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화
한발 늦었다. 윤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하온의 손가락이 무흔의 손목에 닿았다.
윤의 입에서 탄식과 함께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이런.”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하온은 맥에 집중했다.
성주의 난처한 기색을 살피던 의원은 이내 그 연유를 깨달았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맥이 그 답이었다.
“성주님, 이는 치유자의 맥입니다! 은증왕에게 지인의 힘이 있… 음을 알고 계셨군요?”
“너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사평도 이환도 아직 알지 못하니.”
“예, 그리하겠습니다.”
하온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퍼져나갔다. 성주와 은증왕의 소문을 듣고 심장이 철렁했었는데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잡아떼시더라, 하며 갸우뚱대던 이환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온은 조심스레 무흔의 손목을 다시 짚었다.
“으… 어머니… 어머니, 하아… 흐으….”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무흔이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로 모친을 찾고 있었다.
윤은 제 어린 시절의 일이 떠올랐다. 열 살 즈음, 고열로 앓아누워 저렇게 어머니를 찾았었다.
‘4년 전, 은증왕이 벽제성으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희로국의 황후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들었다. 모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여 그것이 마음에 한으로 맺혔던 걸까. 어찌 저리 서글프게 어머니를 부른단 말인가.’
고작 그 정도 일로 앓아누웠느냐 타박을 줄 생각이었건만. 막상 오한으로 덜덜 떠는 그를 보고 있자니 생각지도 않았던 동정심이 일었다.
옆에서 눈치를 보던 하온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성주님,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은증왕의 맥을 짚어보니 우리 성에 있는 그 어느 치유자들보다도 지인의 능력이 깊고 크게 느껴졌습니다. 솔직히, 성주님의 경우와 같이 측정 불가가 맞습니다. 그런 연유로 벽제성에서 은증왕을 데려오신 것입니까?”
“물론이지.”
“허면… 어제도 혹시 제 진맥으로 인해 치유자임이 드러날까 염려하시어 나가라 하신 것인지요?”
“당연하지. 그것이 그리 궁금하였느냐?”
“송구합니다.”
“비밀로 해야 할 것이다.”
“예.”
하온은 꾸벅 허리를 숙이고서 환자에게로 돌아섰다. 준비해 온 얼음물에 면포를 푹 담갔다 꾹 짰다. 성주를 짝사랑하는 제 쌍둥이 형 하경을 떠올리며 안도의 미소를 머금고는 무흔의 뜨끈한 이마에 찬 것을 얹었다.
“여긴 제가 있을 터이니 가 보십시오. 열이 내리고 은증왕의 정신이 들거든 소식을 전하여 드리겠습니다.”
“어젠 멀쩡해 보이더니, 은증왕은 어찌 이리 갑자기 아플 수 있단 말이냐?”
“은증왕은 어제 혼절을 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고 긴장 또한 많이 한 터라 오늘 이리 앓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렇구나.”
“허나 결정적으로, 어제 돌아와 보니 은증왕이 등을 훤히 드러낸 채로 잠이 들어있었습니다. 둔부에 얹은 약재가 찬 성질이라 급히 닦아내고 새 옷을 입힌 후 두꺼운 이불을 덮어 드렸으나, 그 사이 한기가 많이 들었던 듯합니다.”
“아….”
윤은 제 욕정에 놀라 맨몸을 덮어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이곳을 나섰던 것이 후회되었다. 끙끙 앓는 무흔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더욱 미안해졌다.
“열을 내리는 탕약은 달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냐?”
“호출받았을 때 달이라 지시해 놓고 나왔습니다. 곧 이리 가져올 것입니다.”
자리를 뜨려던 윤은 아, 하고 걸음을 돌렸다. 침상에 걸터앉아 은증왕의 턱을 쥐고 돌렸다. 숙부에게 활대로 맞은 뺨에는 길고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올라 있었다.
“여기, 이 상처는 어떠하냐. 깊은 것인가?”
“흉도 남지 않을 가벼운 생채기입니다. 그저 활대로 맞은 것뿐이라 멍이 빠지면 예전과 같을 것입니다. 살결이 연하고 피부가 흰지라 더 짙게 도드라져 보이는 것뿐입니다.”
“그래, 이따 또 들르마. 수고하거라.”
“들어가십시오.”
윤은 문간에 잠시 발을 멈추어 하온을 돌아보았다.
‘은증왕에게 지인의 능력이 있음을 함구하라 재차 당부할까. 아니다, 다른 이라면 모를까 이 녀석이라면 괜찮아.’
하온이 또래답지 않게, 심지어 우울하리만치 진중하고 입이 무거운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윤은 걱정을 털고 무흔의 처소를 나섰다.
*
무흔은 눈을 떴다. 현실인지 악몽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장면이 흐릿하게 사라지고 낯선 천장이 보였다. 목이 잠기고 입술이 바짝 말랐다.
힘겹게 눈을 깜빡이는데, 저를 내려다보는 얼굴이 어쩐지 낯익었다.
“헉!”
소스라치게 놀라며 무흔은 이불을 꽉 쥐고 벌벌 떨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어리둥절한 의원의 곁으로 다가온 윤이 침상 위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주 국공!”
무흔이 반색을 하며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았다. 윤이 놀란 표정으로 무흔을 살폈다.
“의원 말로는 이제 열은 다 내렸다는데. 정신이 좀 드는가?”
그제야 무흔은 제 몸이 온통 땀으로 젖었음을 깨달았다. 윤의 곁에 나란히 선 자를 빤히 바라보고서는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미안하오. 하온 의원이 내 아는 이와 꼭 닮은지라, 순간 다른 사람으로 착각을 하였소.”
그 다른 사람이 누구인지 되묻고 싶었으나 하온은 꾹 참았다. 망설이다 말고 또 한 번 더 참고, 그런 후에야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건넸다.
“괜찮습니다. 열이 내릴 때까지 오래 앓으셔 탈수가 심하니 물을 좀 드시지요.”
무흔은 물을 받아 마시면서도 하온의 얼굴을 조심스레 살폈다. 감옥에서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희로국에서 알던 기억 속 사내와 참으로 꼭 닮은 얼굴이었다.
그러한 무흔과 복잡미묘한 표정의 하온을 번갈아 바라본 윤은 속으로 끙끙 앓고 있을 하온을 위하여 나서주었다.
“은증왕께선 우리 의원을 어찌 그리 빤히 바라보나? 착각을 했다던 그자와 많이 닮은 모양이야.”
“모후께서 살아계실 적에, 지하의 석궁에 갇혀 사는 이 못난 아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철이 바뀔 때마다 천장과 벽의 그림을 바꾸게 해 주시었소.”
무흔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하온은 슬그머니 몸을 돌리어 주변에 놓인 물과 면포, 침통을 정리했다. 제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 함이었다.
“드나드는 화공들 중 앳된 얼굴의 청년 하나가 참으로 다정했지. 모두들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혹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경기를 일으키듯 하였는데… 그는 달랐어. 바깥 이야기들을 내게 전해주고, 내가 청하는 것들을 석벽에 그려주기도 하고.”
“그 화공이 우리 의원과 꼭 닮아 그리 소스라치게 놀랐던 건가?”
“악몽을 꿨던지라, 똑같은 얼굴을 보니 여기가 그 시절의 황궁인 줄로만 알고 놀랐어. 흘러간 세월을 생각해보면 그 화공은 저 의원과 연배도 비슷해. 참으로 닮았소. 혹 의원이 예전에 희로국의 백성이었나?”
하온이 굳은 표정으로 돌아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윤은 지어 만든 너털웃음을 냉큼 터뜨리며 대신 답을 건넸다.
“하온은 효명성에서 태어나 줄곧 여기서 자랐지. 조상부터 대대로 우리 주씨 집안의 가신이야.”
“참으로 신기한 일이지. 세상 어딘가에 꼭 닮은 존재가 둘이 있다는 것이. 어우, 추워.”
무흔이 두 팔을 가슴 앞으로 교차하여서는 양손으로 팔뚝을 감쌌다. 땀이 식자 추위가 엄습한 탓이었다.
하온은 젖혀 두었던 이불부터 덮어주며 차분히 이야기했다.
“우선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으시고, 그런 후에 식사를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온이 나가 병사들에게 시킬 것을 전하는 동안, 윤은 서랍장을 열어 적당한 것을 찾아내어서는 무흔을 향해 펼쳐 보였다.
“일단은 이걸 입도록 해. 옷은 새로 몇 벌 지어주라 일러둘 테니.”
의원의 부축을 받아 힘겹게 일어나 선 무흔은 윤을 향해 매몰차게 말을 뱉었다.
“돌아서시오.”
“어찌 그리해야 하는데?”
“아니 그럼… 남이 빤히 보고 있는데 몸을 드러내라 그 말이야?”
“무슨 상관인데. 사내들은 다 벗고 강가에서 물놀이도 하고 다 같이 뒷산에서 온천에도 들어가거늘.”
“효명성에 온천이 있소?”
무흔의 눈이 빛났다. 이 와중에, 호기심 가득한 그 눈빛에 윤의 웃음이 피식 솟았다.
“은증왕께선 온천을 좋아하는가?”
“기행문으로만 접하였지. 내가 실제로 가 보기를 하였겠나, 들어보기를 했겠나. 뜨거운 물이 땅에서 솟는다니 참으로 궁금해.”
“강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하천과 폭포를 벽화로 접하였으나 온천은 그림으로도 접하여 본 적이 없어.”
“산에 같이 오르기로 약조하였으니, 온천에 가십시다. 강이 얼기 전에 배도 띄우고. 얼른 옷부터 벗으시오.”
윤이 놀리기라도 하듯 일부러 더 무흔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흔은 절대 밀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 괜한 오기가 든 탓에, 상대와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상의의 매듭을 천천히 끌렀다.
“주 국공께선 사내와 다 벗고 목욕은 하시면서, 사내가 옷을 갈아입는 것을 처음 보나?”
“그런 몸은 처음 보지.”
“어제도 봤으면서.”
윤의 눈이 무흔의 손끝에 붙들려 있었다. 매듭이 풀어짐과 동시에 새하얀 가슴팍이 엿보이고, 이어 한쪽 팔을 빼내자 뼈대가 아름답게 잡힌 어깨가 드러났다.
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봄 산에 가득한 진분홍의 철쭉이 아닌, 벚꽃잎의 은근한 분홍빛을 품고 있는 돌기가 양 가슴 위로 자그마하게 솟아 있었다.
무흔은 그 눈빛의 방향을 제대로 파악했으나, 가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도발이라도 하듯 반대쪽 어깨에 걸쳐진 소매까지 벗어버렸다.
“내가 구경거리라도 된다 여기는가?”
“구경할 만하지. 참으로 신기해. 종이보다도 더 흰 살결이라는 것을 어디 쉽게 구경할 수 있나.”
하온은 깨끗한 물에 면포를 적셔 꾹 짠 후, 땀에 젖은 무흔의 몸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눈을 내리깔고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윤과 무흔의 날 선 신경전에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성주의 마음을 차지할 이는 희로국에 간자로 가 있는 제 형이 되어야만 했다.
무흔은 불쾌한 기색을 그득 담아 윤을 노려보았다. 같은 남자인데, 의원의 손길은 조금도 거부감이 들지 않으나 윤의 시선은 이상하게 거슬렸다.
“그만 쳐다봐.”
“불공평하다 여기신다면, 은증왕께 나의 몸도 볼 기회를 드리지.”
“안 보고 싶소만.”
“여러모로 제법 볼거리가 될 터인데? 아, 온천에 가고 싶다 하시었지. 그때 보시면 되겠어.”
“성주에, 국공이라는 자가… 쯧쯧… 저리 유치하여서야.”
윤은 대꾸 없이 가만히 하온의 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게 아까부터 의원의 손이 무흔의 몸에 닿는 것이 자꾸만 눈에 걸리고 또 신경 쓰였다.
“하온, 나가서 은증왕이 드실 식사를 챙겨오도록 하거라. 원기를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각별히 신경 쓰라 이르고.”
“예, 성주님.”
자연스레 일을 시키는 모양새이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그를 내쫓는 것이었다.
하온이 은증왕의 몸을 닦던 면포를 대야 옆에 내려놓았다.
그가 허리 굽혀 꾸벅 인사를 올린 후 방을 나서자마자, 윤은 무흔에게로 다가섰다. 의원이 하던 것처럼 면포를 물에 적셔 꾹 짠 후, 무흔을 향하여 손을 폈다.
“팔을 내밀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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