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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32화 (32/85)
  • #032화

    무흔은 냉큼 입술을 오물거려 입안 가득 먹을 것을 채워 넣었다. 본 적도 없는 오리 얘길 꺼냈다가 되려 놀림 받은 상황에 열이 올랐다.

    “주 국공, 이 거처는 겉만 번드르르해. 지상에 있는 감방인 거지? 병사들이 문밖으로 못 나가게 하던데?”

    “당연하지. 적국의 포로를 자유로이 활보하게 둘 수는 없지 않겠나.”

    “어차피 어딜 가든 감시병들이 내게 따라붙을 텐데 무슨 걱정이야.”

    무흔은 미약하게나마 자유를 맛볼 기회를 포기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포로가 되어 북방에까지 와서 또 예전과 같이 갇힌 신세로 지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설득을 하든 협박을 하든, 눈앞의 인간을 구워삶아야 했다.

    따끈하게 잘 우려진 차를 한 모금 들이켜고, 일부러 원망을 실어 윤의 눈을 바라보았다.

    “내가 얼굴이며 엉덩이며 처맞고 절뚝거리며 이 고생을 하는 것이 누구 탓이지? 간자에 대해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 것이 누군지도 생각해보고. 뭣보다, 내 심기를 거슬러 가며 지인을 받는 것은 눈치가 보일 거란 셈도 하셔야지.”

    “은증왕.”

    윤이 은근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무흔은 짜증 섞인 표정을 자아내며 식사에만 몰두했다.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낼 건 뭐요. 산책 대신 서책은? 원하는 대로 가져다 읽는 것은 어떻겠소?”

    무흔은 못 들은 척 젓가락만 바삐 놀렸다.

    머리를 쥐어 짜내던 윤이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손가락을 치켜들며 외쳤다.

    “악기를 좋아하지 않소? 벽제성을 떠나는 날 밤에도 연주를 했다지. 종류별로 전부 갖다 드리리다. 황제께서 하사하신 옥피리도 있는데, 분명히 마음에 들 거야.”

    무흔은 젓가락을 탁자에 신경질적으로 탁 내려놓았다.

    “주 국공, 지금 말하고 있는 것들… 내가 벽제성에 갇혀 살던 시절과 점점 더 똑같아지는 것을 알고 있소?”

    순간, 윤이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젠 좀 사람답게 사는 척이라도 하고 싶어. 그만한 자유도 허락하기 아까운가?”

    무흔의 말끝이 떨렸다. 진짜로 화가 난 것도 아니었고 이리 집요하게 요구하면 윤이 들어줄 것 같다는 예상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자유를 말하고 있자니 목이 메었다.

    무흔은 냉큼 찻잔부터 비워냈다.

    윤이 눈치를 살피며 주전자를 기울였다. 쫄쫄쫄쫄, 소리를 내며 조심스레 다시 잔을 채워주고서는 일어났다.

    “알겠으니, 식사는 마저 편히 드시오.”

    그대로 윤이 나가 버리는 줄로만 알았더니만, 그가 창가에 놓인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종이를 펴서 문진으로 누르고 먹을 갈아 붓을 들어 뭔가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무흔은 그 뒷모습을 가만 바라보았다. 궁금하긴 한데, 아까까지 실컷 짜증을 내놓고선 쪼르르 일어나 머리를 들이밀기는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윤이 앉았던 자리에는 숙영부인이 건넸던 연한 보랏빛의 비단 장갑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그래, 저걸 끼고 있자.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지인은 없다고 엄포를 놓는 거야. 성주에 국공씩이나 되어서 억지로 장갑을 벗겨 손을 잡으려 들지는 않겠지.’

    무흔은 냉큼 팔을 뻗어 장갑부터 챙겨 제 허벅지 아래에 두었다. 이어 윤의 등짝을 힐끗거리며 빠른 속도로 음식을 먹어 치웠다.

    윤은 일필휘지로 적어나가다 말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기도 하고, 다시 또 열심히 적어나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무흔은 윤이 자리로 돌아오기 전에 얼른 식사를 마치고 장갑을 착용한 채로 철벽을 유지할 계획이었다.

    드르륵.

    무흔이 마지막 남은 한 점의 고기를 입에 넣는 순간, 윤의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가 났다.

    너풀너풀하게 긴 종이를 들고 돌아오는 윤과 눈이 마주쳤다. 무흔은 입에 든 것을 열심히 씹어 삼키는 동시에 젓가락을 내려놓고 다급히 장갑을 꼈다.

    그러든가 말든가, 윤은 장갑 따위 관심도 두지 않고 긴 종이를 무흔 앞에 내밀었다.

    “그게 뭔데?”

    윤의 손에 들린 것을 보려 무흔은 고개를 앞으로 쭉 빼고 아무 생각 없이 방석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순간 통증이 일었다.

    “윽!”

    그대로 주저앉지도 못하고, 무흔은 미간을 찌푸리며 엉덩이를 내민 채로 어정쩡하게 탁자를 붙들었다.

    “설 거요, 앉을 거요?”

    통증이 그득한 얼굴을 보다 못한 윤이 결국 무흔을 번쩍 안아 들었다. 침대로 성큼 걸어가서는 사뿐히 내려놓고 살짝 굴렸다.

    “자, 이리 옆으로 길게 누우면 엉덩이도 아프지 않을 것이고 문서도 펼쳐 놓고 보기 좋을 거야.”

    그러면서 장갑 낀 무흔의 손에 문서를 쥐여주었다. 윤의 표정에는 벌써부터 만족스런 기색이 역력했다.

    무흔은 의아했지만 터질 듯이 증폭된 궁금증부터 해결하려, 글자를 중얼중얼 읊기 시작했다.

    “하기 장소는 은증왕의 출입을 금한다. 흑성부대의 훈련소와 합숙소를 비롯한 관련 시설 일체, 제1무기고, 제2무기고, 화약고, 제1연병장, 제2연병장….”

    그 뒤로도 한참 더 잔뜩 나열되어 있는 목록을 건너뛰고, 무흔은 맨 아래에 적힌 글귀를 읽어내렸다.

    “이상의 장소들을 제외한 곳에는 은증왕의 출입을 허락한다. 동행하여 감시하는 병사의 수는 넷으로 하며… 주 국공! 산책을 허락하는 것인가!”

    몇 줄 더 남은 문장들을 마저 다 읽기도 전에, 무흔은 기쁨에 들떠 외쳤다.

    “고맙소! 식사도 마쳤겠다, 내 당장 나가봐야겠어.”

    드디어 나갈 수 있다는 기대와 흥분에 몸을 벌떡 일으키려는데, 윤이 무흔의 어깨를 지그시 눌러 도로 침대에 눕혀버렸다.

    “그 몸으로? 오늘은 서책이나 가져다 달라 하여 읽고 쉬시오. 내일도 날이야.”

    “지겹게. 서책이라….”

    “오늘 얌전히 잘 있으면, 흠, 상으로 성주가 친히 동행하여 효명성을 안내해주는 특권을 허락하지.”

    진심으로 뿌듯해 보이는 윤의 표정 탓에, 무흔은 어처구니가 없어 그저 웃었다.

    *

    그날 밤, 무흔은 책을 읽고 있었다. 은증왕이 원하는 책은 뭐든 읽게 해 주라는 윤의 명에 따라 감시병이 가져다준 서책 중 하나였다.

    병사에게 부탁한 것은 세 권, 모두 여행에 관련된 책이었다. 두 권은 눈속임으로, 무흔이 목표로 하는 책은 그중 ‘태고행기’였다.

    건원국의 유명한 시인 왕유안이 북부 효명성 일대와 태고산맥을 여행하며 쓴 책으로, 북부의 인문과 지리에 대해 눈에 보일 듯한 묘사가 특히 유명했다.

    그것을 읽고자 하는 제 의도를 윤이 알게 된다면 화를 낼 게 분명했다. 지금까지 봐준 온갖 편의 또한 더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만약 윤이 뾰족한 수를 내지 못하고 포로 교환에 응해 결국 저를 내어주게 된다면? 최악의 상황이 닥칠 경우, 도주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려면 이 일대에 대해 빠삭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무흔이 서책의 내용을 달달 외우듯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쿵.

    땅에 흐릿한 진동이 일었다.

    쿵.

    한 번 더.

    무흔은 땅의 울림에 놀라 책장을 넘기다 말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번에는 분명히 알 것 같았다. 벽제성에서 효명성으로 오는 길에 느꼈던, 그 진동과 비슷했으나 무척이나 희미했다. 둔부의 통증 탓에 일어나지 못하고, 바깥의 병사를 급히 불러 물었다.

    “혹 마물이 나타난 건가?”

    “맞습니다. 허나 염려 마십시오. 흑성부대의 심야 대기조가 바로 출동할 것이며, 이 정도 약한 울림이면 마물이 산을 벗어나기도 전에 처리될 것입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땅의 울림은 계속되는 중이었건만, 꾸벅 인사를 건네고 방을 나서는 병사는 그때의 제1정예부대원들과 다름없이 태연했다.

    무흔은 마물을 처음 보았던 날 속을 게워냈던 기억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읽고 있던 태고행기를 침대 위에 뒤집어엎고 얼른 이불을 뒤집어썼다.

    천지가 뒤집어지듯 쿵쿵 소리가 요란하고 땅의 울림이 거세었던 탓에 무흔은 밤새도록 뒤척이며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결국 해가 중천에 이르고서야 눈을 떴는데, 이상하게도 바깥의 분위기가 분주했다.

    마물들이 몇 시진 동안 멈추지 않고 쏟아져 나오는 탓에 심야 대기조로는 해결이 불가능했다. 결국 흑성부대 전원이 겸사겸사 나흘 뒤로 예정되어 있던 산맥 정찰 일정을 앞당겨 새벽에 출발했다는 소식을 무흔은 감시병들로부터 뒤늦게 접하게 되었다.

    “허면 주 국공은 지금 성에 없단 말인가?”

    “그러합니다.”

    그럼 오늘부터 대략 한 달간은 못 보는 건가.

    무흔은 서책이며 악기 따위로 저를 구슬리려던 그에게 차갑게 쏘아붙였던 게 문득 마음에 걸렸다. 하필 왜 그런 것부터 떠오르는지.

    제법 긴 시간 나가 있는 것인데 제대로 된 인사 하나 나누지 못한 것도 아쉬워졌다.

    슬그머니 가슴을 비집고 올라오는 묘한 이 기분의 정체가 대체 뭔지, 무흔은 심장 부근이 찌릿하게 울리는 것을 느끼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성주의 특별 안내는 기다릴 수 없게 되어 버렸으니 나 혼자서라도 바깥을 탐색해 보자!’

    무흔은 침대 머리맡의 문갑 서랍 안, 곱게 접어 둔 긴 종이를 펼쳐 병사에게 내밀었다.

    “어제 주 국공이 그대들 감시하에 산책을 하고 와도 된다고 했어. 자, 이건 그가 내게 준 목록이야.”

    그 종이를 잠시 훑어보던 병사는 고개를 저었다.

    “이에 대해서 저희는 하달받은 바가 없사옵니다.”

    “뭐? 여기 봐. 이건 주 국공이 어제 적어준 거라고. 내가 발 들일 수 없는 곳을 이렇게 전부 지정해두지 않았는가.”

    “허나 직인이 없지 않습니까.”

    “직인?”

    무흔은 병사의 손에서 종이를 빼앗아 다시 살폈다. 그의 말마따나 종이 어디에도 직인은 없었다. 오로지 윤의 수려한 필체만 그득할 뿐이었다.

    “효명성 내의 공문서는 성주 직인이 찍힌 것만이 유효합니다. 저희가 이리 본들 이것이 주군의 친필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뭐라고?”

    그럼 이 인간이 날 속인 거야?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 올랐다.

    무흔이 처소 앞에서 말릴 수 없을 정도로 난리를 쳤다는 소리가 결국 사평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

    사평은 집무실에 있었다. 북부 내의 옛 첩자와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10년 묵은 서류에 파묻힌 상태였다.

    극비로 진행하라는 성주의 명에 따라 이환과 반반 나누어 뒤지던 중이었는데, 이환이 윤의 호위를 위해 흑성부대를 따라가 버리는 통에 모두 제 몫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 와중에 은증왕의 처소를 지키는 경비병이 찾아왔다.

    “은증왕이 주군의 허락을 받았다며 이 문서의 이행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목록이 길게 적힌 종이를 받아든 사평은 눈으로 내용을 빠르게 훑었다.

    “성주님의 필체가 맞기는 하다만… 흠, 흑성부대와 관련된 곳은 전부 출입 불가라?”

    첫 줄부터 의문이 들었다. 건원국과 희로국은 피차 보유한 이능력자들에 대한 정보를 서로 간에 충분히 갖고 있었다. 굳이 적의 황자에게 이를 감출 이유는 없었다.

    ‘이상하다. 천홍 말로는 은증왕이 이능력을 무척이나 신기해했다 하였는데. 성주께서 아끼는 이라면 분명 그가 궁금해하는 것부터 보게 해 주셨을 것이야. 다른 이유라면, 무엇일까?’

    은증왕과 관련하여 성주가 제게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 벌써 두 번째였다. 캐볼까, 호기심이 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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