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화
무흔은 대번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투덜거렸다.
“허, 주 국공께서 친히 닦아 주신다 하니 영광으로 알아야 하나.”
“어서.”
“면포를 이리 건네. 내가 직접 할 거야.”
무흔이 고집을 부리기 무섭게 윤은 앞에 놓인 희고 가느다란 손목을 덥석 붙들어 제 쪽으로 당겼다.
“윽.”
촉촉하게 젖은 면포가 어깨에 닿았다. 고운 살결을 살살 닦아 내린 하얀 천이 팔이 접히는 부분에 이르자, 무흔은 몸을 꼬았다.
“어찌 그러시오?”
“느낌이 좀… 이상해서 그래.”
무흔은 짧게 숨을 한 번 내쉬고는 이를 악물었다. 단순히 저를 붙든 윤의 손을 타고 지인의 힘이 빠져나가는 그 느낌과는 다른, 아찔함이 스쳤다.
“마차에서 느꼈던 것과 똑같아?”
윤이 이번엔 바깥쪽 팔을 닦으며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주 국공은 틈을 주면, 여실히 저급함을 드러내시지.”
“자, 고개나 좀 들어보시오.”
날렵한 턱이 하늘로 들렸다. 목덜미를 닦고, 쇄골을 지나, 면포가 가슴께에 이르자 무흔은 냉큼 허리를 뒤로 뺐다.
“여긴 아까 의원이 닦아 주었소. 이제 그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윤이 면포로 살살 가슴을 쓸어내렸다. 솟아오른 돌기가 보드라운 천에 스치는 순간, 무흔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었다. 아까와 비슷하면서도 더 야릇한 전율이 무흔의 등줄기를 스쳤다.
윤은 티 나지 아니하도록 어금니를 꽉 물고 마른침을 삼켰다.
무흔의 신음은 매번 거친 숨결에 묻어나왔으며, 또한 상대의 몸을 달아오르게 하는 색의 기운이 어려 있었다.
윤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척 고개를 돌리며 면포를 내려놓았다.
“옷을 입는 것을 도와드리지.”
“주 국공, 친절이 과도하니 저의가 의심스럽구려.”
“의심받는 것은 싫으니 솔직히 털어놓으리다. 내 그대를 만지고 싶어 그러하니 이해하시오.”
“뭐? 그딴 걸 이해하라?”
무흔의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이유였으나 윤에게는 아니었다.
단지 그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본디 이능력자와 치유자의 관계란 그러했으니. 목숨이 걸린 만큼, 지인을 행하는 이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설마… 지인 때문에? 기가 정화된다는 것이 그렇게까지 기분 좋은 일이오?”
“좋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야. 특히 나처럼 오랜 세월 정화의 정도가 저하된 자에게는 더욱 그러해. 허락하신다면, 더한 것도 하고 싶지.”
무흔은 경악에 찬 표정으로 윤을 향해 눈을 무섭게 떴다. 상종 못 할 부류. 고개를 저었다.
“허, 진작에 알아봤어. 마차에서도 대뜸 입을 맞추었지. 어제도 그러했고. 미친 것이야… 주 국공 당신은 정조라는 것에 대한 가치관의 정립에 문제가 있소. 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었나?”
“어찌하면 그대를 희로국으로 돌려보내지 아니하고 여기 머무르게 할지, 내 머릿속에는 그 생각뿐이오.”
윤의 대답은 실상 무흔 자신이 맨 처음 요구했던 것이었다.
열을 올리던 무흔은 그제야 꽉 쥔 주먹에 들어간 힘을 뺐다. 민망하여 슬그머니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등 정도는… 만지시든지.”
참으려다 실패한 듯한, 풉 하는 윤의 웃음이 허공에 가볍게 흩어졌다.
“되었소. 본디 치유자의 몸 상태가 온전치 못할 때는 지인을 하지 않는 법이야.”
“그럼 지금 몸을 닦는다는 핑계로 만지작댄 건 뭔데?”
“그건 그저 잔 밖으로 흘러넘치는 술이 아까워 홀짝 핥은 정도라, 그대의 기혈에 해가 가지 않아.”
“등을 만지는 것은 술을 들이켜는 정도의 행위요?”
“등을 만지게 되면, 자연스레 허리를 쥘 것이고, 허면 거기서 끝낼 수 없을 기분이 들어 그러하지.”
지나친 솔직함 앞에 무흔은 할 말을 잃었다. 충격. 경악. 그저 기가 찰 뿐이었다.
윤은 능글맞다 싶을 정도로 씩 웃어 보였다. 무흔의 손을 붙들어 옷의 소매에 끼워주었다.
“포로 교환이 성사되어 그대가 떠나고 나면 나는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대에게 닿는 것이 좋아.”
“그런 말을 어찌 그리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내놓나?”
“부끄러울 일은 아니지 않소? 음욕이 목적인 것도 아니거늘.”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있으니 참으로 편리하시겠네.”
무흔은 투덜대며 윤이 내미는 옷에 반대쪽 팔을 마저 끼워 넣었다.
“주 국공. 내 단단히 일러둘 말이 있소.”
“하시오.”
“지난 두 번은 피치 못할 상황이었다 치고 봐주겠어, 하지만 세 번은 허락하지 않아.”
“무엇을?”
무흔은 제 가슴 위로 윤이 쥐고 있는 양쪽의 옷고름을 매섭게 낚아챘다. 그 단어를 제 입으로 꺼내는 것조차 민망하여, 고개를 푹 수그리고 옷고름의 매듭을 지으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몰라 묻나? 입맞춤 말이야.”
윤이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하리다. 입맞춤은 두 번 다시 하지 않겠소. 약조하지.”
“너무 쉽게 말하니 믿음이 가지 않는데….”
“손만 꾹 잡고 있어도 지인은 충분해. 그대가 싫어하는 행위를 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 내 말로 과하게 농을 쳤던 것들 또한 사과하리다.”
“갑자기 왜 이리 정중해지셨소?”
“오늘 새벽 오래간만에 산에 올라 깨끗한 기혈로 편안한 명상을 하고 나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이다. 내가 지인에 들뜬 나머지 그대에게 너무 아이처럼 굴었어. 그간의 일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니 너무도 부끄럽더군.”
“뭐… 이제라도 격을 갖추어 대하면 되지.”
윤이 무흔의 손을 꼭 쥔 채, 하얀 손등을 토닥였다.
“그대는 지인의 제어를 얼른 배우셔야겠어.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종종 실수를 할 정도로 힘이 새어 나오고 있으니.”
“도학 선생에게 배우면 된다 하였지?”
“유람을 나갔는데 슬슬 돌아올 때가 되었어. 어제 도착하자마자 그것부터 알아보았소.”
“그거 말고, 또 알아볼 것이 있지 않아?”
무흔의 지적에 윤은 뜨끔했다. 생각나지 않는 척, 대체 무슨 이야기냐 묻는 듯 가만히 무흔의 눈동자만 들여다보았다.
“내가 희로국에 돌아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타개책을 연구해 본다 하지 않았나? 나를 옥에 가두었던 사평이라는 자가 주 국공의 책사라지? 그의 두뇌를 빌리면 어때?”
“그리하리다. 기다려주시오.”
윤은 사평이 제안한 것에 대해 함구했다. 이능력으로 모든 문제를 타개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나, 이는 윤에게 있어 타협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이능력으로 인명을 살상하지 않는다. 그 신념을 버려가면서까지 제 명줄만을 위해 치유자를 붙들어둘 수는 없었다. 마음이 대번에 무거워졌다.
“이만 쉬시오. 곧 식사가 나올 테니 잘 먹고. 자, 일단 누워.”
“지금껏 누워 있었는데, 또 누우라고?”
“누워야지. 그래야 빨리 회복되는 거요.”
윤은 억지로 무흔을 침대에 눕혀 놓고는 이불을 잘 덮어주고 도망이라도 치듯이 그 자리를 피했다. 만나는 횟수를 거듭할수록 저 힘에 욕심이 나니, 이러다 자칫 잘못하면 제 신념을 저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덜컥 일었다.
*
주한모가 떠나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흑성부대의 장을 맡고 있는 이능력자 채영이 성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대장 채영, 주군을 뵙습니다.”
윤보다 7살 위인 그녀는 이능력이 발현되자마자 효명성에 들어왔다. 윤에게는 누이 같은 존재였다. 이능력자 중에서도 특이체질인 그녀는 목화토금수의 다섯 속성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염력계 이능력자였다.
“난데없이 무슨 격식을 차리나?”
무흔을 살피고 돌아온 윤은 사평이 가져다준 밀린 일거리에 파묻힌 상태였다.
“아유, 우리 성주님 일이 많으시네요. 다 마치려면 얼마나 남았으려나….”
“왜?”
“왜는 무슨. 주군께서 바쁜 건 아는데, 더 중요한 일도 있잖아요. 가장 중요한 일. 종이 쪼가리보다 더 중요한 일.”
윤의 곁에 앉아 있던 사평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머, 사평 오라버니도 있었네. 종이 쪼가리가 산처럼 쌓여서 안 보였어.”
“연회 내내 숨어 있다 이제 나타나?”
“오라버니도 알잖아. 난 그분이랑 안 맞아. 가식적으로 웃는 거 보면 두드러기가 날 것 같은데 어떡해.”
“눈에 뵈는 게 없구나. 어찌 성주님 앞에서 그 숙부 되시는 분을 함부로 이야기하느냐!”
“어머, 오라버니. 나랑 술만 마시면 안주 삼아 같이 욕할 땐 언제고 난데없이… 이리 표리부동한 자를 봤나? 아까도 부리나케 꺼져서 속이 다 시원하다 하였잖아?”
어려서부터 성에서 지낸 자치고 주한모를 기꺼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윤은 늘 그렇듯 채영과 사평이 말로만 투닥거리는 것을 힐끗 바라보고서는 다시 일에 집중했다.
“주군, 사나흘 안에 다 끝낼 분량인가요?”
“글쎄. 아직 열어보지 못한 사안도 많아서 확답을 줄 수가 없네.”
“태고산맥 정기 정찰, 닷새 뒤 출발입니다.”
막 완성된 서류에 인장을 쿵 찍던 윤은 한숨을 푹 쉬었다. 무흔을 머무르게 할 묘책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무작정 두고 가려니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니… 어째서 한숨을 쉬십니까? 주군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업무이신데! 역시 소문의 그 백자를 놓고 보름이나 자리를 비우는 것이 영 내키지 않으시….”
“채영.”
“예?”
“정찰조는 다 짰나?”
“아직. 이제 하면 되죠.”
“한가해 보이는데, 오늘 안으로 가져와. 사평한테 내.”
“으… 아닙니다. 저 잔소리꾼 말고 주군께 직접 내고 싶은데요.”
“사평, 한 시진마다 채영한테 들러서 일 진척 상황 확인해.”
소소한 벌을 주는 것으로 마무리했건만. 그때부터 윤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염록왕을 무사히 모셔오면서도 무흔을 보내지 않는 방법, 그야말로 이것도 저것도 다 갖겠다는 심보의 계책을 어찌 마련해야 하는지.
그렇게 밤잠을 설치고, 새벽의 명상을 망치고, 아침 식사도 뜨는 둥 마는 둥 했다.
결국 사평에게 한 번 더 도움을 청했다.
“저번에 말씀드린 것이 싫다 하시니, 다른 방도를 연구해보겠습니다.”
“지금 바로 떠오르는 것은 없나?”
“선대 성주님 내외의 죽음, 그 배후를 밝혀내시려다 억울하게 잡혀가신 우리 염록왕 전하의 귀환을 포기하시고 황제께 등을 돌려 북부를 독립국으로 선언하는 것 이외에는 없습니다.”
얼토당토않은 소리였다. 윤이 막 험한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오라버니! 좋은 아침!”
동동 뛰어와 윤의 목에 대롱대롱 매달린 여자아이는 사촌동생 설하였다. 햇살같이 맑고 발랄한 붙임성 앞에선 전원 무장해제였다.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은증왕 전하가 아프다면서? 병문안 가도 되나?”
“은증왕. 뒤에 전하라고 붙이지 않아.”
“왜? 왕이잖아.”
“포로니까. 은증왕이라고 불러라.”
“우웅… 서럽겠다.”
“뭘, 서러울 것까지야. 포로가 다 그렇지. 전하 전하 떠받들어 주면 뭐 처우가 더 나아지나.”
일부러 퉁명스레 연출한 줄도 모르고, 냉기 그득한 윤의 목소리에 설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은증왕을 위로해주고 싶어. 병문안엔 뭘 가져갈까.”
“불허한다.”
설하의 눈이 당혹감에 동그래졌고, 구석 책상에 멀찍이 앉아 서류에 파묻혀 있던 사평은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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