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화
설하는 사촌 오라비의 얼굴부터 살폈다. 당연히 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단칼에 거절당했다.
“왜? 왜 안 되는데?”
“은증왕은 위험해. 적국의 황자다.”
“위험하다구? 아닌 것 같은데….”
설하의 눈에 은증왕은 태어나서 여태껏 본 사람 중 가장 반짝거리는 존재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인이 있다면 그런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으니까. 위험할 리가?
“엄청 상냥하게 인사도 해 주셨어. 웃어주셨다고! 다시 놀러오라고 했단 말이야.”
“공설하.”
‘설하야’가 아니라 ‘공설하’였다. 설하는 순간 움찔했다. 윤이 화가 났을 때는 꼭 저리 이름부터 불렀다.
“누구 맘대로 허락도 받지 않고 은증왕을 만났지? 그것도, 어린애들이, 감옥까지 가서 말이야.”
윤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혼이 날 것이라고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설하는 울먹울먹하더니 조그마한 주먹으로 있는 힘껏 윤의 복부를 쳤다.
“오라버니, 나빠!”
쿵쾅거리며 설하가 집무실을 나가 버렸다.
사평은 의아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모시는 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나?”
“면회를 허락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해서요.”
“적국의 포로잖나.”
“은증왕은 무해하고 유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설하 아가씨에게는 한 주먹 거리도 안 될 것 같은데요.”
“그냥. 싫어.”
윤은 이유를 숨겼다. 그 아이들은 모두 이능력자이니, 무흔과 닿기라도 하면 분명 치유자임이 들통날 것이었다.
사평이 싱글싱글 웃자 윤은 냉큼 화제를 돌렸다.
“은증왕의 장갑을 만들라 이른 것은 어찌 되었지?”
“어제 손의 크기를 재었고, 거의 마무리 되었다 합니다. 숙영부인이 식사를 들이며 직접 가져다준다 하시더군요.”
“…그래.”
숙영 할멈이 가져다줘도 상관없는 것이기는 했다. 어쨌든 장갑을 착용하면 되는 일이니까.
헌데 윤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가져다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은증왕에게 닿으면 저주가 옮는다는 말을 믿으십니까?”
사평의 물음에 다시 얼른 두루마리로 시선을 돌린 윤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병사들도 그렇고 성에서 일하는 자들 중 믿는 이들이 더러 있더군. 모두의 마음이 편안하려면 장갑을 씌워두는 편이 좋겠지.”
“부적이라도 하나 써 올까요?”
뜬금없는 단어가 귀에 들어왔지만 윤은 무심한 척 되물었다.
“갑자기 무슨 부적?”
“성주님께서는 이미 은증왕의 몸이며 손이며 잔뜩 만지셨다 들었습니다. 액운을 떨치는 부적을 몇 장 해 오도록 하겠습니다. 침실에도, 여기 집무실 책상 아래에도 붙이면 좋겠군요.”
사평이 웃음을 한껏 머금고 눈을 빛내며 농을 쳤다.
윤은 못 들은 척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책상 위에 그득히 놓인 두루마리 중 하나를 펼쳐 가볍게 눈으로 훑고는 이를 둘둘 말아 오른쪽에 두었다. 또 하나를 읽고 그것은 왼쪽에, 그다음 것도 살펴본 후 왼쪽에 놓았다.
신속하게, 하지만 허투루 훑지 않고 그 많은 문서를 두 더미로 나눈 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차곡차곡 쌓인 왼쪽 서류 더미를 가리켰다.
“이쪽 절반은 내가 처리해야 할 것이니 내버려 두게. 오른쪽 절반은 자네 선에서 해결이 가능한 것이야. 사흘 내로 전결처리 해.”
“예? 성주께서 이리 계시는데 전결이라니요. 아니, 그런데 급하게 어딜 가십니까?”
“내 행선지까지 자네에게 일일이 보고해야 하나? 맡겨놓은 거나 처리하지?”
뜨억 하는 사평을 두고 나서려던 윤이 발을 멈췄다. 아, 그리고, 하고 운을 떼며 뒤를 돌아보았다.
“기한은 나흘까지, 은증왕을 돌려보내지 않고 효명성에 붙잡아 둘 계책을 뽑아 와.”
사평의 눈꼬리와 입매가 서글픈 강아지처럼 축 처졌다. 별것 아닌 농담의 대가로 일거리와 함께 불가능한 과제까지 떠안게 된 것이었다.
통쾌한 기분으로 집무실을 나선 윤은 냉큼 무흔에게로 향했다.
설하에게 미안하긴 했지만 조금 과장하자면, 그를 숨겨둔 채로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봄바람 같은 걸음으로 무흔의 처소에 이르렀을 때, 창 너머로는 예상치 못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언뜻 여인들의 높은 음에 섞여 잔잔한 무흔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순간 윤의 매끈한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
무흔의 식사에 변화가 생겼다.
주방 소속 시녀들이 줄줄이 들어와 상을 차려놓고 바로 나가는 것이 보통인데, 어제부터는 모두들 무흔 곁에 앉아서는 식사 시중을 드는 것이었다.
“탕이 정말 훌륭해. 무엇으로 만든 것인가?”
무흔에게 탕을 떠 준 시녀가 커다란 그릇을 열어 그 안을 보여주었다.
“북천자라입니다. 자라 중 으뜸이지요.”
무흔은 둥둥 떠 있는 단단한 껍데기에 흠칫 놀랐다. 자라를 먹었다니!
“산 깊고 깨끗한 계곡에만 사는 품종으로, 육질이 무척이나 연하고 원기를 북돋움에 효과가 가장 좋아요. 은증왕께 진상하기 위해 특별히 잡아 오라 일렀습니다.”
답을 건넨 이는 무흔의 맞은 편에 앉은 노파였다. 그녀는 흡족하기 이를 데 없는 미소를 한껏 머금은 채였다.
“아… 아하하… 하… 고맙소. 자라였구려. 내 자라는 처음이라, 하하….”
“호호호, 놀라셨습니까?”
“아하하, 아유, 놀라긴. 하하.”
“성주님의 체력을 버텨내시려면 매 끼니 이리 보양식을 드셔도 모자랍니다. 오호호호.”
무흔은 여기서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차렸다. 이번에는 곁에 앉은 여종의 차례였다.
“이것도 드셔보세요. 쫀득하여 피부에 좋습니다. 본래 고우시지만 유지하는 것도 중요해요. 성주님이 좀 까탈스러우셔야죠, 호호호.”
“아… 하하….”
본인이 더 설레는 표정으로 곁에 앉은 시녀가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다 무흔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
윤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성주님을 뵙습니다.”
인사를 올리고 고개를 든 그들 앞에는 질풍노도의 심기를 꽁꽁 뭉쳐 두 눈에 박아 넣은 듯한 사내가 있었다.
“내 분명 음식만 들이고 사람은 들이지 말라 하였거….”
윤이 앞에서 뭐라 말을 하든 말든, 무흔은 방금 제 입에 음식을 넣어준 이를 향해 눈짓했다. 이어 손가락으로 음식을 가리키자, 그녀는 얼른 젓가락을 들어 그것을 무흔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
“흠.”
윤이 눈을 희번득 뜨자 일순간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그 와중에도 무흔 맞은편에서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은 노인은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제가 은증왕을 오늘 처음 뵙습니다. 소개를 해 주셔야지요.”
그녀가 마치 며느리를 앞에 두고 흐뭇해서 어쩔 줄 모르는 시어머니 얼굴을 하고 있는지라, 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쪽은 우리 효명성의 안살림을 맡아주는 숙영할… 숙영부인이오.”
그녀는 한껏 격식 있는 표정을 지으며 윤에게 눈치를 주고 있었다. 평소대로 할멈이라 칭하려던 윤은 냉큼 호칭을 고쳐주었다.
“은증왕께 인사 올립니다. 숙영이라 합니다. 계시는 동안 편안히 지내실 수 있도록 먹을 것과 입는 것, 또 이 거처에 필요한 것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침상과 침구는 마음에 드시는지요.”
“아주 편안하오. 덕분에 잘 쉬었어.”
“특별히 신경 써서 큼직하고 튼튼한 것으로 준비하였으니 두….”
“흠.”
윤이 헛기침으로 숙영부인의 말을 끊었다. 다음 이어질 내용이야 뻔했다. 두 분이 운우지락 어쩌구 저쩌구.
가뜩이나 입술 금지를 당하여 몸을 사리는 와중에 괜한 소리로 무흔의 신경을 건드렸다가는 손을 잡아 지인을 받는 것조차 수월치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제 그만들 나가 보게. 내 은증왕과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윤이 일부러 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었지만, 노련한 숙영부인이 이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녀가 옆에 놓아둔 바구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사실 이걸 전해드리려고 찾아뵈었습니다.”
“장갑! 이리 고마울 데가.”
연보라색의 최상급 비단으로 만들어진 장갑이었다. 무흔은 반색을 하며 손을 내밀었건만, 숙영부인은 이를 엉뚱하게 윤에게 건넸다.
“직접 착용시켜 주시지요, 성주님.”
떠먹여 주려는 티가 너무 났다, 윤으로서는 그것이 오히려 민망할 정도로.
무흔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이미 그 자색 눈동자에는 놀리고 싶어 하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아니, 뭐… 내 알아서 할 터이니 가 보게.”
“가장 질 좋은 천으로 만들라 당부하셔서, 황실에서 사용하는 비단으로 만들었습니다.”
“식사를 하는데 굳이 불편하게 장갑을 착용하여야겠는가? 다 먹고 본인이 알아서 착용하겠지. 그만들 가 봐. 은증왕은 배고픈 걸 못 견디는 사람이야.”
난데없이 식신 취급을 받은 무흔은 노릇하게 익은 돼지고기 튀김을 가리키던 손가락을 접었다. 윤을 힐끗 노려보며 대신 볶은 야채를 가리켰다.
“저희가 가면 식사 시중은 누가 듭니까?”
“은증왕, 어제도 이리 다들 식사 시중을 들어주었소?”
탕에 푹 잠긴 연한 자라 고기를 막 입에 떠 넣은 무흔은 대답 대신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포로에게 쓸데없는 인력을 낭비하라 이른 적 없으니 다음 끼니부터는 음식만 들이게. 은증왕이 손이 없나 발이 없나.”
“환자이지 않습니까?”
“어제까진 엎드려 있었으나 오늘은 이리 바로 앉을 수도 있는데, 뭘. 할멈, 그만 가 보시게.”
“그럼 식사 시중은 성주님께서 대신해 주실 겁니까.”
“뭐?”
그제야 윤이 숙영부인의 속내를 눈치챘다. 아마도 아, 하고 입을 벌리면 음식을 쏙 먹여주는 것 같은 친밀하고도 다정한 행위를 연출시키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 몸이 친히 귀하신 포로님의 식사 시중을 들어드릴 터이니 그만들 나가.”
그제야 숙영부인이 만족스럽다는 듯 포근하게 미소짓고는 윤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둘만 남게 되자마자, 무흔은 웃음을 터뜨렸다.
“대단하신 주 국공께서 절절매는 상대가 다 있을 줄이야.”
“식사나 하시오.”
“시중을 들어주기로 했잖아? 자, 거기….”
무흔은 맞은 편에 놓은 젓가락을 가리키다 말고 손을 내렸다. 장난 좀 쳐 보려 했더니만, 윤이 사람을 잡아 죽일 듯이 노려보는 통에 말조차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먹다 체하겠네.”
“아팠던 사람치고는 식사가 참 화려하군. 죽 같은 걸 먹고 있을 줄 알았더니.”
“열이 난 거지 위장에 탈이 난 게 아니잖나? 여긴 왜 왔나?”
“아… 전할 소식이 있소. 마물이 출몰하는 태고산맥 일대를 흑성부대가 정기적으로 순찰하는데, 그 출발이 나흘 뒤요.”
“성을 비운다고? 얼마나 오래 걸리는데?”
“보통은 한 달가량이지.”
별생각 없이 먹는 것에 열중하던 무흔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산은?”
“응?”
“나를 산에 데려가기로 했잖아.”
아… 하고 잠시 생각하던 윤은 무흔의 엉덩이를 힐끔 훔쳐보고 말했다.
“다녀와서 같이 오르도록 해. 지금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잖아.”
“못 걷긴. 당장 내일이라도 갈 수 있는데!”
“오만상을 찌푸리며 뒤뚱뒤뚱 세 걸음이 한계라는 하온의 보고를 아침에 들었소만.”
“뒤뚱뒤뚱? 내가 오리요?”
무흔이 발끈하자, 윤이 소리 내어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입이 그리 튀어나온 걸 보니 오리가 맞는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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