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화
사평은 머릿속으로 문서에 적힌 장소를 하나하나 떠올리며 별 뜻 없이 물었다.
“언제 받은 문서라 하더냐?”
“어제라 하는데, 저희는 서책을 원하는 대로 가져다 달라는 지시 말고는 받은 바가 없습니다.”
그러자 사평의 귀가 한 차례 꿈틀했다.
“은증왕이 서책은 무엇을 달라 하였지?”
“한주여행기, 묘택리지, 태고행기입니다.”
책의 이름을 들은 사평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의 성주가 아무리 은증왕을 눌러 앉히기를 원한다고는 하나, 상대는 적국의 황자였다. 만에 하나 그가 희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저 중 태고행기의 내용은 북부 국경 일대 보안의 측면에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책상에 앉은 사평은 붓을 들어 종이의 빈자리에 몇 줄을 더 적어넣었다.
*
무흔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침상에 옆으로 길게 드러누워 태고행기를 읽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다가도 한 번씩 분통이 터져 주먹으로 푹신한 이불을 내리쳤다. 생각할수록 윤이 괘씸했다.
‘갑자기 정찰을 나가게 될 줄 모르고 언제든 직인은 찍으면 된다 여겼을 거야, 화내지 마.’
무흔은 제 안에서 그렇게 속삭이는 착한 마음을 발로 뻥 걷어차고 싶었다.
그때 바깥에 선 경비병들의 인사 소리가 들렸다.
무흔은 화들짝 놀라 태고행기를 재빨리 이불 속으로 밀어 넣었다.
다행스럽게도 간발의 차이로 문이 덜컥 열리고, 안으로 들어선 사평이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간밤에 바깥이 소란하였는데, 편히 주무셨는지요.”
“염려해주어 고맙소. 놀라서 뒤척이다 그만 늦게 잠이 들어, 이리 해가 중천에 오르고 나서야 눈을 떴지 뭐요.”
무흔의 시선은 사평이 들고 있는 문서로 향했다. 그것을 눈치챈 사평은 곧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여기, 산책 허가에 대한 문서입니다. 직인을 찍었습니다.”
무흔은 사평이 건네는 권자본을 받아들었다. 그 사이 문서가 족자에 두루마리 형태로 제대로 격식을 갖추어 만들어진 것에 은근히 놀라움이 들었다.
“그 직인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이 그리 중해?”
“성주께서 직접 그 자리에서 명을 내리시는 경우를 제외하고, 효명성의 중요한 사안은 구두의 전달로는 효력이 없습니다. 직인이 찍힌 문서만 가능하지요.”
“주 국공이 원칙을 대단히 중시하는가 보네.”
비꼬는 듯한 무흔의 말에 사평이 동조의 의미로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저도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흠,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본디 포로는 수갑을 채우거나 포박해야 하는 것이거늘, 성주께서 이리 예외를 두시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까요.”
무흔은 자신의 손목을 어루만졌다. 연회장에 끌려나가던 당시 손목에 감겼던 포승줄. 썩 편치 못했던 그 감각이 다시금 생생히 떠올랐다.
사평이 마치 이환과도 같은 시선으로 저를 보고 눈웃음을 지었다. 무흔은 그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짧은 침묵 뒤, 사평이 품에서 보드라운 비단 손수건을 꺼내 무흔에게 건넸다.
“성주께서는 제게 특별히 은증왕을 잘 살펴달라 당부하시며 이걸 전해주라 하시더군요.”
무흔은 의아해하며 곱게 접힌 손수건을 펼쳤다. 그 중앙에는 윤의 필체로 山(산)이라는 글자 하나가 크게 덜렁 적혀 있었다.
“훗.”
무흔의 입에서 자그마한 폭발이라도 하듯 웃음이 튀어나왔다. 다녀와서 산에 데려가 주겠다는 표현을 이렇게 하는 것이 제법 그다웠다.
사평은 손수건을 건네면서부터 무흔의 모든 변화를 고스란히 눈에 담았다.
투덜대던 하얀 얼굴 위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져나가고 있었다. 어제 숙영부인과 동행한 여종이 목격했다던 성주와 은증왕의 찌릿한 분위기가 거짓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몸은 좀 어떠하십니까? 산책할 만큼 걷는 것이 가능하시겠습니까?”
“물론! 오늘 가벼이 몸을 풀고, 내일이면 돌아다닐 수 있을 거요.”
“많이 갑갑하신가 보군요.”
“언제 끌려가게 될지 모르니…. 효명성에 있는 동안 충분히 바깥 세상을 누려보고자 해서.”
무흔은 말끝을 우물거렸다. 그러다 문뜩 뭔가 떠올랐는지 아, 하고 운을 뗐다.
“혹 내가 짚고 다닐 수 있는 막대기를 좀 구할 수 있을까? 당분간이면 될 텐데.”
“준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것은 없으십니까?”
“아, 궁금한 것이 하나 있어.”
“말씀하십시오.”
“희로국에 있는 염록왕 말이야. 탈출시키기 위해 그동안 건원국에서 첩자들을 보냈다거나, 특별한 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겼던 적이 있으시오?”
한없이 좋은 사람처럼 웃던 사평이, 호선을 그린 입매는 그대로인 채 눈빛만 바뀌었다. 무흔은 그 서늘한 변화에 내심 움찔했다.
“어떤 연유로 이를 물으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무흔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솔직하게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저리 되묻는 것을 보면 뭔가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건원에서 날 사로잡은 것이야 솔직히 벽제성 함락 때에 얻어걸린 것이 아니겠나. 그쪽 왕야께서 납치되신 후 20년 넘는 세월이 흘렀는데, 그동안 가만히 손 놓고 기다리진 않았을 듯하여 묻는 것이오.”
“물론 있었습니다. 딱히 비밀도 아니지요. 수차례 실패했었고, 가장 최근의 실패는 3년 전입니다.”
“아….”
삽시간에 무흔의 얼굴 위로 실망감이 그득 차올랐다. 한껏 부풀었던 기대가 사그라들고, 허망한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주 국공이 나를 효명성에 둘 방법을 찾아주겠다 하였건만…. 염록왕이 포로 교환 성사 전에 돌아올 가능성은 없는 것이려나. 하아….”
가늘게 째진 사평의 눈이 순간 동그랗게 커졌다. 의외의 답이었다. 염록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은증왕도 희로국에서 누군가 구하러 올 거라 믿고 묻는 질문인 줄로만 알았거늘.
절망의 기색이 역력한 저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제 성주만큼이나 은증왕도 이곳에 머물기를 원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었는데, 어쩌면 정말로 윤과 무흔이 정을 통한지도 모를 일이었다.
“주 국공이 그대의 지혜를 구하겠다 하였는데, 정말 뾰족한 방법은 없는 것이오?”
“제가 제안 드린 방책은 모두 성주님의 신념에 위배되는 일이라 기각당하였습니다.”
“어떤 묘책에, 어떤 신념이기에?”
“이능력이란 본디 마물을 물리치고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하늘이 주신 능력이기에, 성주님께서는 사람을 해하는 일에 이능력을 사용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십니다.”
“아, 들은 바 있지.”
“제 방책의 내용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기는 힘든 점 양해해주십시오.”
무흔은 혼란스러운 속내를 감추려 다급히 눈부터 내리깔았다. 일단은 상대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 국공은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까지 나를 곁에 둘 생각은 없는 건가. 내 지인이 마음에 들기는 하겠지. 허나 고통 속에서도 지금껏 멀쩡하게 잘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그리 살면 되는 일 아니겠나. 치유자는 살다보면 또 찾게 될 거고.’
불안감이 일순간에 무흔을 삼켜 버렸다.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앞에 서 있으니 차마 한숨은 쉬지 못하고 이를 악물어 참았다.
“어제 받으신 서책들은 재미있게 읽으셨습니까?”
사평이 창가 앞 책상을 흘끗 바라보며 물었다. 그 위에 놓인 책은 두 권이었다.
무흔은 철렁했다. 낭패였다.
저자는 윤의 책사이니 처소 감시병들에게 책 제목을 듣자마자 태고행기를 읽고자 하는 제 속내를 간파하였을 게 분명했다.
“책상 위의 두 권은 다 읽으셨으면 새 책으로 가져다 드릴까요.”
“아, 고, 고맙지만 괜찮소, 하하.”
사평은 가만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은증왕께서 저희 성주님께 좋은 정보를 제공하여 주신 덕에, 제가 과거의 사료들을 뒤져 조건에 적합한 간자와 상단의 후보를 추리는 중입니다.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감사는 무슨. 덕분에 나도 이리 편히 지내지 않소. 손목도 묶이지 않은 채로.”
아까 사평이 원칙 얘길 하며 언급했던 제 손목 얘기를 한 번 꼬집어주고, 무흔은 씩 웃어주었다.
사평도 마주 보고 볼이 동그랗게 되도록 양쪽 입꼬리를 한껏 올렸다. 활짝 웃는 듯하였으나, 그믐을 앞둔 달처럼 가늘게 휜 두 눈은 여전히 번뜩이는 기를 품은 채였다.
“헌데, 그 조사 과정에 북부의 지리와 관련한 자료가 필요해졌습니다. 서고에 갔더니 태고행기가 없더군요. 은증왕께서 읽고 계시다 들었는데, 제가 받아가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아… 내가 책을 읽다 어디에 뒀더라.”
무흔은 뜨끔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불 속에서 그 책을 꺼냈다가는 숨긴 것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야 하니. 두리번거리며 몸을 힘겹게 움직여서는 무언가를 찾는 척을 했다. 그러다 말고, 가만히 서 있는 사평을 향해 해맑게 웃어 보였다.
“찾는 것을 좀 도와주겠소? 내 몸이 아직 불편하여…. 내가 이 근방을 찾을 테니, 장사께서 저쪽을 좀 봐 주시오.”
사평이 몸을 돌리는 순간, 무흔은 재빨리 이불 속에 숨겨둔 책을 꺼냈다. 이어 엉덩이의 통증을 참아내고는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몸을 움직여 침대 옆 협탁의 서랍을 요란하게 열었다.
“아이고, 이게 여기 있었네. 어제 잠들기 전에 여기다 넣어 놓고서는 그만… 아하하. 자, 가져가시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다 읽지 못한 것은 아니신지요?”
“하하, 여기 머무는 동안 언제든 또 빌려다 읽으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무흔은 아무렇지 않은 척 책을 돌려주었다. 책은 이미 끝까지 다 읽었다. 평생 갇혀 책을 읽는 동안 자연스레 속독 능력을 익힌 덕이었다. 심지어 무흔에게 중요한 효명성 일대의 지형에 대한 부분은 두 번이나 읽은 상태였다. 삼독에 실패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럼, 이만 쉬십시오. 지팡이는 좋은 것으로 구하여 보내드리겠습니다.”
책을 그렇게 뺏기고, 무흔은 문이 닫히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다. 기가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길고 긴 한숨부터 튀어나왔다.
“하아아아. 녹록치가 않네. 귀신인지 사람인지, 무슨 사람 눈이 저래?”
남들이 저를 보고 하는 소리를 내뱉어가며, 무흔은 사평이 건네준 권자본을 펼쳤다.
멋지게 표구가 된 긴 문서 위로, 눈에 익은 필체로 적힌 출입 금지 장소의 목록이 나타났다. 아침부터 지겹도록 들었던 그 성주의 직인이 무엇보다 궁금했다.
“어후, 화려하기도 해라.”
어찌 사람의 손으로 이리 가늘고 정교한 선을 조각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매화와 주작이 붉을 주(朱)자를 둥글게 감싼 모양의 직인이 쿡 찍혀 있었다.
도장 바로 윗줄에 ‘위임 전결 사평’이라 적힌 문서에는 두 군데 더, 윤의 것과는 다른 필체로 기재된 부분이 눈에 띄었다.
“응? 출입을 금하는 장소를 추가한 것인가?”
무흔은 고개를 갸웃하였다. 하나는 배추밭,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응방(鷹房)이었다.
“배추밭? 다른 야채를 키우는 밭은 괜찮고, 배추밭은 안 된다?”
흥미가 일었다. 배추밭에 혹 그들의 성주가 알지 못하는 다른 작물을 몰래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무흔은 그런 상상을 해 보았다.
아니면 뭔가를 비밀리에 파묻어두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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