“달려! 먹어! 풀을 뜯어!”

무흔은 지팡이를 붙들고 깔깔대고 웃다가 그만 허리에 힘이 잘못 들어가 버렸다.

“아하하하… 아윽! 으….”

둔부에 다시 통증이 일자, 결국 제대로 구경도 못 하고 병사들의 부축을 받아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수순으로, 무흔의 처소에 하온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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